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운동 (기미 독립운동)                  2019.10.28.월요일,맑음

동경의 기독교 청년회관(일본한국YMCA)에 모여든 조선 재일 유학생 400-600여 명 앞에서

최팔용이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하고 이광수가 기초한 2·8독립선언서를 백관수가 낭독했다.

참여한 사람은 장영규,최팔용,윤창석,김철수,백관수,서춘,김도연,송계백,정공균,변희용,강종섭,이정훈,

이봉수,김승민 등이다.

이들은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하였고,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며 민족의 궐기를 촉구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가도로 나선 학생들은 최팔용의 사회아래 대회선언과 결의를 열광 속에 가격하고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방향을 논의할 때 일본 경찰들이 들어닥쳐 해산을 명하였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이를 거부하여 큰 소란이 일어났다.

이들은 일경과 몸싸움을 벌이다 강제 해산되고 사회자 최팔용 외에 약 60명이 검거되었고, 8명의 학생들이 기소되었다.그러나 학생들은 굴복하지 않고 2월 12일 오전에 50여 명의 조선인 학생들이 청년회관에서

독립운동을 협의하다가 검거되었다.

이렇게 2월 한 달 내내 조선인 학생들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이광수에 의하여 조선과 해외에 보도되었으며,

이 사건은 다음 달 3월 1일 서울에서 이루어진 3.1운동 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


1919년3월1일에 발생한 3·1 운동(기미 독립운동)은 조선인들이 일제에 항거하여,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 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사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을 계기로 고종의 장례일인 1919.3.1에

맞추어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 운동이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민족 대표 33인으로 부르며, 그밖에 만세 성명서에 직접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직,간접적으로 만세 운동의 개최를 위해 준비한 이들까지 합쳐서 보통 민족 대표 48인으로도 부른다.

이들은 모두 만세 운동이 실패한 후 구속되거나 재판정에 서게 된다.

약 3개월 가량의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조선 총독부는 강경하게 진압했다.

조선 총독부 집계는 집회 인수가 106 만여 명이고,사망자가 7,509명,구속된 자가 4만7천여 명이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1919년4월11일,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제헌 헌법에서는 3·1 운동을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으로 삼아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한편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에 의한 강경책을 펴던 조선 총독부는 민족 분열책인 일명 문화 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되었다.


1910년 일제가 국권을 강탈한 후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무단 통치를 실시했다.

한민족은 무단 통치하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당하였다.

또한 회사령의 실시로 민족 자본가의 발전을 가로막고,

1910년부터 1918년사이에 진행된 토지 조사 사업으로 불법적인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가 인정되었고

지주의 권리가 강화되면서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거세졌다.

이러한 거족적인 민족 해방 의지를 바탕으로 1910년대에는 국외에서의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 국내에서의 비밀결사 운동, 교육 문화 운동 및 생존권 수호 투쟁 등을 통해 운동 역량이 강화되어 갔다.

이와 함께 1910년대 말 국제 정세가 크게 변화되었다.

1918년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식민지 약소민족을 크게 고무하여 민족 해방 운동을 고양시켰다.

손병희·최린 등 천도교계,이승훈 등 기독교계,한용운 등 불교계가 독립 선언을 계획하여 독립선언서,

파리 강화 회의 등에 보내는 독립 청원서, 일본 정부에 보내는 독립 의견서 등이 작성되었고,

2월 27일 독립 선언서가 인쇄되어 종교 교단을 중심으로 미리 배포되었다.

그 후 고종의 장례일인 3월1일 정오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독립 선언식이 이루어짐으로써,전국적인 민족 해방 운동이 전개되었다.


1919년3월23일부터 28일까지 구로 인근 지역에서 전개된 만세 운동은 부천군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19년3월23일,이보경·이무경·최선택·이창범·이재경·이상태·최개성 등의 주동으로 문학면 관교리에서

횃불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조명원이 조종서·최봉학·문무현 등과 협의하여 혈성단을 조직하였다.

태극기와 격문 80매를 제작하여 남북리·거잠리·을왕리·덕교리 주민에게 격문을 배포하고 150명의 주민들과 함께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한민족은 국내외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거족적인 만세 운동을 펼쳤다.

이에 계양 주민들도 1919년3월24일 오후 2시경, 오류리의 심혁성의 주도하에 장기리 황어 장터 장날을

이용하여 6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 독립 만세’를 힘껏 외쳤다.

황어 장터의 만세 운동은 인천 지역에서 전개된 가장 큰 규모의 만세 운동이었으므로 일제는 심혁성을 체포하는 한편 이의 진압에 적극 나섰다.

장기리의 임성춘 등 주민 600여 명은 만세 운동과 더불어 체포되어 가는 심혁성의 탈환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부내 경찰관 주재소 일본 경찰은 칼을 휘둘러 선봉에 섰던 선주리의 이은선을 즉사케 하고 윤해영에게 부상을 입히는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이은선의 피살 소식이 전해지자 이담·최성옥·전원순·이공우 등 천도교인,기독교인,일반 농민 등이 주축이

되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한편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였다.

격분한 계양 주민 100여 명은 우선 선주리에 있는 면사무소 서기 이경응이 친일적인 혐의가 있다고 보아

그의 집으로 달려가 집을 부수어 민족 정기가 살아 있음을 보여 주고자 하였으며 주민들을 억압 탄압하던

면사무소를 파괴하여 친일 기관을 응징하였다.

3월28일에는 150여 명의 주민들이 오류리에서 만세 시위 운동을 벌였고,

3월31일에는 남동면 서창리에서 송성용·송윤중·오창조·김춘근·윤영택·박중일이 주축이 되어

4월 1일 질천 시장에서 만세 시위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폐하였다.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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