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수교 수립             작성일자; 2019.12.27.금요일,맑음

 

 

1992년8월24일,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 협정으로

1988년7월7일,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 선언'에서

남북한 관계 개선과 사회주의권과의 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바 있으며, 한중 수교는 그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한중수교의 국제적 배경은 1989년12월, 미.소 몰타 정상회의에서 냉전 종식을 선언했고,

1989년5월,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으로 중.소 관계가 정상화되었으며,

1990년9월, 한소 수교가 수립된 것 등이 한중 수교의 디딤돌이 되었다.

 

중국인민공화국의 건설과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으로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

양국간의 교류를 새롭게 개시하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한중수교 과정을 보면,

1991년, 한국과 중국은 무역대표부를 설치해 영사 기능을 일부 수행하며 새로운 교류를 시작했다.

1991년9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이후

1991년, 1,2차 한중 외무장관 회담이 개최 되었고 ,

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남북한 관계 개선의 추이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1991년12월, 제5차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남북한 기본 합의서를 채택하고,

비핵화 공동 선언을 채택함으로 남북관계는 상당히 개선 되었다.

그 이후 1992년 4월에 한국과 중국의 수교 협상이 개시되었다.

 

1992년8월24일,협상 결실로 한국 이상옥 외무장관과 중국 대표 첸지천 외교부장은

북경 영빈관에서 한.중 선린 우호 협력 관계에 합의했는데,

 

내용은

상호불가침,상호 내정 불간섭,중국의 유일 합법 정부로 중화인민공화국 승인,

한반도 통일 문제의 자주적 해결 원칙 등으로

6개항의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간의 외교관계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을 교환했다.

하지만, 한중 수교의 후속 조치로 중국이 요구한 한국과 대만의 단교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중간 국교 수립 이후 한중 교류는 여러 분야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교역 규모는 1992년 63억8천만 달러에서 2012년 2206억2000만 달러로 35배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며,

사회적,문화적 교류도 급격히 증가하여 중국에서도 ‘한류 열풍’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한.미 동맹 관계로 인해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 때문에 한중 관계는 불안정한 전략적 동반자 관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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