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 제4대 세종 이야기 2009.12.21.월요일,맑음
세종;생졸; 1397~1450.54세
재위기간; 1418~1450.32년
능; 영릉
영릉은 조선 왕릉 중에서도 천하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영릉 덕분에 조선 왕조의 국운이 100년은 더 연장되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다.
제4대 세종과 소헌왕후(1395~1446.52세) 심 씨의 합장릉이다.
가계도;
부; 제3대 태종
모; 원경왕후 민씨
왕후; 소현왕후 심씨
제5대 문종
수양대군;제7대 세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전소공주
정의공주; 신미 대사와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가한 공주
연빈 강씨; 화의군
신빈 김씨; 계양군-부인(인수대비 둘째 언니),의창군,밀성군,익현군,영해군,담양군
혜빈 양씨; 한남군,수춘군,영풍군
숙빈 이씨; 정한옹주상침 송씨; 정현옹주
태종의 셋째 아들이며,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며,비는 심온의 딸 소헌왕후이다.
1408년 태종 8년에 충녕군에 봉해지고,1412년 충녕대군에 진봉되었다.
당시 왕세자는 형인 양녕대군이 있었으나,
태종은 충녕이 왕위에 적합하다고 판단해 1418년 6월 세자로 책봉했다.
같은해 8월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재위기간 동안 유교 정치의 기틀을 확립하고,공법(貢法)을 시행하는 등 각종 제도를 정비해 조선왕조의
기반을 굳건히 했다.
또한 한글의 창제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문화의 융성에 이바지하고 과학기술을 크게 발전시키는 한편,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국토를 넓혔다.
세종은 태종이 이룩한 왕권 강화를 바탕으로 유교 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의정부의 권한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태종 때 실시된 6조직계제를 이어받아 국정을 직접 관장
했다.그 후 왕권이 안정되자 6조직계제를 폐지하고 의정부서사제를 부활했다(1436).
이는 집현전에서 성장한 많은 학자들이 의정부의 지나친 권력 행사를 견제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와 아울러 세종은 승정원의 기능을 강화해 실제적으로는 이를 통해 모든 정무를 통괄했다..
1420년 설치된 집현전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육성하는 동시에,
왕과 세자에 대한 학문적인 자문·교육과 각종 학술연구·서적편찬을 담당하는 기구였다.
성삼문·박팽년·하위지·신숙주·정인지 등 집현전을 통해 배출된 학자들은 유교 이념에 입각한 정치와 문화를 확립하는 데
주역이 되었다.
한편 세종은 태조 이래의 억불 숭유 정책을 계승해 이를 정치 이념이나 정치 제도뿐만 아니라 사회 윤리의 측면에까지
확대했으며,'효행록''삼강행실도''주자가례'를 간행,보급해 유교적인 사회질서의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유교적인 의례를 확립하기 위해 예조,의례 상정소,집현전에서 국가의 의례인 오례,사서의 관혼상제에 관한 사례 등에
대한 중국의 옛 제도를 연구하게 해 이를 정리했다.
이와 함께 1419년 사사노비의 정리를 시작으로,1424년 오교와 양종을 선교 양종으로 정비해 각각 18개의 사찰만을
인정했다.
또한 이에 소속된 7,760결(結)의 토지 외에는 모두 몰수하는 등 불교를 억압했으나 왕실에서 개인적으로
불교를 믿거나 불교 행사를 갖는 일은 가끔 있었으며,세종도 유신들의 극단적인 불교 전폐론에는 뜻을 같이 하지 않았다.
특히,말년에 두 아들과 왕비를 잇달아 잃고 자신의 건강이 크게 악화되면서,
유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불당을 짓고 불경을 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태도가 숭유 정책의 방향을 바꾼다는 뜻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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