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씨 개명     20169.10.31.목요일,맑음

1931년9월18일,만주 침략 이후부터 일제는 군 병력을 증가시켜 한국에 대한 탄압 무력을 강화한 다음,

한국 민족 말살 정책의 하나로 한국어를 말살시키는 것이 한국 민족 말살의 모체라고 판단하고,

한국어 말살에 강화하였다.


일제는 관청에서는 한국 농민의 민원도 일본어를 사용할 경우에만 접수하도록 하였고,

사립 학교에서의 한국어 교육과 한국어 사용을 엄금하였다.

또한 1935년 부터는 한국 문자를 농민들에게 가르치는 계몽 운동을 총독부령으로 엄금하고,

1937년,중국 침략 때 부터는 한국인들의 일상 생활에서 조차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여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명령하였다.심지어 국민학교 학생들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경우 매질과 벌칙을 과하였다.

그리고 한국어로 간행되는 신문과 잡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간 등 탄압을 가하다가,

1936년에는 '신동아'를 폐간시켰으며,

또한,한국인의 성명을 말살하고 일본식 이름을 짓도록 하는 이른바 ‘창씨 개명’을 1937년부터 본격적으로 강행하였다.

1940년에는 '동아일보''조선일보' 등 모든 한국어 신문들을 폐간 시켰으며,

1938년,한해에만도 전국에 3,660여개의 일본어 강습소를 만들어 한국 농민들에게 강제로 일본어를 배우게

   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였다.

   일제의 한국어 말살과 일본어 전용정책이 한국인들의 저항으로 진전되지 않자 그 씨를 없애야 한다며

1939년에는 '조선민사령'을 개정하여 전한국인에게 강요하는 파쇼적 방법으로,

일제는 1940년까지 한국인의 성명 말살과 ‘창씨개명’을 강행하였다.

일제는 ‘창씨개명’에 응하지 않은 한국인에 대해서는 자녀의 학교 취학을 못하게 하고, 학생들에게 매질을 가하였으며, 직장에서 채용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심지어 우편물 수송까지 금지시켰으며,경찰관 주재소로 호출하여 응할 때까지 무기한 구류해 두고 박해를 가하였으므로  불응하고는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없었다. 

1941년에는 '문장''인문평론' 등 모든 한국어 잡지들을 폐간 시켜 버렸으며,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회원과 학자들까지 체포,투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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