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 학생 항일 운동 2019.10.31.목요일,맑음
1929년11월에 광주에서 시작되어 이듬해 3월까지 전국에서 벌어진 학생들의 시위 운동으로 3ㆍ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항일 운동이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1929년10월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열차 안에서 일어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본인 학교인 광주 중학 학생들의 충돌이 계기가 되었다.
광주중 학 3학년인 후쿠다 슈조 등의 일본인 학생이 광주 여고보 3학년인 박기옥 등을 희롱하였고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 등과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은 광주 고보와 광주 중학 학생들의 패싸움으로 확산되었고, 일본 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편들고 조선인 학생들을 구타하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광주 고보 학생들은 11월3일 광주에서 가두 시위를 벌였다.
11월 3일은 일왕 메이지(명치;재위 1867-1912)의 생일인 명치절 이어서 학생들은 이를 기념하는 행사에 참여해야 했다. 그리고 그 날 광주에서는 전남 누에고치 6백만 석 돌파 축하회가 열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명치절 행사를 마친 광주고보 학생들은 광주 시내에 모여 항의 시위를 벌였고, 일부 학생은 나주 사건에 대해 편파 보도를 했던 광주일보사로 몰려가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기도 했다. 그리고 신사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던 광주중학의 일본인 학생들과 집단으로 충돌하여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날의 시위는 비교적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었으며, 여기에는 광주 고보만이 아니라 광주 여고보와 광주 농업학교 학생들도 일부 참여했다. 일제는 학생들의 시위가 격렬해지자 광주시내 모든 중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시위에 참여한 조선인 학생 수십 명을 구금하였다.
학생들의 시위 소식이 전해지자 신간회에서는 김병로·허헌 등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파견했고,
청년 조직인 조선 청년동맹과 학생 전위동맹도 조사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광주 지역의 학생 비밀 결사인 성진회를 모태로 하여 결성된 독서회 중앙 본부의 장재성 등은 광주의 사회 단체들과 함께 학생 투쟁 지도본부를 설치하여 학생들의 시위를 전면적인 항일운동으로 발전시킬 것을 계획하였다. 당시 장재성은 광주 지역 학생들의 행동 지도를 맡았고,장석천은 시위의 전국적 확산, 국채진은 전남 지역 학생의 지도, 박오봉은 노동자와 노동단체의 지도, 임종근은 전남 지역의 공립보통학교 교사들과의 연락, 강석원은 외부와의 연락, 나승규는 운동자금 조달 등으로 역할을 나누었다.
그리고 11월 7일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권유근(權遺根)·박일(朴日), 조선청년동맹의 부건(夫健) 등과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문제에 대해 협의하였다.
이들은 11월11일,저녁에 격문을 살포하여 11월 12일에 광주 시내에서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광주여고보, 광주사범학교 학생들도 참여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당시 학생들은 격문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시위의 자유 보장,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확립,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 민족 문화와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 보장 등 9개 항목을 내세웠다. 이 날의 시위로 수백 명의
학생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었으며, 광주 지역의 소식이 알려지면서 학생들의 시위운동은 목포와
나주 등 인접 지역으로 퍼져갔고, 12월과 이듬해 1월에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조선 학생 과학연구회와 학생 비밀 결사인 학생 전위동맹 등은 서울 지역 학교들에 조직된 독서회와 청년
단체 등을 통해 광주 학생 항일운동의 소식을 전하며 서울에서의 시위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12월2일 밤에 전국의 학생과 민중의 총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살포했다.
이에 호응하여 12월5일, 경성제이고보(경복고)의 동맹 휴교를 시작으로 경성 제일고보(경기고)·중동·경신·보성·중앙·휘문·배재·이화·동덕·협성실업 등의 학교에서 동맹 휴교가 잇따랐다.
그리고 12월9일, 경신학교·보성고보·중앙고보·휘문고보·협성실업학교 등의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벌인 것을 시작으로 13일까지 시위 운동이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12,000여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가하여, 그 가운데 1,400여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신간회는 학생들의 항일시위운동을 각계각층으로 더욱 확산시키기 위해 근우회·조선청년총동맹·조선노동총동맹 등과 함께 12월 13일 서울에서 대규모 민중대회를 개최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전에 이관용(李灌鎔)·허헌 등 신간회와 근우회, 조선노동총동맹 등의 주요 간부 90여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민중대회는 열리지 못했다. 일제는 학생시위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겨울방학을 조기에 실시해 학교를 폐쇄하고 통제와 감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운동은 그치지 않고 1930년 3월 초까지 전국으로 확산되어 계속되었다. 1930년 1월 학교들이 다시 문을 열자 서울에서는 1월 15일 수천 명의 학생들이 일제의 타도와 약소민족해방 만세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고, 일제는 다시 임시휴교조치로 학교를 폐쇄했으나 학생들의 시위는 1월 18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도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조직하거나 동맹휴학으로 이에 호응했다. 개성·부산·진주·청주·공주·대전·홍성·예산·조치원·부여·전주·정읍·고창·이리·평양·신의주·정주(定州)·선천(宣川)·영변(寧邊)·함흥·원산·경성(鏡城)·회령·청진·대구·춘천·해주·사리원 등에서 동맹휴교나 시위운동이 벌어졌다. 국외에서도 연대의 움직임이 나타나 만주나 일본의 조선인 학교와 유학생들도 시위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중국 본토나 미국, 연해주 등지에서도 학생 시위와 연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일제의 자료에 따르면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한 학교는 모두 194개, 참여한 학생은 5만4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당시 중등학교급 이상의 학교에 재학하던 학생이 모두 8만9천여 명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전체 학생의 60% 정도가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1,600여 명이 구속되었으며, 학교에서는 580여 명이 퇴학, 2,330여 명이 무기정학을 받았다.
학생들은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언제나 중요한 구실을 했으며, 3·1운동과 6·10만세운동에서도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광주학생항일운동은 학생들이 학교를 단위로 조직된 대중운동의 차원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특징을 지닌다.
학생들이 이렇듯 대중운동의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항일운동에 참여한 것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과 사회 현실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다. 3·1운동 이후 일제가 기만적이나마 조선인의 기본적 권리를 확대하면서 근대 교육기관의 설립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일제의 교육은 우민화(愚民化) 정책에 기초하고 있어서 조선인은 고등교육이 제한되어 있었고, 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자치활동 등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고 일본인 교사들의 민족적 차별과 무시도 일상적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근대적 교육을 받은 조선인 학생은 자부심도 컸지만 이들의 사회 진출은 여전히 제한되어 있었으며 일자리도 많지 않았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이러한 학생들의 일제의 지배에 대한 반감이 분출된 것이며, 1920년대 후반 전 세계에 닥친 공황으로 노동자, 농민 등의 저항이 폭발적으로 분출했던 사회적 분위기도 학생시위의 전국적 확산에 영향을 끼쳤다.
학생들의 집단의식이 높아진 것도 하나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1919년만 해도 전국의 학교는 1,320개에 학생도 13만1,975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학교 설립이 늘어나면서 1920년대 후반에는 학교는 2,539개, 학생수는 58만7,951명으로 늘었다. 또한 1910년대만 하더라도 보통학교 최고학년인 제4학년의 평균연령은 15.5세였지만, 최고령은 27.11세, 최연소자는 10세로 나타나는 등 내부의 연령차가 크게 나타나 학생들의 동질감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에는 근대적 교육제도가 확산되면서 학생들의 세대적 동질성도 높아졌고, 이는 학생들의 집단의식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1920년대 들어서면서 학생들의 저항은 꾸준히 증가해왔다. 학생들의 가장 일반적인 투쟁 형태는 어떤 요구를 내세워 집단으로 등교나 수업을 거부하고 농성을 하는 동맹휴교였는데, 일제의 자료에 따르면 1921년 23건이었던 학생들의 동맹휴교가 1927년에는 72건, 1928년에는 83건으로 늘어났다. 1920년대 초반에는 학교 설비나 교규 개정 등 학내 문제가 주된 원인이었으나, 이러한 문제도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므로 학생들의 항일의식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1920년대 후반 학생들의 동맹휴교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 자체에 대한 저항으로 발전되었고, 그 투쟁 형태도 훨씬 조직적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1927년과 1928년에 전국적으로 나타났던 동맹휴교에서는 ① 조선어를 교수 용어로 ② 조선 역사·지리의 교수 ③ 학우회의 자치권 획득 ④ 일본식민지교육 반대 ⑤ 조선인 본위의 교육 등의 요구가 제기되었다. 그리고 통신·선전·감시·연락 등의 부서를 갖춘 투쟁조직을 만들어 동맹휴교를 장기적이고 조직적으로 벌이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3·1운동 이후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과 더불어 학생 조직이 크게 성장한 것이 영향을 끼쳤다. 1910년대만 해도 학생 조직은 지역별로 친목조직이나 비밀결사의 형태로 나타나는 데 그쳤으나, 1920년대에는 학교별로 독서회가 폭넓게 조직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교내 조직을 기반으로 1920년 5월 조선학생대회가 열리고, 그 뒤 조선학생회(朝鮮學生會), 조선공학회(朝鮮共學會),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의 조직이 만들어졌다. 1927년 신간회가 창립된 뒤에는 내부에 학생부를 설치하였고, 민족주의 계열의 조선학생회,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이 이를 중심으로 협력하였다.
이처럼 1920년대에 생겨나기 시작한 사회주의 독서회, 비밀결사의 활동으로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투쟁 양상이나 내용에서 모두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도 광주 지역의 학생 비밀결사였던 성진회(醒進會)가 운동의 확산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성진회는 1926년 11월 3일 당시 조선공산당 전남지부 위원장이었던 강석봉(姜錫奉)과 청년학생부 책임지도원이었던 지용수(池龍洙)의 지도를 받아 왕재일(王在一)·장재성(張載性)·박인생(朴仁生) 등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사상의 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단체의 성격을 띠고 조직되었다. 성진회는 1927년 3월 비밀 유지를 위해 자진 해산하였으며, 학교별로 조직 사업을 펼쳐 광주고보·광주사범·광주농업·광주여고보에 조직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각 학교별 조직을 독서회로 개칭하고, 학교·학년·학급별로 조를 편성해 조직을 확대했다. 또한 각 학교 독서회를 지도하는 중앙기관으로서 독서회중앙본부를 설치하고 그 밑에 조사선전·조직교양·출판·재정 등의 부서를 두었으며, 장재성(張載性)이 중앙비서로 활동했다.
성진회는 1928년 광주고보생 이경채(李景采)가 조선독립을 주장하는 문건을 교내에서 배포하다가 경찰에 구속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동맹휴교 중앙본부를 결성해 광주고보의 동맹휴교를 조직적으로 이끌었다. 당시 광주농업도 광주고보의 동맹휴교에 연대하여 참여했으며, 광주고보 학생들의 동맹휴교는 5개월이나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비밀결사를 중심으로 한 조직적 기반 위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3·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항일운동이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시위운동의 확산은 1930년대 초반 노동자와 농민 등이 일제의 폭압적인 지배에 맞서 대중운동을 활발히 벌이는 데 선도적인 구실을 하였다. 학생들은 3·1운동이나 6·10만세운동 때에도 커다란 몫을 담당했다. 그러나 당시는 일부 학생들이 참여한 것이지 조직된 학생 대중이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학생은 학교를 단위로 조직된 대중운동의 힘으로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이는 사회 각계각층의 대중운동 발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은 학생들의 투쟁형태가 동맹휴교에서 벗어나 가두시위로 발전했으며, ‘일본제국주의 타도’, ‘피억압민족해방 만세, ‘무산계급혁명 만세’ 등의 구호를 내세워 투쟁의 내용이나 의식에서도 크게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학생들은 동맹휴교 등 집행행동을 활발히 벌여갔으나 192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학생들의 요구는 교육환경 개선이나 일보 교사 배척 등 학내 문제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는 ‘일제 식민지교육 반대’, ‘조선인 본위의 교육’ 등으로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투쟁의 내용을 발전시켜가다가,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는 일제 타도와 민족 해방이라는 문제를 직접 제기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광주학생항일운동은 그 투쟁을 전국적으로 이끌어갈 구심이 없어서 지역이나 학교들을 단위로 고립분산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학생들이 ‘일제 타도’를 내세우고 앞장서서 투쟁을 벌였지만 원산총파업(元山總罷業) 등 당시 활발히 전개되던 노동자, 농민들의 대중운동과 효과적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이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5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진행되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신간회가 민중대회를 열어 학생들의 시위운동을 노동자·농민들의 대중운동과 결합시키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광주학생항일운동 이후 학생운동은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한 대중운동보다는 비밀결사를 중심으로 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그래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여파로 1930년과 1931년에는 100여건 이상의 동맹휴교가 벌어지지만, 1932년 이후에는 학생들의 집단적인 움직임은 크게 감소하였다. 여기에는 노동계급 중심의 민족해방운동을 강조하며 신간회의 해체를 가져온 코민테른 집행부의 노선 변화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난 11월 3일을 1953년 10월 20일 ‘학생의 날’로 제정하여 기념하였다. 학생의 날은 1973년 3월 30일 기념일 간소화 방침으로 폐지되었으나 1984년 9월 19일 부활되었다. 그리고 2006년 2월 9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주학생항일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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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기 | 주요사건 |
1920년 5월 | 조선학생대회가 열리고 조선학생회, 조선공학회, 조선학생과학연구원 등 학생 조직이 만 들어짐. |
1926년 11월 | 광주 지역 학생 비밀결사인 성진회가 조직됨. |
1927년 | 신간회 내부 학생부가 만들어짐. |
1927년3월 | 성진회, 비밀 유지를 위해 자진 해산하고 학교별 조직 사업으로 항일활동 방향 전환. |
1928년 | 광주고보생 이경채가 조선독립을 주장하는 문서를 교내에서 배포하다가 경찰에 구속 당하자 성진희 주도 하의 동맹휴교가 일어나 약 5개월 간 지속됨. |
1929년10월30일 |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열차 안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 학생들 간 충돌 발생. |
1929년 11월 3일 | 일왕 매이지의 생일인 명치절 행사에 참여한 학생들이 행사 이후 광주 시내에서 항의 시위를 벌임. 일제가 광주 시내 모든 중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시위 참여 학생 수 십 명을 구금하며 대응. |
1929년 11월 7일 |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권유군∙박일, 조선청년동맹의 부건 등이 광주로 내려와 학생 운동 확산에 대해 협의. |
1929년 11월 11일 | 각 학생단체 들이 격문을 살포. |
1929년 11월 12일 |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광주여고보, 광주사범학교 학생들 등 수많은 학생들이 광주 시내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임. |
1929년 12월 2일 |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학생저전위동맹 등의 단체가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 시위 소식을 전하며 서울에서 시위를 조직하며 격문을 살포. |
1929년 12월 5일 | 격문에 호응하여 경성제이고보의 동맹휴교를 시작으로 경성제일고보, 중동, 경신, 보성, 중앙, 배재, 이화, 협성실업 등에서 동맹휴교가 이어짐. |
1929년 12월 9일 | 경신학교, 보성고보, 중앙고보, 휘문고보, 협성실업학교 등의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벌이고 나흘 간 이어짐. |
1929년 12월 13일 | 신간회가 근우회, 조선청년총동맹, 조선노동총동맹 등과 함께 학생 시위를 확산시키기 위한 대규모 민중대회를 개최하려 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 됨. |
1930년 1월 15일 | 수 천 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가두시위가 사흘 간 이어짐. |
1930년 3월 | 1600여 명의 학생이 구속, 580여 명의 학생이 학교에서 퇴학, 2330여 명이 무기정학을 조치를 받으며 시위가 잦아듦. |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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