조선왕 제1대 태조 이성계 이야기 작성일자; 2017.07.19.목요일,맑음
생졸; 1335-1408.74세
재위기간; 1392-1398.6년
능;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건원릉
가계도;
부; 환조 이자춘
모: 의혜왕후 영흥 최씨
적녀: 정화 공주-용원 부원군 조인벽의 후취 부인으로 하가
적자: 태조 이성계
후궁: 정안옹주 김씨
서자: 의안대군 이화
처; 신의황후 한씨
진안대군
영안대군(제2대 정종)
익안대군
회안대군
정안대군(제3대 태종)
덕안대군
경신공주
경선공주
선덕왕후 강씨
무안대군
의안대군
경순공주
성빈원씨
정경궁주 유씨
화의옹주 김씨
숙신옹주
찬덕 주씨
의령옹주
이성계는 고려 말 요동 정벌을 위해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고려의 우왕을 폐하고 정권을 장악 한 뒤 고려 왕조를 무너 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인물이다.
그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여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였고,
사대주의,배불숭유,농본주의를 건국 이념으로 삼아 조선의 제도를 정비했다.
그러나 말년에 아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으로 고통 받으며 불교에 심취했다.
이성계는 고려 충숙왕 4년인 1335년에 회령에서 이자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이안사는 전주 지방의 향리로 원나라의 여진족이 살고 있던 간도지방과 함경도인 쌍성총관부로
이주해 원나라의 지방관이 된 뒤 부터 기반을 닦기 시작 하였다.
아버지 이자춘도 쌍성 총관부가 있던 화주 지방에서 원나라의 천호라는 지방관을 지냈다.
고려의 동북면 지역은 특수 지방 행정 구역으로,
고려의 타처에서 온 유이민과 여진 사람들이 섞여 살던 곳이었으나
고려 고종 1258년에 몽골(원나라)이 고려에 침입하여 고려 땅인 철령부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총관과 천호를 조휘와 탁청의 일족에게 세습시켜 100여 년 간 통치하여 왔다.
1356년(공민왕 5년)에 공민왕의 반원 정책으로 추밀원 부사 유인우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고,
이 지역에 토착해 있던 조휘의 손자인 조돈과 이자춘의 협력으로 쌍성 총관부를 공격하여 총관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의 반격을 물리치고 이 지역을 탈환하고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화주목을 설치했다.
이 지역을 수복하기까지 고려 고종 1258년 부터 공민왕1358년 까지 근100년이 걸렸다.
이성계의 집안은 이때부터 고려 중앙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361년,이성계는 '박의의 난'을 평정하고,
1361년10월(공민왕 때),독로강 만호인 박의는 고려를 배반하고 천호 임자부와 김천룡을 죽였다.
공민왕은 형부상서 김진에게 토벌케 했으나 김진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자
당시 동북면 상만호 이성계로 하여금 1.500명의 가병으로 김진을 지원하도록 지시했다.
박의는 이미 강계로 도망갔으나 이성계의 추격을 받아 박의 이하 그 세력은 궤멸되고 말았다.
기록상 남아 있는 장수로써 이성계의 첫 출진이 바로 '박의의 난'을 평정 한 것이다.
1362년, 이성계는 홍건적에게 함락된 개경을 탈환하고 원나라의 장수 나하추와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1364년, 최유가 기황후를 통해 덕흥군을 고려 왕으로 내세우고 요동성의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평안도지방을
침입하자 최영과 함께 이성계가 이끄는 정예 기병1천의 병력을 이끌고 이들을 섬멸했다.
1370년, 원정군을 이끌고 랴오둥까지 가서 원의 잔병을 모아 동녕부를 점령하고 고려를 위협하던 중앙군
조직에서 낭장(중랑장 다섯번째 아래 계급)인 김백안 등을 물리쳤다.
김백안의 아버지는 중으로 통제원의 비와 간통하여 김백안을 낳았다.
낭장으로 있다가 뒤에 원나라에 들어가서 대성을 거쳐 평장사가 되었고,
원나라가 망하자 요심 관리가 되었다.
1388년,이성계는 수문하시중이 되어 최영과 함께 임견미,염흥방을 주살하고 최영과 함께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이 시기는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시기로,
명나라는 원에 남아 있는 구세력들을 물리치고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명나라가 철령 이북과 동,서쪽은 원래 원나라의 땅이므로 앞으로도 요동의 관할로 하겠다고
통보를 해 온 것이다.
이때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문제로 랴오둥 정벌이 결정되자 ,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공격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데다 농사철에 군사를 모으는 것은 옳지
않을뿐만 아니라 원정을 틈타 왜구가 침입할 위험도 존재하므로 원정에 반대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최영은 명나라에 맞서 싸워야 한다며 전쟁을 준비했다.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가 되어 좌군 도통사 조민수와 함께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위화도까지
진군하였으나 도중에 이탈하는 군사가 끊이지 않았다.
또, 때마침 장마철이 시작되어 강물이 불어나 고려의 랴오둥 정벌군은 위화도에서 꼼짝을 하지 못했다.
이성계는 우왕에게 회군하기를 청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조민수와 함께 회군하기로 결정하여 회군을 하자 우왕은 도망하고 최영은 항전했으나 체포되어
고봉현에 유배되었다.
최영은 합포와 충주로 유배되었다가 공료죄로 개성으로 압송되어 그해 12월에 참수되었다.
이후 창왕과 공양왕이 왕위를 이었으나 이성계는 우시중이 되어 정치적,군사적 실권자가 되었다.
1390년(공양왕 1), 영삼사사,
1391년,삼군도총제사가 되었으며,
이 시기에 조준 등의 상소에 따라 전제 개혁을 단행해 사전을 혁파하고 양전 관찰사제 등을 단행하면서
반대 세력들을 하나둘 제거해 나갔다.
그러던 중 명나라에서 귀국하는 태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자 정몽주는 이것을 기회로 삼아 조준,정도전,남은 등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정몽주는 이성계의 병문안을 다녀오다 귀가하던 중에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게
피살 되므로 고려의 마지막 중심인 정몽주는 허물어지고 말았다.
1392년7월, 마침내 이성계는 공양왕을 폐하고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으니 그때 그의 나이 58세였다.
그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한 뒤 왕씨의 본거지인 '개경'을 버리고 '한양'을 도읍지로 삼았다.
정도전과 조준을 내세워 궁궐과 도성을 건립하는 한편 토지 제도,재정 제도를 개혁하는 등 국가 제도 전반을
개혁하는 동시에 노비 변정 사업을 실시했다.
인사 제도를 정비해 서리 출신의 관료 등용을 제한하고 지방의 사족들에게 문호를 넓혔다.
성균관과 향교도 정비하고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의창제를 복구했다.
군현제도 정비하여 도제를 시행하고 도별로 재상급의 관찰사가 지방의 행정을 총괄하게 했다.
군제에 있어서는 부병제와 무과를 시행하고,전국의 군사 조직에 대한 관리를 강화했다.
이성계의 이런 조치로 중앙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강해지고 왜구의 침입도 잠잠해졌다.
이성계는 외교적으로는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삼는 사대주의를 표방하므로써 이때부터 조선은
명나라에 국호와 왕위의 승인을 받는 풍속이 이어져왔다.
또한 고려가 멸망한 원인은 부패한 불교에 있다고 생각하여 숭유배불 정책을 바탕으로 한 유교를
건국 이념으로 삼았다.
경제적으로는 농업을 장려하고 토지를 개척해 농본주의에 의한 신분 제도를 확립했다.
건국 초기 정권은 정도전,조준,남은 등의 개국 공신들이 중심에 있었고,
이색,우현보,권근,하륜,석석린 등의 신진 사류라고 해도 중도-온건파에 속하는 인물들은 유배되었다.
이렇게 정치적,경제적,문화적으로 안정되어 갔던 반면 후계 왕권을 둘러싼 내분은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성계가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소생(방우,방과,방의,방간,방원,방연)의 여섯 아들의 불만을
일으켰다.
특히 조선을 건국하는 데 가장 공이 컸던 방원의 불만은 대단했다.
세자인 방석의 생모인 신덕왕후 강씨는 자신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위병으로 세상을
떠났 후 강씨의 3년상을 마친 후 이성계는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이 와중에 정도전 일파가 왕의 전처 소생을 모두 제거 하려하자 이방원은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을
제거하고 이복 동생인 강씨 소생의 방번과 세자 방석,누이의 남편인 이제까지 죽였다.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성계는 어쩔 수 없이 둘째 아들인 방과(훗날의 정종)를 세자로 세웠다.
장남 방우는 고려를 멸망 시킨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생각해 산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듬해 9월,이성계는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제2차 왕자의 난까지 터지자 골육 간의 권력 쟁탈전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인 동북면으로 들어갔다.
이성계는 태종으로 등극한 이방원이 평소 그가 신임하던 성석린을 보내자 마지못해 대궐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대궐을 떠나 다시 함흥에서 칩거했다.
그 후 이방원이 보내는 사신마다 모두 잡아 죽이거나 잡아 가두고 보내지 않았는데,
'함흥차사'라는 말은 이 때문에 생겨났다.
그러다가 안변 부사 조사의가 난을 일으키자 이성계는 이방원이 보낸 무학대사를 따라 대궐로 돌아왔다.
이성계는 자식들 간의 불화로 인해 그의 말년은 고뇌와 고통의 시간이었으며,불교에 심취해 궐 안에 절을
짓고 염불을 외우며 살다가 창덕궁 별전에서 죽었다.
그의 나이 74세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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