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독립군 창설           작성일자;2019.10.28.월요일,맑음

 

1919년,홍범도(,1868-1943)가 의병 출신을 중심으로 창설한 항일 독립군 부대로

간도 국민회와 연합하여 활발한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으며,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1919년 홍범도가 의병 출신과 연해주와 간도에 거주하던 한국인을 중심으로 창설한 항일 독립군 부대이다.

1920년3월, 대한국민회군과 연합한 뒤 북간도 지역에 거주하던 한국인의 자치단체인 대한국민회 소속으로 활동했다.

1919년8월, 혜산진 공격을 시작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활발히 전개했으며,

1920년3월 이후에는 북간도의 독립군 부대의 연합을 주도하여 정일 제일군,대한북로독군부, 동도독군부

   등을 창설하여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한독립군을 이끈 홍범도는 1895년 의병을 일으킨 뒤,

1907년 이후 갑산,삼수,북청 등지에서 여러 차례 일군에 승리를 거두며 함경도를 대표하는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1910년 이후 국내에서의 의병 활동이 어려워지자 간도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하였으며,차도선, 조맹선 등과 

   함께 포수단을 조직해 일본에 대한 항쟁을 계속하였다.

1918년8월, 일본이 러시아의 내전에서 백위군을 지원하며 연해주를 침입해오자,홍범도는 의병 출신과

   연해주의 한국인을 중심으로 부대를 구성하여 유격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국내 진공을 위해 백두산 부근의 안투현으로 이동하였으며,

   대한 국민의회의 간도,훈춘 지부 역할을 하던 대한 국민회의 지원을 받아 대한 독립군으로 부대를 재편 하였다.

대한독립군은 1919년8월, 압록강을 건너 혜산진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섬멸시켰는데,

   이는 3.1운동 이후 전개된 최초의 국내진공작전이었다.

1919년10월에도 다시 국내로 진공하여 강계와 만포진을 점령했으며,

   자성군으로 진출해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7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1920년3월까지 최진동이 이끌던 군무도독부와 연합하여 두만강 연안의 회령,종성,온성 등으로

   여러차례 진공 작전을 펼쳤다.

   대한 독립군의 대대적인 국내 진공작전은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높이고, 만주에서 독립군의 무장 항쟁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 3월 대한 독립군은 근거지를 안투현에서 왕칭현으로 옮겼으며, 더욱 규모가 큰 국내 진공작전을

   벌이기 위해 대한 국민회의 재정 지원을 받아 연해주에서 무기를 구입하였다.

   그리고 분산되어 있던 북간도 지역 독립군 부대의 통합에 나서 우선 대한 국민회 자체의 군사조직으로

   안무가 이끌던 국민회군과 연합해 '정일제일군'을 편성했다.

   군의 재정과 행정은 대한 국민회가 관장했으며, 대한 독립군은 홍범도가, 국민회군은 안무가 각각 지휘

   하되, 군사 작전을 벌일 때에는 홍범도가 '정일제일군사령관'으로 이끌도록 하였다.

1920년5월3일에는 최진동의 근거지인 왕칭현 봉오동에서 북로군정서, 군무도독부,대한신민단,광복단,

   의군부와 연석 회의를 열어 연합을 추진했고,여러 차례 공동 작전을 펼쳤던 군무도독부와 우선 연합하여

1920년5월28일, 대한 북로독군부를 결성했다.

   대한 북로독군부는 최진동이 부장,안무가 부관이 되어 행정과 정치, 재정 등을 주로 담당했다.

   홍범도는 그 산하의 북로제1군사령부 부장이 되어 군사를 담당했다.

   병력은 4개 중대로 편성하여 이천오,강상모,강시범,조권식 등이 중대장이 되었으며,봉오동에 집결해

   대규모 국내 진공을 계획하였다.

1920년6월4일,박승길(1893~1960)이 지휘한 대한신민단 소속의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진입해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해 타격을 입히자, 일본군 남양 수비대의 1개 소대가 두만강을 건너

   삼둔자로 추격해와 양민을 학살했다.

   독립군이 삼둔자에 매복했다가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히자,

   일본군은 함경북도 나남(청진)에 주둔하던 제19사단에 월강 추격대대를 편성해 봉오동을 공격했다.

1920년6월7일, 대한 독립군과 국민회군, 군무도독부, 신민단의 연합부대는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 추격대대를 쳐부수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봉오동 전투였다.

1920년6월21일, 대한 독립군은 북로군정서를 제외한 다른 독립군 부대와도 연합하여 '동도독군부'를 편성

   했으며, 옌지,즈런향,이란거우로 주둔지를 옮겼다.

1920년7월8일,라오터오거우에서 독립군 색출에 나선 일본 경찰을 기습하여 노두구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1920년10월에는 허룽현의 얼다오거우,싼다오거우로 이동하여 이 지역을 공격해온 일본군을 북로군정서 등과

   연합하여 격퇴하였다.이것이 청산리전투다.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한국인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등 야만적인 간도 참변을

   자행하며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에 나서자 대한 독립군은

   중국와 러시아의 국경 지대인 헤이룽 장성(흑룡강성)의 미산(밀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1920년 12월 다른 독립군 부대와 통합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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