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효(朴泳孝)          작성일자;2019.08.19.월요일,맑음

생졸; 1861(철종12)-1939.9.21

본관; 반남.

부; 판서 박원양 모; 전주 이씨

처; 영혜옹주-철종의 유일한 장녀.

      1872년(고종 9) 4월13일 전 도사 박원양의 아들 박영효와 혼인하였으나,

     3개월만인 7월4일에 죽어서 후손을 얻지 못하였다.

 

 

박영효는 한말의 정치가,개화 사상가. 근대적 개혁을 추구한 갑신정변 및 갑오개혁의 주체로 참여했다.

그의 사상은 북학파 실학의 바탕 위에 선 것이었지만,

일본의 문명 개화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일본의 제국 주의적 본질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고,

한일 합병 이후에는 일제의 통치에 협력했다.

 

당시 온건과 급진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개화파에서 급진 개화파에 속했다.

갑신정변 후 새 내각에서 전후영사 겸 우포장을 맡았지만 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갑오개혁 때 김홍집 내각의 내무대신으로 임명되어 실권을 장악하고 을미개혁을 단행했다.

그의 사상은 일본의 문명개화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일본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고,

한일합병 이후에는 일제의 회유책에 의해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과 조선은행 이사를 역임했다.

 

1872년(고종 9)4월, 수원유수 신석희의 천거와 우의정 박규수의 추천으로 철종의 부마가 되어 금릉위에 봉해졌다.

1870년대 중반에 형 박영교를 따라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 들면서

개화사상가인 오경석·유대치·이동인 등을 만났다.

북학파 박지원의 저술을 통해 평등사상을 배우는 한편

오경석이 베이징에서 가지고 온'해국도지'·'영화지략'  등 청나라의 개화서적을 돌려 보면서

김옥균·서광범·홍영식 등과 함께 1870년대 후반에 개화당을 조직했다.

1878년, 오위도총부도총관,1879년, 혜민서제조,1880년에는 의금부판의금을 지냈다.

1882년(고종 19) 발생한 임오군란의 수습책으로 제물포 조약이 체결되자,

조약 이행을 위한 특명전권대신 겸 제3차 수신사로

부사 김만식, 종사관 서광범 등 수행원 14명, 비공식 사절인 민영익·김옥균 등과 일본으로 갔다.

그의 임무는 군란에 대한 사과 국서를 전달하고 제물포조약의 비준 교환을 무사히 수행하는 것과

손해배상금 50만 원 지불방법의 완화를 교섭하는 것이었다.

일본으로 가는 도중 배안에서 태극팔괘의 도안을 기초로 처음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박영효 일행은 일본 체류기간 동안 일본 조야의 유력한 인사는 물론

영국·미국·독일 등 구미의 외교사절과도 접촉해 세계대세와 국제관계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한편,

병사·재무·흥산 등의 개화상황을 시찰하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이에 김옥균·서광범 등과 의논한 후에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 신학문을 배우게 해 인재를 양성하고,

조선의 근대화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차관교섭을 추진하며,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원을 받아 신문을 발행할 것을 계획했다.

1882년11월, 다른 동지들은 남겨두고 홀로 귀국했다.

그가 없는 동안 정부는 친청사대의 민씨일족이 장악하고 있었고,

1882년12월,박영효는 대신직에서 제외되어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다.

한성부에 치도·경순·박문의 3국을 신설하고 도로의 확장과 정비, 색깔있는 옷의 장려 등

몇 가지 개혁을 시도했으나 민태호·김병시 등 수구파들의 반대에 부딪혀 신설 3국은 폐지되었고,

1883년3월, 광주유수 겸 수어사로 좌천되었다.

이에 수어영에 연병대를 신설하고 일본식 훈련을 시작했으나

1883년12월, 다시 유수직마저 사임했다.

한편 박영효가 후쿠자와의 지원으로 발행할 것을 계획했던 신문 '한성순보'는 10월 1일자로 창간되었다.

                

당시 개화파는 대청 문제와 개화의 방략을 둘러싸고 온건과 급진으로 나뉘어 있었다.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는 정권에서 소외되면서 자신들이 양성한 군대마저 민씨정권에 접수당하게 되었다.

특히 급진개화파는 국가재정난의 타개 방식을 둘러싼 민씨정권과의 대립과정에서

결정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즉 당오전 등의 악화 주조를 반대하고

울릉도와 제주도의 어채권을 담보로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올 것을 주장한

이들의 시도가 일본의 거부로 좌절되어 급진개화파의 입지가 축소되었다.

이에 박영효 등은 정변을 통한 정권장악으로 근대화를 추진하기로 하고,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원칙하에 정한론의 분위기가 팽배한 일본을 이용해

민씨정권과 청군을 타도할 방침을 세웠다.

때마침 일본도 1882년 이래의 청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고 조선에 대한 지배를 확보할 계획 아래

다케조에 신이치로 일본공사를 통해 지원을 약속했다.

또한 조선에 주둔한 청군은 베트남을 둘러싼 청·프 전쟁의 여파로 일부 철수한 상태였다.

 

1884년(고종 21) 12월4일 박영효 등은

우정국 낙성식에서 개화파 군사력과 일본군을 동원해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했다.

정변 후 박영효는 새 내각의 전후영사 겸 우포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일본군의 무기력과 배신행위, 민씨정권이 끌어들인 청군에 의해

삼일천하로 끝나자 박영효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망명생활중 이름을 야마자키로 고쳤으며,

1888년 메이지 학원의 영어과를 졸업하고 요코하마에 있는 미국교회에서 동·서양의 서적들을 두루 읽었다.

1888년(고종 25) 초 국정 전반에 걸친 장문의 개혁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이른바 '건백서'(建白書)라 불리는 것으로 봉건적 신분제도의 철폐,

근대적 법치국가의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하고 있다.

1892년 박영효를 암살하기 위해

본국으로부터 이일직·권동수·권재수 등이 자객으로 파견되었으나 미수에 그쳤다.

1893년 후쿠자와 등 일본 유력 인사들의 협조를 얻어 교포학생 교육을 목표로 도쿄에 신린의숙을 설립했다.

1894년 갑오 농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텐진 조약을 구실로 청군과 함께 조선에 들러와 농민군을 진압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의 세력을 축출하고 친일적 성격이 강한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이러한 정국 속에서 일제의 도움으로 귀국한 박영효는

1894년12월, 제2차 김홍집 내각의 내무대신에 임명되었는데,

이를 김홍집과 박영효의 연립내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김홍집과 심한 갈등을 계속하다가 김홍집을 실각시킨 뒤 자신이 총리대신서리가 되었다.

곧이어 개각에서 실권을 장악한 뒤 약 200여 일 동안 을미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행정·군사·교육 면에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하여 나라의 자주성을 강조하고,

일본식보다도 오히려 구미식의 채택을 주장했다.

이무렵 삼국간섭으로 일본세력이 퇴조하자 조선정부는 친러시아 정책을 폈다.

불안을 느낀 박영효는 왕실과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훈련대로 하여금 왕실을 호위하게 했으나 고종에 의해 거절되고,

1895년7월, 왕비시해 음모죄로 궁지에 몰리자

신응희·이규완·우범선 등 일행 20여 명과 함께 일본으로 2차 망명의 길을 떠났다.

1898년12월16일, 중추원 회의에서 박영효를 정부요직에 등용하자는 건의가 나왔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반대파는 박영효 대통령설을 유포시켜

그의 정계복귀를 위해 노력하던 독립협회 마저 해산시켰다.

1900년(광무7)7월, 고베에서 이승린·이조현·김창한 등을 불러모으고

망명중인 동지를 규합해 정부를 전복하고 의화군 강을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다.

그리고 한규설과 윤석준에게 자금 조달을 부탁할 목적으로

그해 11월 극비리에 이승린과 이조현을 조선에 파견 했지만 발각되어 그의 정계 복귀 공작은 수포로 돌아가고,

궐석 재판에서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1907년6월 초순, 비공식으로 귀국해 부산에 머무르고 있다가

1907년6월7일, 서울로 올라가 궁내부 고문 가토와 접촉하고

1907년6월13일, 고종의 특사 조칙을 받았다.

1907년7월, 궁내부대신으로 임명되었고,

헤이그 밀사사건 후에 벌어진 통감 이토 히로부미(이등방문)와

이완용 내각의 고종 양위 압력을 무마시키려다 실패했다.

순종 즉위(1907년) 후, 군부 내의 반양위파와 공모해

고종의 양위에 찬성한 정부대신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보안법 위반의 죄목으로 제주도에 1년가 유배되었다.

유배 후 상경이 금지되어 마산에 머물러 있다가 한일 합병을 맞았다.

1910년, 일제의 회유책에 의해 후작의 작위를 받았고,
1911년에는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사람으로 조직된 조선귀족회 회장,
1918년에는 조선은행 이사를 역임했다.

 

1919년3월1일, 3·1운동 뒤 일제의 문화통치에 따라 유민회·동광회·조선구락부·민우회 등

친일단체와 관계를 맺었다.

1920년 '동아일보'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초대 사장에 취임했다.

1921년 중추원고문,

1926년 중추원부의장,

1932년 일본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9월 21일 후작·중추원부의장직에 재직중 죽었다.

저서로 '사화기략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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