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국영 2019.08.02.금요일,맑음
홍국영; 조선 후기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세도정권을 장악했던 문신.
본관; 풍산
부; 판돈녕부사 낙춘
1771년 정시문과에 급제했고,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에 소속되어 뒤에 정조가 되는 세손을 보호하는 데 힘써 세손의 신임을 얻었다.
정조가 즉위하고 곧 도승지에 올라 정책 결정을 통제했으며, 군사권까지도 장악하는 벼슬에 올랐다.
정조의 두터운 신임에 힘입어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최초의 세도정권(세도정치)을 이루었다.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최초의 세도정권을 이루었으나 . 본관은 풍산. 자는 덕로. 아버지는 . 기반이 약해 곧 실각했다
1780년 왕후 독살 기도에 연루된 혐의로 탄핵을 받아 가산을 몰수당하고 강릉으로 추방되었다가 34세로
병사했다.
1771년(영조 47) 정시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었다. 이어 세자시강원사서로서 서명선·정민시 등과 함께 세손(뒤의 정조)을 보호하는 데 힘써 세손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1776년 노론 청명당 계열의 김종수 등과 연계하여 세손의 승명 대리를 반대하던 정후겸·홍인한·김귀주柱) 등을 탄핵하여 실각시키고, 홍상간·윤양로 등을 처형시켰다.
그해 정조가 즉위하자 동부승지로 숙위대장을 겸임했고 곧 도승지에 올라 정책 결정을 통제했으며, 금위대장·훈련대장 등을 거쳐 오영도총숙위가 되어 군사권을 장악했다.
정조의 두터운 신임에 힘입어 모든 소계·장첩·차제를 총람하는 등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백관을 맹종하게 함으로써 최초의 세도정권을 이루었다.
1778년(정조 2)에는 누이를 원빈으로 삼게 하여 정권을 굳게 다졌다.
그러나 원빈이 1년 만에 죽자 김시묵의 딸인 효의왕후를 의심하여 핍박함으로써 왕실세력의 미움을 받았으며, 은언군의 아들 이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에 봉하고 세자로 책봉시키려다가 여의치 않자
모반죄로 몰아 제거하는 등 세도정권의 유지에 급급했다.
이조참의·대제학·이조참판·대사헌을 역임하다가
1779년 9월 정조의 은퇴 권유로 조정에서 물러나 봉조하가 되었다.
1780년 왕후 독살기도에 연루되었다 하여 정민시·서명선·유언호·김종수 등의 탄핵을 받아 가산을 몰수당하고 강릉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실의에 잠겨 지내다가 34세로 병사했다.
송시열의 후손인 송덕상, 민우수의 문인 김종후 등의 지원을 받아 노론 청류를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했으나, 전횡을 일삼고 나아가 스스로 외척이 되어 독주함으로써 여타 외척세력 및 노론·소론·남인 모두와 대립했다. 특히 정조의 준론탕평책 구상 추진에 장애가 되면서 제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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