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훈            2019.08.05.월요일,맑음

이승훈; 조선 후기의 천주교인으로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이다.

생졸; 1756년(영조32년)-1801년(순조1년)

본관; 평창

교명; 베드로

호; 만천

부; 참판 이동욱으로 남인

외조부; 이용휴와 외삼촌 이가환의 영향

 

이승훈은 기호남인의 젊은 재사인 권일신·정약종·정약전·이기경 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권철신을 중심으로 한 성호좌파의 학맥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서양의 신학문에 대한 수용 열정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1775년 정약용의 누이와 결혼했다.

1780년(정조4년)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인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갈 때, 천주교에 몸담고 있던 친척 이벽의 부탁을 받고 서학 서적을 구하기 위해 베이징 북천주당에 찾아갔다. 거기에서 천주교 서적을 접하고 교리를 연구한 후 입교할 것을 결심, 이듬해 예수회의 루이 그라몽(染棟材)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신자가 되었다.

1784년 3월 수십 종의 교리서적과 십자고상·성화·묵주 등을 갖고 귀국하여 이벽·최인길과 함께 권일신, 정약용 형제 등을 대상으로 전도활동을 하면서 영세를 집전했다.

다음해 명례동의 중인(中人) 김범우 집에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를 창설했다.

이들은 정기적인 신앙모임을 갖고 교리서를 언문으로 번역해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나자,

이승훈은 가족들의 권유로 서학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척사문을 짓고 배교했다.

1787년 비밀리에 복교하여 자치적인 교회활동을 개시하여 권일신을 주교로 하고 스스로는 신부가 되어 성사를 집행했다.

1789년 10월 윤유일을 베이징으로 파견하여 자치적 교회의 존재를 알리게 하고 조상 제사에 대한 교리 해석과 성직자 파견을 부탁하게 했다. 그러나 베이징 교구장 알렉상드르 구베아(湯士選) 신부로부터 조상 제사의 불가 통보와 자치교회의 부정 회답을 받고 다시 배교를 했다.

1791년 평택현감으로 재직중 윤지충·권상연의 제사 거부로 비롯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이기경을 비롯한 유생들의 상소로 관직을 빼앗기고 투옥, 옥중에서 배교를 하여 석방되었다.

1794년 중국에서 신부 주문모가 입국하여 전도활동을 하자 교회와 다시 접촉했으나, 다음해 윤유일·최인길·지황 등이 체포·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다시 투옥, 예산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생활중 '유혹문'을 지어 유포하고

1796년 유배가 풀린 후 '주자백록동연의'를 짓는 등 교회활동을 단절한 입장을 밝혔다.

1793년 이후 기호남인들은 정치적으로는 채제공을 중심으로 한 채당(蔡黨)과 그에 반대하는 홍당(洪黨)으로, 천주교에 대한 입장에서는 신서파(信西派)와 공서파(攻西派)로 나누어졌다.

채당 신서파에 속한 그는 반대파에 속한 홍낙안·이기경 등에게 계속 공격을 받았다.

1801년 순조 즉위 후 정순왕후와 심환지 등 벽파세력 및 최헌중 등 남인의 일부 세력은 남인 시파가 천주교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계기로 사학탄압을 내세우면서 신유사옥를 일으켰다.

이에 이가환·정약용·권철신·정약종·정약전 등과 함께 연루되어 같은 해 2월 26일 정약종·최창현·최필공·홍교만·홍낙민과 함께 '구서전법''밀통양인''잠모가환의 죄목으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했다.

1856년 아들 신규의 탄원으로 대역죄는 신원되었다.

이후 신규와 손자 재의는 1866년에, 증손 연구·균구는 1871년에 순교하여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냈다.

문집으로 '만천유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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