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 강점기-6 2019.11.03.일요일,맑음
일제 강점기인 1931년5월 신간회가 해체된 아픔을 겪은 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의 급속한 강행 속에서도 1931년에 조선어 연구회가 조선 어학회로 발전하여 민족어와 민족문자를 보존 발전시키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그 결실로 '한글맞춤법통일안'·'표준말모음' 등이 나왔다.
'우리말본'·'한글철자법일람표'·'우리말사전'' 등도 이때 나왔다.
문학·예술분야에서도 민족적 작품들이 나와서 국민들에게 애독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한국어 잡지들도 정간과 폐간을 되풀이 당하면서도 민족과 민족문화의 보존 발전을 위하여 문화투쟁을 전개하였다. 동아일보·조선일보·조선중앙일보 등 언론 기관과 잡지들은 신채호 등의 민족주의사학을 국민들에게 교육하여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에 대항해서 투쟁하였다.
민족 언론기관과 청년 학생들은 한글 보급과 함께 민중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민중 속으로!’
라는 구호를 내걸고, 1931년부터 브나로드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경성 제국대학 학생들의 반제 동맹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단체들이 조직되어 완강하게 항일투쟁이 전개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1937년까지는 소작쟁의와 노동운동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시기의 소작쟁의와 농민운동은 물론이요 노동쟁의와 노동운동은 비단 농민·노동자층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1차로 일제의 식민지수탈의 강화에 대항하고 투쟁하여 민족운동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1940년대에 들어와서 일제의 폭압이 극악하여 표면상 모든 민족운동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던 시기에도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무수한 지하 서클들이 조직되어 완강하게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국외에서는 일제가 1931년 만주침략을 자행하여 만주 괴뢰국을 세우고, 전만주를 장악하였음에도
한국민족은 굴복하지 않고 독립군의 무장 투쟁을 완강하게 전개하였다.
남만주의 국민부는 800명의 조선혁명군을 편성하여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서 한중 연합군을 조직하고,
조선 혁명군의 양세봉이 총사령이 되어 1932년에 일본군을 신빈에서 대파하였다.
조선 혁명군은 1933년 흥경현의 일만 연합군을 공격하여 흥경성을 점령하였다.
한편, 북만주에서는 이청천이 지휘하는 한국독립당독립군이 1931년에 중국 호로군과 길림 자위군의
연합군과 연합하여 한중항일연합군(중한연군)을 조직하였다.
1932년5월초 한국 독립군은 길림자위연합군 제3군과 엽합하여 길림자위군중로연합군 제3군 독립영으로 편제되어 연합 작전을 수행하였다.
한중항일연합군은 1932년 9월에 쌍성보에서 일본군 1개중대를 섬멸하였였다.
이후 11월 2차 쌍성보 전투를 벌였고 전투기 폭격을 받는 등 악전고투 끝에 철수하였다.
한국 독립군은 한국독립당의 결정에 따라 동만주로 이동하였고 그곳에서 중국의용군 길림구국군과 연합
하였다.
1933년 1월 한국 독립군은 길림구국군 제14사 부대와 연합하여 중한연합토일군을 조직하였다. 또 참모장 신숙과 참모 김상덕을 난징 국민 정부에 파견하여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1933년 2월에는 경박호에서 2,000명의 일만연합군을 격파하였다.
4월에 사도하자에서 일만 연합군 1개사단을 격파하였으며, 6월초 동경성 전투에 승리하여 동경성을 점령하였고 같은 달 30일 개전한 대전자령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이후 전략의 차이로 갈등을 겪기도 했으나, 연합은 유지되었다.
한중 연합에 따라 홍진, 지청천, 조경한, 오광선, 공진원, 김창환 등 독립군 간부 및 사병 40여명은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훈련반에 입교하여 체계적 교육을 받았다.
한국독립군부대들은 1941년까지 중국군과 연합하여 만주에서 용감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에는 의열투쟁도 강화되었다.
큰 사건만을 들어도 1932년 1월 이봉창의 일본천황 투탄,
1932년4월 윤봉길의 상해 훙커우공원 투탄,
1933년3월 백정기의 재중국 일본공사 투탄,
1934년3월 강명학의 상해 훙커우 공원투탄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다수의 의열 투쟁이 있었다.
1938년에는 김원봉이 조선 의용대를 결성하여 중국 본토에서 항일 전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20년대에 한때 침체되었으나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투탄 사건을 계기로 항일 전선을 정비하고,
임시정부의 독립군으로서 1940년 9월에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도 임시정부와 연합하여 광복군 제1지대가 되었다.
이범석의 제2지대와 김학규의 제3지대가 편성되어 임시정부의 광복군은 이청천을 사령관으로, 김원봉을
부사령관으로 하여 3개지대가 주력이 되었다.
김구를 주석으로 한 임시정부는 또한 일본의 패망을 전망하고 건국을 준비하여
1941년11월,'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광복군이 국내진입작전을 감행하여 연합군과 함께 조국을 광복한 뒤 신국가를 수립하는 기본원칙을 공표한 것이었다.
1941년12월8일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도발하자 임시 정부는
12월9일 대일 선전 포고를 하고 뒤이어 대독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
광복군은 중국의 각 전선에 투입되어 일본군에 대한 심리작전에 큰 성과를 올렸고,
이를 알게 된 영국군이 광복군의 인도·버마전선 투입을 요청하게 되어
1943년6월에 한영 군사 협정이 체결되고, 광복군 공작대가 인도·버마전선에 파견되어 버마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또한, 광복군과 미국군과의 합동작전이 계획되어 미군 전략정보처(OSS)의 특수훈련이 실시되었다.
광복군은 1945년4월 낙하산 투하와 유격전 훈련을 받고 국내투입이 준비되었으나,
일본이 예측보다 빨리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광복군의 국내 투입은 실현되지 않았다.
한편, 중국 연안에서는 조선 독립 동맹이 1942년 7월에 조선의용군을 편성하고 중국 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전쟁에 참가하였다.
미주지역에서도 1942년에 한인 국방경비대(맹호군)가 편성되어 100명의 한인 청년들이 국내 투입의 특수훈련을 받다가 일본의 항복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1944년 8월에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여 비밀 결사로서 '건국 동맹'이 조직되어 건국을 준비했다.
'건국 동맹'은 임시정부와 조선 독립 동맹과 비밀 연락을 시도하면서 조직을 확대하여,
1945년 8월에는 국내의 건국을 준비하는 강력한 단체가 되었다.
한국 민족은 이와 같이 1940년대에도 불굴의 투지로 민족의 광복과 독립을 위한 투쟁과 더불어 준비를 전개하면서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을 맞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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