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산리 전투        2019.10.28.월요일,맑음

1920년10월2일-26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허룽현(화룡현) 청산리 백운평·천수평·완루구 등지의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이다.


3·1운동 이후 두만강과 압록강 접경 지대에서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이에 일제는 직접 일본군을 간도로 침공시켜 독립군과 항일 단체를 없애고자 하였다.

간도 침략에 대한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일제는 중국의 마적을 매수하여 훈춘 사건을 일으켰다.

훈춘 사건을 구실로 일제는 대규모의 병력을 간도에 투입하여 한인 사회와 독립군을 탄압하였다.

일본군의 강요로 독립군을 탄압할 수 밖에 없었던 중국 관헌들은 독립 군단에게 근거지를 이동할 것을 요구하였다.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독립 군단은 1920년8월 하순부터 새로운 근거지를 구축하고자 본영을 떠나 허룽현 이도구· 삼도구의 서북방 삼림지대로 진군하였다.

이곳은 험준한 삼림지대로 일제 탄압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으며 국경과 근접하여 국내진입작전을

펼 수 있었다.

간도로 침입한 일본군 중 동지대 10월20일을 기하여 독립군에 대한 토벌 작전에 돌입하였다.

이에 김좌진 장군은 백운평 고지에 독립군을 매복시키고 일본군을 기다렸다.

일본군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21일 아침 백운평으로 들어왔다.

독립군은 일본군을 기습하였고 일본군은 완전히 무너져 전위 부대 200명이 전멸하였다.

뒤이어 도착한 야마타 연대도 독립군의 공격으로 사상자가 속출하자 독립군을 협공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퇴각하였다. 북로군정서 군은 이 전투에서 일본군 2~3백 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북로군정서 군은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고 갑산촌으로 철수하였다.

이 시각에 일본군은 이도구 완루구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를 공격하였다.

홍범도는 저지선에서 전투를 펼쳤으며 예비대는 우회해 오던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이러한 공격을 예상치 못하고 있다가 독립군 예비대가 빠져나가자 자기 부대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400여 명을 사살하였다.

10월 22일 새벽에 갑산촌에 도착한 북로군정서군은 인근 천수평에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야영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군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는 독립군은 일본군 120여 명 중 어랑촌 본대로 탈출한 4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살하였다.

 

어랑촌으로 탈출한 일본군은 참패 소식을 어랑촌에 주둔한 아즈마 부대에 알렸다.

공격을 예상한 북로군정서군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출동한 일본군과 전면전에 돌입하였다.

이 전투에 독립군은 북로군정서 군과 완루구에서 승리한 홍범도 부대 등 약 1,500명이 총동원되었으며

승리를 거두었다.

10월24일에는 북로군정서 소속 한 부대가 천보산 부근에 있던 일본군을 습격하였으며

10 25일에는 홍범도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홍범도 부대를 추격하던 일본군은 25일 밤 고동하 골짜기에 독립군의 흔적을 발견하고 공격하였으나

이미 독립군은 공격을 대비해 매복 중이었다.

독립군은 즉시 반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청산리 전투는 한국 무장 독립 운동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린 대첩으로 독립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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