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 제20대 경종 이야기 2019.07.16.화요일,맑음
경종; 조선 제20대 왕,숙종의 맏아들
이름; 이윤(李昀)
생졸; 1688년(숙종14년)~1724년(경종4년)
재위기간;1720∼1724.4년간
능호; 의릉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에 있다.
가계도
부; 숙종
모; 희빈 장씨
경종; 조선왕 제20대
단의왕후 심씨; 심호(沈浩)의 딸
계비 선의왕후 어씨; 어유구(魚有龜)의 딸
세자 때부터 신변상으로나 정치상으로 갖은 수난과 곤욕을 겪은 경종은 재위 4년 동안 당쟁이 절정을 이룬 가운데, 신병과 당쟁의 와중에서 불운한 일생을 마친 비운의 왕이다.
1689년(숙종15년). 원자(훗날 경종)로 정호되자 노론인 영수 송시열이 상조론을 주장하다가 사사되고
민비가 폐출되었다.
이듬해 1690년(숙종16년). 세자(훗날 경종)로 책봉되고 생모 희빈 장씨는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694년(숙종20년), 생모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격하되어
1701년(숙종27년), 희빈 장씨는 사사되었고 세자(훗날 경종)는 이 때부터 질환이 있었으며,
1717년(숙종43년), 숙종은 세자(훗날 경종)의 다병무자를 걱정해 몰래 노론을 주도하는 이이명을 불러
이복 동생인 연잉군(훗날 영조)을 후사로 정할 것을 부탁하였다.
또한,그 해 세자 대리청정을 명했는데 소론 측은 세자의 흠을 잡아 바꾸려 한다 하여 반대하였다.
이후로 세자(훗날 경종)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간의 당쟁이 격화되었다.
경종이 즉위한 원년인 1720년(경종 원년) 이듬 해인 1721년(경종1년),
경종의 다병무자를 이유로 건저(왕위 계승자 정하는 일)의 논의가 일어났다.
이에 노론인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등은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게 하였다.
이어 집의 조성복의 소에 따라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했으나,왕의 보호를 명분으로 한 소론 측이 크게 반발해 철회하였다.
경종의 질환이 점점 심해져 정무 수행이 어려워지자,국사도 볼 수없으며 왕의 권위도 추락하였다.
때문에 이를 기회로 권신의 전횡과 당인들의 음모가 더욱 심해졌다.
1721년12월(경종1년), 김일경 등은 세제 대리청정을 제기한 조성복과 이를 봉행하고자 한 이이명,김창집,
이건명,조태채 등 노론 4대신을 왕권 교체를 기도한다고 모함해 축출하고,
소론 정권을 수립하는 환국을 단행하였다.
이어 1722년3월(경종2년), 노론 일파가 왕을 시해하고자 모의했다는 목호룡의 고변으로 소론 일파의 의도
대로 노론 4대신을 비롯한 관련자 50여 인을 처단하고,
그 밖에 170여 인이 유배 또는 연좌되어 처벌을 받았다.
두 해에 걸친 신임사화로 노론을 일망타진한 소론은 경종의 재위 기간에 정권을 전횡하였다.
소론이 집권하자 1722년 김수구,황욱 등의 상소에 따라
1717년(숙종 43년)에 관작을 추탈당한 소론의 영수 윤증과 그의 아버지 윤선거의 관직 증시를 회복시켰다.
1723년(경종3년), 긴급한 일이 있어 왕이 중신을 부를 때 발급하는 명소통부를 개조했고,
서양의 수총기( 消火器)를 모방해 이를 제작하게 하였다.
또,관상감에 명을 내려 서양의 문진종을 제작하게 하고,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밝혀주는 내용을 담은
남구만의 '약천집'을 간행하였다.
1724년(경종4년)에는 서원에 급여한 전결의 환수를 의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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