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차 수신사   김기수        2019.08.15.목요일,맑음

김기수; 곡산군수, 덕원부사, 대사성,제1차 일본 수신사 등을 역임한 문신.

생졸; 1832년(순조32)-미상

본관; 연안

호; 창산

출신; 서울

부; 김준연


1875년(고종12)에 현감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응교에 오르고,

이듬해인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후 통정 대부에 올랐으며,

예조 참의로 제1차 수신사에 임명되어 대일 교섭의 첫 사절이 되었다.

사절 단원 76명을 인솔하고 4월4일 서울을 출발하여 4월29일 부산에서 일본 기선 고류마루에 승선,

4월30일 시모노세키에 도착하고 5월4일 고베를 경유하여 5월7일 요코하마에 입항하여,

일본 외무성 관리의 마중을 받고 특별 열차편으로 동경에 도착하였다.

그 뒤 5월 27일 동경을 떠날 때까지 20일간 체류하면서 개화한 일본의 문물,

즉 전신과 철도의 가설, 군함과 대포의 제조를 비롯하여 군사·기계·학술·교육 등의 시설을 관람하는 외교

의례상 전례가 없는 환대를 받았다.


김기수의 일본 견문기는 '일동기유''수신사일기'에 나타나 있다.

수신사 일행의 보고와 김기수가 고종에게 올린 '복명별단'은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척신과 조정의 신하들에게 개국주의에 커다란 흥미와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그 결과 일본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져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 일행과 1881년 신사유람단을 파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동경 체류 당시 주일 영국 공사가 호의를 베풀어 면회하기를 요망하였으나,

구미 외국 사절과는 일체 접촉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1877년 황해도 곡산군수, 1879년 덕원부사, 1881년 대사성,1883년 감리의주통상사무 등을 역임하고,

1893년에 홍주 목사로 나갔을 때 황간·청풍 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안핵사로 파견되었다.

민란 주모자를 엄한 형벌에 처하여 귀양 보내고,

전 황간 현감 민영후와 전 청풍 부사 송병두는 의금부로 하여금 죄인을 잡아다가 신문하도록 하였다.

이후 관직이 참판에 이르렀으며 문명이 높았다.

저서로는 '일동기유''수신사일기'가 있다.


1867년 학행 관련 음서에 선발되어 현감을 지내다가,

1875년(고종12년),별시 문가 병과로 급제, 응교로 뽑혔다.

1876년, 예조참의로 있을 때,강화도조약의 결과 파견하기로 한 수신사의 대표로 결정되어 일행 75명과

함께 일본 기선 고류호를 타고 ,일본제국으로 건너가 온갖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근대화한 일본의 문물을

둘러보고 왔다.

1876년 음력6월 귀국하여 '일동기유''수신사 일기' 등을 썼다.

이를 계기로 조정의 일본에 대한 관념이 호전되어 뒤에 신상유람단을 보내게 된 동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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