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과 정의공주 작성일자; 2010.10.18.일요일.맑음
1443년 12월 30일, 세종대왕은 역사에 길이 빛날 걸작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세종이 어떻게 한글을 만들었으며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이 단독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쓰여 있고,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의 일들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집현전 학사들이 훈민정음을 번역하고 해설서를 만드는 등의 작업에 참여한 것도 모두 훈민정음 창제 후의 일이다.
그렇다면 세종은 정말 혼자만의 힘으로 한글을 만든 것일까?
베일에 감춰진 한글 창제의 비밀과 관련해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 있는데 바로 죽산 안씨 일가의 족보인 '죽산안씨대동보'다.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 공주는 관찰사 안망지의 아들 안맹담과 혼인했는데,
공주의 시댁인 안씨 족보에 정의 공주와 훈민정음 창제에 관한 내용이 기록된 것이다.
정의 공주와 안맹담의 묘-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63-1
'죽산안씨대동보'의 내용에 의하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던 중 변음과 토착에 문제를 느끼고 이것을 아들인 대군들에게 연구 과제로 내린다.
그런데 대군들 중 문제를 풀어내는 사람이 없자 세종은 시집간 딸 정의 공주에게 문제를 내려보냈다.
정의 공주는 금세 문제를 풀어 바쳤고 이에 세종이 크게 기뻐하며 노비 수백 구를 상으로 내렸다는 내용이다.
세종이 풀어내지 못했던 문제를 아들과 딸에게 지혜를 구해야 했던 ‘변음과 토착’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이란?
‘변음과 토착’이 무엇인가에 대해 국어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학자는 한자 자체의 뜻에 기인하여 ‘변음’을 ‘소리의 변화 원리’로 보고 ‘토착’을 ‘소리를 토하는 원리’라고 해석한다.
또 다른 학자는 ‘변음’을 정음과 반대되는 말인 사투리로,
‘토착’은 ‘단군 때의 가림토’라고 본다.
‘변음과 토착’이 어떤 문제였는지 명확하게 밝히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비롯해 그와 관련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죽산안씨대동보'에서는 정의 공주가 대군들도 풀지 못한 문제를 풀었다고 하는데,
정의 공주는 어떤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을까?
'조선왕조실록'의 졸기(拙記, 고인에 대해 약술한 기록)를 보면,과연 정의 공주가 재능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의 공주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역산’을 해득했다고 한다.
‘역산’은 ‘천문학과 수학’을 뜻하는데, 역산을 해득했다는 것은 천문학과 수학에 능했다는 말이다.
세종 역시 천문학과 수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 예로 세종은 중국에서 빌려온 것이 아닌 조선에 맞는 일월식을 계산해 새로운 역법과 ‘일성정시의’라는 시계를
만들었으며 천체의 운행과 현상을 관측할 수 있는 ‘간의’, ‘혼천의’ 등을 만들어 당대의 천문학 진흥에 힘썼다.
또한 세종은 수학에 대한 열정도 남달라서 대군들에게 수학을 공부하게 했고,
신하들을 중국으로 유학보내 선진 수학을 배워오도록 했으며,
본인도 부제학 정인지에게 고난도 수학서인'산학계몽'을 배웠다.
졸기에도 나오듯,
세종은 자신을 쏙 빼닮은 정의 공주를 아끼고 사랑했다.
실제로 세종은 정의 공주가 시집 간 후에도 궐 근처에 살도록 했고, 부마(사위)인 안맹담에게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안맹담이 술을 좋아하는 것을 염려해 세종이 친히 안맹담의 친구들을 불러
“누가 안맹담과 술을 마시는가?”라고 주의를 주기도 했다.
만약 '죽산안씨대동보'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정의 공주는 총명하고 지혜로웠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이지적인 인물로서 자신에게 애틋했던 아버지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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