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2019.12.20.금요일,흐림

대통령 박정희(생졸; 1917년11월14일-1979년10월26일)는

경북 구미 출신자로 빈농인 부 박성빈과 모 백남의 사이에서 5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가족으로 배우자인 육영수,딸 박근혜,박근형과 막내인 아들 박지만이 있다.

그는 5.16군사 정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제5·6·7·8·9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관련사건으로 4·19혁명,2·27선언,6·3사태 등이 있다.


1937년,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문경 소학교에서 3년간 교직 생활을 한 다음,

1940년,

만주의 신경 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함으로써 군문에 들어갔다.

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하여 혈서를 썼으며,일본인으로서 개와 말의 충성을 다하겠다고

지원서에 썼다.이 일은 크게 회자되어 '만주신문(1939.3.31자)에 실렸다.

이 군관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수료한 뒤

1944년,

일본 육군 사관학교로 전학, 졸업과 함께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관동군에 배치되었다.

1945년8월15일,

광복 때까지 만주와 화북지방에서 일본군 장교로 전쟁에 가담했다가,

1946년,

귀국하여 육군 사관학교에 들어가 제2기로 졸업하고 육군 대위로 임관되었다.

1949년,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던 시절 사상 관련 사건에 연루되어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다.

당시의 신문보도에 의하면 여순 반란사건 관련 공산주의 혐의자로 되어 있는데,

군법회의에서 무기 징역을 언도 받았으나 육군 본부의 동료,상사들의 구명 운동으로 복역은 면제되었다.이 때문에 한때 군인의 신분을 박탈 당하였다가 6·25전쟁이 일어난 뒤 현역으로 복직되었다.

1950년,

6·25 전쟁 동안 주로 육군 본부 정보국에서 근무하다 1953년 장군이 되었다.

1950년,

육영수와 결혼하였다.

1954년,

제2군단 포병 사령관,

1955년,

제1군 참모장,

1960년,

육군 군수기지사령관,제1관구 사령관,육군본부작전 참모부장을 거쳐,

1961년5월16일,

제2군 부사령관으로 재직 중 군부 쿠데타를 주도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18년5개월간을 집권하였는데,

그의 통치 시대는 3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4·19혁명으로 성립된 민주당 정부를 무능,부패 정부로 규정하고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와 그를 따르는 장교들은 쿠데타 성공 후 곧바로 계엄령을 선포,삼권을 장악

  하였고,혁명 주체세력은 '국가재건 최고회의'를 설치하여 입법,행정권과 사법권의 일부를

  행사했다.의장은 박정희였다.

  이로부터 2년7개월간 군정이 실시되는데,박정희는 구질서의 전면적인 개혁이라는 목표

  아래 모든 정당,사회단체의 해체를 포고하고,용공분자와 폭력배의 검거에 착수하였다.

2.군사정부는 '농어촌고리채정리령'을 발표하였으며 부정 축재자에 대한 조사를실 시하였다.

   사회 기풍을 바로잡기 위해 댄스홀,고급 요정 등 모든 환락가의 문을 폐쇄하게 하였으며,

   비밀 댄스홀에서 춤을 즐기던 남녀를 군사 재판에 회부하여 최고 1년6월의 징역을 선고

   하기도 하였다.

   군정 초기에 얼마나 철저한 구악 일소작업과 강력 정치가 진행되었던가를 짐작케 된다.

  

3.군사 정부는 '국민 운동본부'를 설치하여 생활 간소화,가족 계획,문맹 퇴치 사업을 벌이는

   동시에 친선 방문 외교,초청 외교 등 적극 외교의 자세를 보였다.

   획기적인 경제 조치의 하나로 단행된 통화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4.군정 초기 집권세력 내부에 주류파와 비주류파 사이에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져  반혁명

   사건이 꼬리를 이었다.

   이 과정에서 비주류파는 제거되고 박정희 중심의 주류 세력이 실권파로 정권 장악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군정 후반은 민정 이양을 둘러싼 공방으로 전국이 소란하였다.

   박정희는 처음에는 2년 후에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겠다는 민정 이양 일정을 발표하였으나

   1963년1월부터 시작된 정치 활동 재개 이후 야당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서는 이른바

   ‘2·27선언’을 통하여 자신의 원대 복귀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4·8조치’로 군정 연장을 계획하였다가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철회하는 등 번의를

    거듭하였다.

    그 사이 군정은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으로 ‘구악을 뺨치는 신악’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하였다.

5.박정희는 1963년의 대통령선 거에서 야당의 단일 후보인 윤보선을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당선됨으로써 제3공화국의 통치권자가 되었다.

   박정희 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한 작업은 경제발전과 한,일국교 정상화였다.

   이미 군정 기간인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추진하였다.

   제1차 5개년 계획은 후진국 가운데 가장 높은 성장률인 연평균 7.1%를 책정하였으나.

   계획 자체의 졸속과 자본 부족으로 제1차 5개년계획은 전반적으로 실적 미달이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자본 확보와 미국의 압력이라는 복합적인 이유로 추진되었다.

   박정희는 집권하자마자 대일 협상에 강한 의욕을 보였으며,군정 기간인 1961년10월에

   일본 동경에서 제1차 한.일 회의가 열렸다.

   박정희는 국가 원수로 최초로 일본 수상과 회담하는 등 한.일 문제 타결에 열의를 보였다.

   이같은 대일 자세는 ‘친일 외교’·‘흑막 외교’라는 비난을 받았다.

   한국 어민의 생명선이라 할 수 있는 어업 및 평화선 문제와 이른바 ‘김.오히라메모’로

   결정된 6억 달러의 대일 청구권 자금은 여론의 강력한 반대를 받았다.

   한.일 문제를 둘러싼 여야와 정부·국민간의 공방은 ‘6·3사태’ 등 한때 정국의 위기까지

   불러 일으켰으나 결국 1965년6월22일, 한일 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에 따른 일본으로부터의 자금 도입과 기타 차관 등을 통하여 제3공화국

   후반부터는 급속도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박정희는 고성장.수출 드라이브·산업 기지 건설 등을 통하여 국정에 자신감을 가졌으며,

   점차 독재 성향을 띠어가기 시작하였다.

   한일 회담 타결,월남 파병 등으로 미국으로부터도 신임을 얻은 박정희는 강한 권력욕을

   드러냈는데, 그 결과는 1968년 3선 개헌으로 나타났다.

6.1972년10월,

   박정희는 헌법 효력의 일부 정지,국회해산,정당 활동 금지의 담화를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정부는 통일 주체 국민회의를 통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

   헌법’을 제정,국민 투표를 거쳐 확정한 후 이 헌법에 따라 제8대 대통령에 박정희를 선출

   하였다.이로써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유신체제는 사실상 박정희의 영구 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체제였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을 막강한 것으로 보장 해 줌으로써 박정희에게 독재 체제의

   길을 열어주었다.

   유신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주장이 야당과 재야 세력에서 광범위하게 대두하였으나,

   박정희는 이를 ‘대통령 긴급조치’로써 탄압하였다.

   유신 체제 7년간 수많은 정치인,종교인,지식인,학생들이 긴급 조치에 걸려 투옥당하였다.

   독재적인 통치에 의해 박정희 정부는 이 기간 기록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연간 10%를 넘나드는 고도 성장이었고 국민 소득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7.박정희는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한 남북 대화에 힘써 한동안 남북 적십자회담,남북조절

   위원회회담 등을 열었고,남북간 밀사 교환을 이루었으나 대화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박정희는 1979년 유신 체제에 항거하는 ‘부마사태’가 절정을 이루던 때인

1979년10월26일,

궁정동 만찬 석상에서 측근인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하였다.

그와 함께 유신체제도 끝났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