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이명        2019.07.16.화요일,맑음

이이명; 노론

생졸; 1658(효종9년)~1722년(숙종)

본관; 전주(全州)

호; 소재(疎齋)

조부; 영의정 경여(敬輿)

부; 대사헌 민적(敏迪)


숙종,경종대에 노론을 주도하며 주자 도통 주의에 기반한 정치 이념을 적극 실현하고자 했으며,

서양 학술 사상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1680년(숙종6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에 기용된 후

    박사,수찬,응교,헌납,이조좌랑 등 요직을 역임했다.
1686년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승정원의 승지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송시열,김석주 등 노론 거물의 지원 아래 노론의 기수로 활동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파직,영해·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했고,

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호조 참의로 복귀한후 대사간까지 승진했으나,

1698년 기사환국 때 송시열 등과 함께 죽은 형 이사명이 정치적으로 신원되지 못하자 이를 문제 삼다가

    공주로 유배되어 이듬해 유배가 풀렸으나 기용되지 못하다가

1701년에 예조 판서로 특임 되어 이후 한성부 판윤,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1706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1708년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1717년, 노론 영수인 이이명이 숙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 문제로 깊이 관여하여 독대(獨對)라는 형식으로

숙종과 비밀리에 만나 숙종과 독대하였던 일이다.이를 정유 독대라고 한다.


이이명은 세자(장희빈의 子)의 대리청정을 건의하는데 이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켜 단점을 잡아내 폐위시키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숙종의 연로한 나이 때문에 세자폐위와 같은 극단적인 일은 발생하지 않았고 '이이명'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1721년(경종1년). 김창집,이건명,조태해와 함께 노론4대신의 한 사람으로 세제(훗날 영조)의 대리청정을

실현하려다가 실패했다.이 일로 소론의 공격을 받아 관작을 삭탈당하고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심

1722년 신임사화로 인하여 죽음을 당했다.


1740년(영조16년) 노론,소론 간의 치열한 투쟁이 노론의 승리로 결말 지어지는 경신처분 때 복관되었다.

몇 번의 북행사절을 통해 접한 서양의 발달된 문물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천주교,역산,천문,지리에 관한

저술을 국내에 소개했으며,이러한 학풍에 영향을 받아 지리,전산에도 관심을 가져 지도 및 강역사, 전산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

북학파 실학자들과 달리,

청나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정통적 화이관에 입각하여 이들 새로운 사조들을 접했던 까닭으로,

이의 수용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나 그 실용성은 인정했다.


한편 국내의 현실 문제는 수취 체제,

특히 군역의 문제가 근본적인 것이라 보고 이의 개선 방안으로 정포론(丁布論)을 제시했다.

종래의 양인을 대상으로 역을 부과하던 방식을 벗어나 양반 자제로부터 상민에 이르기까지 15~60세의

장정이면 누구나 일정액의 포(布)나 전(錢)을 부담한다는 안이었다.

저서로는 '소재집'''동국강역도설''전산촬요''강도삼충전' 등이 있다.

과천 사충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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