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산 김원봉              2019.10.31.목요일,맑음

김원봉(생졸;1898년-1958년)은 일제 강점기에 독립 운동가이자 정치가로,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해 무정부주의 투쟁을 벌였으며, 

1938년에는 조선 의용대를 창설하는 등 일제에 대한 무장 투쟁을 전개하는 데 앞장섰다.


1916년 중국으로 건너가 1918년 난징의 진링 대학에서 수학하다

1919년2월, 신흥 무관학교에 입학한 김원봉은 3.1운동 이후에 일제와의 무장 투쟁 노선을 분명히 하면서

1919년11월, 만주 길림성에서 신흥 무관학교 동료들을 포섭해 의열단 조직하였다.

   의열단은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뜻이다. 
1920년, 의열단은 부산·밀양경 찰서 폭탄 투척(박재혁,최수봉), 

1921년, 조선 총독부 폭탄투척(김익상), 

1923년,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김상옥), 

1924년, 도쿄 궁성 폭탄 공격 미수(김지섭), 

1926년, 동양 척식회사 폭탄 투척(나석주) 등 국내의 일제기관 파괴,요인 암살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전개

    하였는데,처음 의열단에 참가했던 13명의 단원은 광복이 될 때까지 한 사람도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활동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6년,의열단을 이끌며 개인적인 폭력 투쟁의 한계와 조직적인 항일 군대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의열단과 함께 황포 군관학교 생도로 입교해 장제스(장개석) 정부와 중국 공산당과 인연을 쌓았다. 

   이후 레닌 정치 연구소(1919,북경)와 조선 혁명 간부학교(1932,남경)를 세웠고,

1935년 의열단과 한국 독립당 등 5당이 통합하여 결성된 조선 민족 혁명당 조직을 주도하며 서기 부장에 

   취임한 뒤 1937년 총서기가 됐다. 
1938년에는 중국 국민당의 동의를 얻어 조선 의용대를 창설하였으나, 자신이 조직한 조선 의용대 대원들이

   김두봉이 조직한 조선 독립 동맹으로 대거 이탈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1942년에 조선 의용대 일부를 이끌고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여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이 되어 군부를 총괄

   하였으며,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

1944년 임시 정부의 군무부장,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1945년12월, 광복 후  임시 정부 제2진으로 귀국해 좌우 합작을 추진했으나,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1948년 남북 협상 때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월북한 뒤 북한에 남았다. 

1948년8월, 북한 정부 수립에 참여해  북한 최고 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을 지냈고, 

1948년9월 ,국가검열상, 1

952년 노동상, 

1956년 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1957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요직에 있었으나 

1958년 11월 북한의 김일성 체제 강화 과정에서 김일성에 비판적이었던 연안파가 제거 될 당시 함께 숙청

   되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만주 사변/191031  (0) 2019.10.31
⊙ 광주 학생 항일 운동/191031   (0) 2019.10.31
⊙ 신간회/191031   (0) 2019.10.31
⊙ 6.10 만세 사건/191031   (0) 2019.10.31
⊙ 자유시 참변/191031   (0) 2019.10.3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