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南誾)       작성일자; 2007.08.29.수요일,맑음

 

남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무신

생졸; 1354(공민왕3)~1398(태조7)  45세

본관; 의령

아버지; 검교시중 남을번

형; 영의정 남재(在),

아우; 우상 절도사 남지(贄).

 

고려 말기에 왜구 토벌과 신진 사대부 정치인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 개국공신 1등으로 의성군에 봉해졌고,

사후 의정부 영의정에 추등된 뒤 의성 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1374년, 고려 공민왕 2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때 삼척에서 왜구를 무찔렀다.

고려의 권문 세족들의 부패에 염증을 느낀 그는 그 뒤에 개혁을 주장하는 이성계,정도전,정몽주등의 신진 사대부에 가담,

그 중 정도전 등과 함께 이성계 세력의 중심 인물이 되어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체결해야 할 것을 극력 주장하였다.

1388년 ,우왕 14년 요동 정벌을 반대하였으며  조인옥등과 함께 우군도통사 이성계에게 위화도 회군을 진언했다.

   그의 진언을 받아들여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엿으며 회군 뒤에는 이성계의 왕위 추대를 계획하는 데 참여하였다.

1389년, 공양왕 추대에 참여하였고,

1391년에 이성계가 해주에 간 사이에 정몽주의 탄핵으로 조준,정도전,윤소중,조박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1392년4월,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되자 유배에서 풀려나 정계에 복귀하여 6월 요동 정벌 실패로 돌아간 뒤

   정도전,조준,조인옥 등 52인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 왕조를 개국하였다.

건국 후,신덕왕후 강씨 소생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정안대군 방원과 적을 지게 된다.

 1395년(태조 4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으나,

1396년, 형인 남재와 함께 특별히 서용되었으나 명나라로 보낸 정조사가 가져간 이성계의 친필 표문 중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비위를 거슬리는 단어가 있어 사신 정총등이 살해되고,

   초안자인 정도전을 명나라에 압송하도록 압력을 가해오자 명나라 사신들을 달래서 되돌려 보냈다.

   군량을 비축하였으며 사람을 보내 요동 주변의 정세를 파악,정탐케 하여 요동정벌을 계획하기도 하였으나 명나라에

   누설된다.

1397년, 명나라는 조선 조정에 요동 정벌을 중단하라고 경고했다. 요동 정벌을 목적으로 정도전과 대대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으나 정도전의 개혁과 명나라와의 전쟁 준비는 조준등의 반발을 일으켜 끝내 결별하게 되고 만다.

   남은과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출병을 요청하였으나 조준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남은의 첩의 집인 송현방에 모여 정사를 논하던 중 이방원에게 습격을 받고 하경과 최운이라는

   수행원을 데리고 도주에 성공했으나 그 후 순군옥에 스스로 홀로 들어가 최후를 맞이하였다.

   정안대군도 그를 정도전의 일파라고 비난하면서도 그의 가족이나 친척에게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았고,

    그의 형과 동생, 아들들은 계속 관직에 등용된다.

세종 즉위 이후에 남은은 죄가 있어도 그 공을 잊을 수 없다 하여 영의정에 추층되었고 의성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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