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홍                2019.11.15.일요일,맑음

안재홍(생졸; 1891년,고종28년-1965년3월1일)은

아버지 안윤섭과 어머니는 남양 홍씨 사이에서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시절 시대일보 이사와 조선일보 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

했고 고대사 연구에 몰두하여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애썼다.

또한 그는 신민족주의론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1907년,

단발을 하고 상경하여 황성 기독교청년회 중학부에 들어갔을때 이상재,남궁 억,윤치호 등과 교분을 가졌다.

1910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조선인기독교청년회'에 관여하여 '조선인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면서

1911년부터 1914년까지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1915년,

귀국하여 주로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1916년,

상해로 망명하여 이회영,신채호 등이 조직한 동제사에서 활약하다 귀국하여 1917년까지

중앙고등보통학교 교감직을 역임하고 조선 중앙기독교청년회 교육부 간사를 지냈다.

1919년,

동경유학생회에서 항일운동에 참여하고 비밀결사조직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연통부 역할을 수행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3년,

'시대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이사와 논설위원을 지내고,

1924년,

'조선일보' 주필을 거쳐 부사장(1929∼1931)·사장(1931∼1932)을 역임하여 10년 동안

언론인 생활을 하였으며 조선기자대회 부의장과 조선사정연구회·태평양문제연구회에 참여하였다.

1927년,

신간회 총무 간사로 활약하다가 잡혀 8개월 동안 투옥되었고 재만주동포옹호동맹 위원장,

1929년,

생활 개선운동,귀향 학생문자 보급운동을 벌이면서 광주 학생사건 진상보고를 위한 민중

대회를 주관하였다.

1936년,

임시 정부와의 긴밀한 활동이 탄로나 2년 동안 복역하였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2년 동안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37년부터 1944년까지,

평택군 향리의 도릉산방에서 우리나라 상고사와 조선 철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이는 일본학자들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연구였으며,

1945년4월,

일본의 패망을 눈앞에 두고 여운형이 일본과 조국의 치안권 인수문제에 관한 접촉이 이루어질 때 그 대안으로 민족 대회의 결의를 받자는 주장을 폈다.

1945년,8·15광복과 동시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공산주의자들에게 좌우되자 9월에 독자적으로 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그 뒤 한국독립당 중앙위원·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1945년10월23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1946년,

한성 일보사 창립 사장·비상 국민회의 의원·민주 의원 의원·좌우 합작 위원회 의원으로 활약 1947년,

과도 입법의원 의원,미군정청 민정장관이 되어 한인 체계에 의한 행정 기반을 굳혔다.

1948년,

정부수립 후 평택군에서 무소속으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50년 9월21일,

납북되어 1965년 3월1일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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