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양 여운형 2019.11.03.일요일,맑음
몽양 여운형(생졸; 1886년5월25일~1947년7월19일)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에서 부친 여정현과 모친 경주 이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14세에 유세영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와 재혼했다.
조부 여규신과 종조부 여규덕은 동학에 가담했는데 몽양에게 끼친 영향이 컸으며,
부친 여정현은 조부와 달리 조선 시대 양반 사회의 계급 주의를 신봉했다.
몽양은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갔다.
1900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기독교를 접하고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와 우무학당에서 전신 기술을 공부하여 통신원 기술자가 되고자자 하였으나,
통신원이 일본 소유로 넘어가 취업을 그만두었다.
1906년,
부친이 사망하자 집안의 노비를 모두 불러모아 노비 문서를 모두 불태워 그들을 해방시켰다.
1907년부터,
서울 종로에 있던 승동 교회에서 선교사 보조원 생활을 했었고,
양평 고향집에 기독교 광동 학교를 세워 향리의 청년들을 계몽하는데 앞장섰다.
경기도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지회를 설립하여 활동하였고 개신교에 입교했다.
1908년,
미국인 선교사 클라크 목사의 조수로 있으면서 기호학회에 참여하여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승동교회를 출입했다.
1910년,
선교보다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강릉에 '초당의숙'을 세워 신학문을 가르치는데 전념
하였으나 총독부에 의해 학교는 1년만에 폐쇄되고 말았다.
학교가 폐쇄되자 승동 교회로 돌아와 평양 신학교를 다녔다.
대한민국 최초의 야구팀인 YMCA 야구부(황성 기독교 청년회)의 주장으로 활동하였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 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2년11월2일,
와세다 대학의 초청을 받아 일본까지 원정 경기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직접 목격한 신문물과 조선 유학생을 통해 선교사 클라크를 따라 중국 서간도
(퉁화)의 신흥 학교를 견학하였는데 이때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1914년 겨울,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에서 활동하다가 금릉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로 부터 추천장을 받아 장로교 선교회가 운영하는 난징 진링대학에서 3년간
영문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1915년2월~1917년1월;28~30세)
1916년,
상하이에서 협화서국 서점에 취업 하였으며 선교사,인성 학교 교사,여행 대행업 등을 했다.
1917년,
상하이로 활동무대를 옮기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8년,
상하이에서 장덕수를 만나면서 여운형은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몽양은 정치와 독립 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조선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김규식을 파리 평화 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였고 신한 청년당을
발기했다.
이 일은 국내 독립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다.
1918년,
상해고려민친목회를 조직하였으며,
신한청년당의 조직을 주도하고 총무간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4월,
상하이에서 임시 정부가 조직되자 임시 의정원 의원이 되었는데,
일제는 이를 자치 운동으로 회유코자 11월에 그를 도쿄로 초청하였으나 장덕수를 통역관
으로 삼아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5월에는 상하이에서 고려 공산당에 가입하였는데 국제 공산당 위원인 보이틴스키가 조선의 독립을 지원할 수 있다는 제안에 공산당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볼셰비키 정부가 상하이 임시 정부에 제공한 자금을 이동휘,김립이 가로채
독단적인 처리하자 고려 공산당은 분파되어 와해되고 말았다.
1921년,
이르쿠츠크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원동 피압박 민족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고비 사막을 횡단하고,바이칼 호수를 건너는 고난한 여행으로 도착하였으나 대회 장소는 모스코바로 변경
되었다.
1922년1월7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났으며 조선의 사정을 논의하였다.
중국 상하이로 돌아와 쑨원과 중국 공산당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였다.
김구,손정도 등과 함께 한인노병회를 조직하여 노농병 양성과 군비 조달에 힘썼다.
1925년부터는 중국 혁명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5년,
쑨원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고 중국혁명운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장개석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 축출로 몽양이 믿었던 소련의 지원과 국공합작 체계의
정치적 모델이 무너지고 말았다.
낙담한 그는 체육부 코치로 생활하면서 싱가포르에서 인삼 사업을 모색하다
1926년, 중국혁명운동이 실패한 후 독립운동을 하다가
독립 운동을 지원하였다는 혐의로 상하이 주재 일본 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어 일본을 거쳐 국내로 압송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933년 출옥하였다.
중국에서 실패한 공산 주의자이자 독립 운동가로서 허망한 날을 보냈으나 국내에서는 일약 유명인이 되었다.
1933년,
출옥하자 그는 민족의 영웅으로 추대되었고 조선 중앙 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는데 경영난으로 어려웠던 신문사는 그의 명성에 힘입어 번창하였다.
1934년, 조선체육회 회장직을 맡았다.
1944년, 비밀 결사인 '조선 건국 동맹'을 조직하였다.
8월에는 일제의 패전을 예상하고 독립운동과 국가건설을 위하여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건국동맹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농민동맹·부인동맹 등을 조직하였으며,
옌안의 독립동맹과 제휴하여 연합작전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1945년,
8.15 광복을 맞아 안재홍,정백 등과 건국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였으나 임시 정부의 지사들과 대립되었고 건준위 조직 내부 박헌영이 주도하는 극좌익 세력과 정치 투쟁 내분에 휩싸였다.
1945년9월,
조선 인민 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우익 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해 실패했다.
1945년12월, '조선 인민당'을 창당,
1946년2월,
북한을 방문하여 조만식과 김일성을 만나 미소공동위원회의 대처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좌파 세력의 연합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45년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된 후 김규식 등과 함께 좌우합작과 민족통일에 기반을 둔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와 성공을 목표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8월,
조선인민당 당수직을 사임하였으며,
1945년9월,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 3당 합당문제를 포함한 남한 현안에 대한 의견교환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였다.
1945년11월, 사회노동당 준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남조선노동당과 합동을 제의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1946년,
29개의 좌익단체를 규합하여 '민주주의 민족 전선'을 결성하였으나 정책 노선이 명확치 못해
조직을 장악하지 못했고 반대파 좌익 세력에게 밀려 탈퇴하였다.
1947년5월,
'근로 인민당'을 창당하여 위원장을 맡아 김규식·김창숙 함께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민족통일전선운동을 펼치는 등 활동 하였으나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 합작 운동을 추진하던 중
1947년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파 한지근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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