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민주당 창당 2019.11.13.수요일,맑음
1945년9월6일 창당장덕수를 중심으로 송진우,김성수,김도연,허정,윤치영,유억겸,윤보선 등이
초기에는 중국의 임시정부를 지지하여 그 법통을 옹호하였으나, 점차 이승만의 ‘단정(單政) 주장’과 임시정부측의 ‘단정 반대’로 정치적 의견과 노선이 갈라지자 이승만(李承晩)의 단정론을 지지, 임시정부를 지지했던 태도를 바꾸었다. 그 후 단정인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하여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나 이승만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스스로 야당화하였다. 1945년 9월 6일 여운형의 존선건국준비위원회가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자, 고려민주당, 조선민주당, 한국국민당,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환영국민대회 등 민족주의 민주세력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였다. 이들은 민족진영의 모든 세력을 하나로 통합할 것에 합의하고, 9월 16일 천도교회관에서 100여 명의 대표자들이 모인 가운데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영수로서 이승만(李承晩) ·김구(金九) ·이시영(李始榮) 등을 추대하고 당수격인 수석총무에 송진우(宋鎭禹)를 선정하였다. 그외 각 부서에 당시 대다수의 민족지도자들이 배치됨으로써 어떤 정치단체보다도 유수한 민족주의 민주세력들이 총집결되었다. 이 때부터 이들은 우익 민족진영의 대표적인 정치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미군정에 적극 참여하여 실질적으로 미군정의 여당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 후 이승만의 단정 추진을 적극 지지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해 크게 활약하였으며, 5 ·10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이승만이 이끌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55명에 이어 두 번째인 29명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정치활동면에서는 오히려 한민당이 주도권을 잡아, 한민당이 미리 법학자 유진오(兪鎭午)로 하여금 기초하게 한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토대로 헌법제정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마무리 단계에서 이승만의 반대로 대통령중심제 헌법으로 변경되면서 이승만과의 심각한 대립이 시작되었다. 게다가 정부수립을 위한 초대 조각인선에 한민당이 소외되면서 이승만에 대한 본격적인 반감과 대립이 심화되었다. 한편 한민당은 5 ·10총선거를 거치면서 당세가 위축되자 소장파 의원들과의 대립으로 인기가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당의 기본 정치목표의 하나인 ‘내각책임제에 의한 책임정치 구현’을 위해서는 동조 정치세력을 규합, 헌법개정을 통하여 그를 성취해야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리하여 한국독립당 당원이던 ‘대한국민회’의 신익희(申翼熙) 세력과 ‘대동청년단’의 지청천(池靑天) 세력을 규합하여 1949년 2월 10일 한민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하였다. 그 후 한민당 세력은 여러 차례의 이합집산과 우여곡절을 거듭하면서 민주국민당, 민주당, 신민당, 민중당, 민정당, 신한당 등으로 변천하면서 한국정당사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민당은 한국의 지주계층, 자산가 및 지성인들이 주축이 된 정당으로서 자연히 그 이념과 성격은 보수적이며 민족주의적 자유민주주의를 근본으로 삼는 정치세력이었다. 이들은 중국에서 돌아오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 그를 중심으로 한 과도정부의 수립을 통한 조국의 정통성 있는 정부수립과 건국을 당면목표로 삼았다. 그들은 창당대회에서의 결의문을 통해 “우리는 독립운동의 결정체이고, 현재 국제적으로 승인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에 소위 정권을 참칭(僭稱)하는 일체의 단체 및 그 행동은 그 여하한 종류를 불문하고 이것을 단호히 배격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 후, 단정 수립 문제를 놓고 임정계통과 정치적 견해가 달라짐에 따라 한민당은 임정 지지의 노선을 버리고 이승만의 단정노선을 지지, 적극 참여하여 대한민국 건국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한민당의 정강(政綱)은 자주독립국가의 기약, 민주주의 정체의 수립, 근로대중의 복리 증진, 민족문화의 앙양과 세계문화에의 공헌, 국제헌장의 준수와 세계평화의 확립 기약 등 한국 헌법의 기본방향을 정강으로 채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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