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스크바 3상 회의                 2019.11.14.토요일,맑음

모스크바 3상 회의(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는

1945년12월16일부터 26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영국,소련의 외무장관 회의며,

   임시정부 수립을 선결 과제로 제시하였지만,

   미국이 제시한 신탁 통치 제안도 받아들인 일종의 절충안이었다.

1945년12월27일, 미국과 소련은 첨예한 대립을 보였으나  3국 외무장관은 4개조로 구성된 합의문을 작성

   발표하였다.

     (1)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 수립,

     (2) 정부 수립을 위한 남조선 미합중국 사령부,북조선 소련 사령부의 대표자들로 구성 공동 위원회 설치,

     (3) 공동 위원회는 최고 5년 기간의 신탁 통치안,

     (4) 남,북 조선과 관련된 행정 조치의 구체화를 위해 2주 내 미국과 소련 사령부 대표 회의 소집 등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는 좌익과 우익의 극심한 분열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 통치가 합의 되었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진 1945년12월28일 부터

처음에는 좌,우파가 강력한 반탁 의사를 표명했다.

 

1945년12월28일,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미.소 양국은 한국의 독립 정부 수립을 위해 

    '미.소 공동 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합의 되었다. 

1946년1월16일에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한국의 신탁 통치'와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제반 문제 해결을

   위하여 예비 회담을 가진 후, 1946년3월20일,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 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1945년12월30일, 임시정부가 주도하여 결성한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에

   공산당 당수 박헌영은 중앙위원이 되었고,이튿날인 31일, 상무위원에 선정되었다.

1946년1월1일,하지 장군이 박헌영을 만났을때는 강경한 반탁 입장이었으나

1946.1월3일,다시 만났을 때는 입장이 정반대로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

1946년1월2일, 공산당 중앙 위원회가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 사항을 지지(찬탁)하기로 결정했는데,

   신탁통치에 대한 책임 비서 박헌영의 입장은 1월 2일에 정반대로 바뀐 것이다.

   지난 연말까지도 반탁을 강력히 표명하던 여러 좌파 단체들도 1월 2일을 기점으로 찬탁으로 바뀌었는데,

   미군정도 이러한 일에는 소련의 의사가 작용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1946년1월3일에 예고 되었던 좌익들의 반탁 집회는 집회 당일날 지도부에 의해 찬탁 집회로 돌변하여

   진행되어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우익 진영의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 세력은 반탁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실제로 처음부터 신탁 통치안을 제시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좌익은 처음엔 미온적이었으나,나중에 소련측의 요구에 의해 모스크바 회의의 내용의 전문이 공개된 후,  

   회의의 결과를 받아들인다는 입장에 섰고,우익은 즉각적으로 반탁 운동을 전개하였다.

   좌익 계열은 임시 정부 건설 원칙에 강조를 했었으며,

   우익 계열은 신탁 통치 반대에 강조하면서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북한정권 수립 후 문화 선전성 제1부상(차관)을 지낸 소련파  장상진은

해방후 북한 정권 수립 이후 

"북한은 해방 후 20년 역사를 위조했다"며

"일본군을 내몬 뒤 소련 정부에서 북한 정권 수립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해방 후 원산항에 귀국하는 김일성을 맞으러 간 것도 장상진이었다.

소련은 고려인을 통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1945년부터 1965년까지 북한에서 발표된 모든 연설문은 다 소련에서 작성됐어요."라고 폭로했다.

2010년에는 1945년12월29일,소련군 중좌 페드로프가 소련군 진주 후 북한의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등

3개도를 방문 조사한 뒤 만든  보고서에서 

258 소총 사단장인 '드미트리예프 대좌'는 “조선사람은 35년간 노예로 있었다. 좀 더 노예로 있게 하자”는 말도 남겼다고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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