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윤봉길 작성일자; 2019.10.31.목요일,맑음
윤봉길
생졸; 1908.6.21-1932.12.19
호; 매헌
19세의 나이에 농촌 계몽 운동에 뛰어든 윤봉길 의사는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계몽 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백범 김구를 만난 윤 의사는 '한인 애국단'에 가입,김구와 함께 홍구 공원 거사를 계획한다.
윤 의사의 의거는 널리 알려져 중국의 한인 독립 운동 지원과 임시정 부의 활성화 등
이후 독립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25세의 나이로 순국한 윤봉길 의사.
매헌 윤봉길 의사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부친 윤황과 모친 김원상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며,봉길은 별명이다.
11세 때인 1918년 덕산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ㆍ1 독립 운동의 함성과 함께 학교를 자퇴하고,
1921년 매곡 성주록의 문하에 들어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전통 교육을 받으면서도 당시 민족 잡지인 '개벽' 등을 구독하며 민족 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여 갔다.
1926년, 서당에서 수학 하던 중 윤 의사는 산책길에 건너편 공동 묘지에서 여러 묘표를 뽑아들고
선친의 무덤을 찾아달라고 간청하는 한 무지한 청년을 만나게 된다.
이때 의사는 묘표를 뽑아 무덤의 위치 조차 알 수 없게 만든 그 청년의 무식이
나라까지 잃게 한 적(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촌 계몽 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윤 의사는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농민 계몽은 야학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윤 의사는 1927년 '농촌 독본' 3권을 저술하여 본격적으로 농촌 계몽 운동을 벌였다.
'농민독본'의 구성이 ‘낙심 말라’,‘백두산’,‘조선 지도’,‘자유’,‘농민과 공동정신’ 등
이었던 것만 보아도 당시의 농촌 계몽 운동이 단순히 계몽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민족 얼의 부흥을 목적으로 한것임을 알수 있다.
1928년에는 부흥원을 세워 구체적인 농촌 개혁을 실시하여 갔다.
주된 사업은 농가 부업 장려 등의 증산 운동과 공동 판매, 공공 구입의 구매 조합 설치, 토산품(국산품)
애용과 일화 배척, 생활 개선 등이었다.
1929년,'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 개혁 운동을 추진할 중심 인물들을 규합하였고,'위친계','수암 체육회'
결성을 통한 친목 도모 및 체력 향상 등 윤 의사의 활동은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1929년에 접어들자 농민 계몽, 농촌 개혁 운동의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하였지만,
이 과정에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운동이 결국 민족 운동,즉 독립 운동으로 귀결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일제 식민 통치하에서 한국인의 진정한 행복은 개량과 개혁의 수준에서 머물 수
없었고, 완전한 독립을 달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1929년12월16일자 일기에 윤 의사는 “함흥 수리조합 일본인들이 조선인 3명을 타살. 아! 가엾어라,
이 압박 어느 날 갚을는지”라고 적어 넣기도 했다.
이는 윤 의사가 막연하나마 일제의 압박을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 행동의 싹을 틔우고 있었던 사실을 잘
보여준다.
1930년3월6일,윤봉길 의사는 ‘장부출가생불환(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하고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망명에 이르기까지 그의 고뇌와 결단은 중국 청도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사랑하는 어머니에게’라는
서신에 잘 드러나 있다.
윤 의사에게 있어 그 사랑은 곧 민족애였다.
근대적 사고와 혁명가적 열정을 함께 갖춘 사람이 바로 윤봉길 의사였다.
월진회원들이 마련해준 여비를 갚기 위해 중국 청도의 세탁소에서 1년여간 일한 것만 보아도 그 인격의
한 면모를 살필 수 있다.
1931년, 윤 의사는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일시에 던져 조국
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마침내 임시 정부의 지도자인 백범 김구를 만나
소원하던 조국 독립의 제단에 몸을 던지게 된 것이다.
김구와 윤 의사는 의열 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년4월29일,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일본군의 상해 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 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라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를 접하게 된다. 이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던 기회였던가.
오로지 자신의 몸을 던져 독립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천리 먼 길을 달려온 윤 의사였다.
윤봉길 의사와 백범 김구는 드디어 그 기회를 맞은 것이다.
거사를 위해 치밀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의거 3일 전인 4월26일,
윤 의사는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 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김구가 주도하던 '한인 애국단'에 가입한다.
의사는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최후의 준비를 서둘렀다.
4월27일과 28일에는 홍구 공원(현 노신공원)을 답사하여 거사의 만전을 기하였다.
상해 병공창의 주임이었던 김홍일 장군의 주선으로 폭탄이 마련되었고,
거사 장소는 눈이 시리도록 익혀두었다.
거사일인 4월29일 아침,
백범 김구와 마지막 조반을 들고서도 시계를 바꾸어 갖는 여유를 잃지 않은 윤 의사였다.
거사 후 자결하기 위해 자결용 폭탄까지 마련한 그 아침의 모습이다.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졌다.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 중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일본 거류민 단장 카와바다, 상해 총영사 무라이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오전11시40분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 연주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의사는 수통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빼었고,단상 위로 폭탄을 투척하였다.
폭탄은 그대로 노무라와 시라카와의 면전에서 폭발,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 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를 절단하는 중상을,시게미츠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었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사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감격해 하며,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육군 중앙 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하였다.
또한 한동안 침체일로에 빠져 있던 임시 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이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
5월25일, 상해 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때에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이후 윤 의사는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12월19일, 가나자와 육군 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윤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졌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 공원에 안장되었다.
윤봉길 의사는 “부모는 자식의 소유주가 아니요,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고 말할 만큼 선각적인
사고를 가진 분이었다.
하지만 거사를 며칠 앞두고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유언은 윤 의사가 참으로 지금의 우리
에게 띄우는 당부일지도 모른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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