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2.사태                        2019.12.27.금요일,맑음

1979년12월12일,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 세력이 일으킨 군사

반란사건으로,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육군 참모총장이자 계엄 사령관인 정승화를 연행하고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최규하를 협박하여 사후 승인을 받음으로서 12.12 사태는 승인되었다.



10.26 사건이 일어나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된 뒤 합동 수사본 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 참모총장이자 계엄 사령관인 정승화 간에는 사건 수사와 군인사 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 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

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한 후 12월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사전 접촉하였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

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 연행 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2월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 경비사령부 33헌병대 병력 50명은

한남동 육군 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압한 후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였다.

한편, 총장의 연행에 저항 할지도 모르는 특전 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초대되었다.


연회 도중 총장의 연행 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장태완 등의 육군 장성들이 대응 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 지휘부를 무력화 시킨 후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 진전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 연행 재가를 요청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신군부 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 연행을 재가하게 설득하였다.

결국 최규하는 12월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 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 사건의 주도 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12·12사태는 집권 세력에 의하여 정당화되었으나,

그후 김영삼 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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