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 2019.11.15금요일,맑음
1945년12월28일,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 정부 수립을 위해 결성한 '미.소 공동 위원회'가
1946년1월16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한국의 신탁 통치'와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제반 문제 해결을 위하여
예비 회담을 가진 후,
1946년3월20일,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 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그러나 미소 공동 위원회의 가장 큰 논란은'민주주의'라는 용어와 '민주주의제 정당'에 관한 해석을 둘러
싸고 일어났다.또한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5년 동안의 신탁 통치가 요구되었으나 남한의 우익 정당과
사회 단체는 신탁 통치를 반대하였고,이에 소련측 대표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의를 반대하는 정당과
사회 단체는 임시 정부 구성에 참여 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자,미국측 대표는 의사 표시의 자유 원칙에
입각하여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 통치안을 반대한다고 해서 임시 정부 수립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와 같은 의견 대립으로
1946년5월1일,공동성명 제7호까지 발표하였으나 아무런 결실 없이
1946년5월6일부터 휴회에 들어갔다.
그 뒤 1947년5월21일,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렸으나,
1947년7월,신탁 통치 반대 투쟁 단체를 둘러싼 논란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설치된 미소 공동위원회는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미.소간 대립하다 미국측이 소극적인 태도로 결국
10월21일 결렬되었고 한반도는 남북 분단의 길로 접어든다.
1945년 12월 16일, 미국, 영국, 소련의 외상들이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회동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남북 통일 임시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안을 결의하였고, 이에 따라 국내에서는 좌익과 우익이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어 격렬히 대립하였다.
1943년11월, 카이로 회담에서 루스벨트의 신탁통치 제안에 따라 한국의 자주독립을 유보하고 ‘적당한 절차를 통해’ 한반도를 독립시킨다는 안이 결정된 바 있었다.
1945년2월 얄타 회담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는 기본 구성안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얄타에서 미 대통령 루스벨트는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이 20~30년간 한국을 신탁통치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소련 수상 스탈린도 신탁통치라는 기본 구상에 동의했다.
1945년12월, 이 같은 방침에 따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구체적인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확정되었다.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발표된 ‘한국 문제에 관한 4개 항의 결의서’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민주주의 원칙 아래 독립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다.
둘째,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셋째,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 정부가 공동으로 조선을 최장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3상회의에서 미국은 국제연합(유엔)에 의한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제안했고,
소련은 임시정부 수립 후 이를 통해 4개국이 원조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 두 가지 방안을 절충한 것이 4개 항의 결의서였다.
이 결의안에서 통일 임시정부 수립 방안은 민족의 분단을 저지하고, 경과에 따라 신탁통치를 완화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장치로 활용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3상회의의 결과가 처음 국내에 알려지는 과정에서 임시정부 수립 방안보다 신탁통치안이 최대 쟁점으로 부각되면서 각 정파와 국민들은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다.
우익 진영은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이 소련의 적화야욕에 따라 제2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길이라고 선전하며 곧바로 신탁 반대 운동에 들어갔다.
찬탁론자는 곧 반역자로 규정되었다.
1946년 2월 17일,귀국한 중경 임시정부의 한국독립당과 한국민주당 등은
신탁통치 반대 비상국민회의(이하 국민회의)를 결성하는 등 반탁 운동을 통해 우익 세력의 정치적 결속을 강화해 나갔다.
좌익은 초기에는 반탁 입장이었으나, 임시정부 수립안에 무게중심을 두면서 결국 3상회의의 결정안을 총체적으로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1946년2월 15일,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 세력은 우익 세력의 국민회의에 맞서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을 발족시켰다.
이후 좌익과 우익은 각각 민전과 국민회의를 중심으로 찬탁과 반탁으로 격렬히 대립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미소 공동위원회의 주된 과제는 한국 내 정당, 사회단체와 협의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 임시정부가 참여한 가운데 4개국 신탁통치 협약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임시정부 수립의 협의 대상인 정당과 사회단체를 어떻게 선정할 것인지를 놓고 미국과 소련이 팽팽히 맞서면서 회의는 처음부터 난항을 겪었다. 협의 대상으로 참여할 정당과 사회단체는 임시정부 구성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될 것이 자명했고, 이에 따라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두고 미국과 소련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3상회의의 결정안에 반대한 정당, 단체와는 협의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이에 반박했다. 결국 양국은 4월 18일 ‘3상회의 결의에 지지를 표명하는 서명을 하면, 반탁 행위를 했더라도 임시정부 수립의 협의 대상으로 삼겠다’라는 취지의 공동성명 5호를 발표하면서 서로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우익의 한국독립당은 협의 참가는 곧 신탁통치를 인정하는 것이라며 협의에 참가할 수 없다며 반발했고, 한민당도 협의는 가능하지만 신탁은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가 4월 27일 특별성명을 통해 ‘서명한다고 해서 그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신탁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자, 우익 진영은 공동성명 5호를 지지하는 입장을 천명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련이 “하지의 성명은 공동성명 5호의 합의 내용에 벗어난다.”라며 반박했다.
특히 소련은 미국이 남한 쪽의 협의 대상으로 제시한 20개 정당, 사회단체 가운데 민전 소속 정당, 단체는 세 개뿐으로 나머지는 3상회의의 결정을 반대하는 우익 세력이라는 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와 조선부녀총동맹, 전국농민조합총연맹 등의 단체들이 제외되어 있다는 점을 문제시했다. 미국은 소련이 제시한 북한 쪽 협의 대상에는 우익 단체가 포함되지 않았으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등은 파괴적 폭력 단체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미국은 또 38도선 철폐 문제와 남북 간 경제적 통일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의했고, 이에 대해 소련은 미소 공동위원회의 설립 목적에 벗어나는 문제라며 거부했다. 미소 양국의 이견은 끝내 좁혀지지 않았고, 이에 따라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는 5월 6일 휴회 상태에서 결렬되었다.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우익에서는 반공, 반탁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승만은 6월 3일 “무기 휴회된 미소 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미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졌으니,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나 위원회를 조직해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해야 한다.”라며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반면 좌익의 민전에서는 6월 10일 6·10만세운동 기념 시민대회 등을 통해 미소 공동위원회의 재개와 이를 통한 통일국가 수립을 촉구했다.
좌우 대립이 격화되고 단독 정부 수립 주장까지 나오자 여운형과 김규식은 7월 하순 남북 분단을 막고 중도적인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 좌우익 인사 다섯 명씩으로 좌우 합작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이어 10월에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좌우합작의 임시정부 수립, 미소 공동위원회 속개, 토지 개혁과 중요 산업 국유화, 친일파 및 민족 반역자 처벌조례 성안 등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했다
.
하지만 미 군정이 12월 좌우 합작위원회와 한민당 인사를 중심으로 하고 김규식을 의장으로 하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구성하자, 여운형을 비롯한 중도 좌파는 남한만의 입법기구 조직에 반대하며 좌우 합작위원회에서 탈퇴했다.
미 군정은 지역 유지들의 간접 선거를 통해 우파 중심의 입법의원을 구성한 데 이어
1947년 2월에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하고,
5월 17일에는 남조선 과도 정부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앞서 입법 의원들은 1월 신탁통치 반대 긴급결의안을 채택하고,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5월 21일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협의 대상의 좌우 비율 문제 등으로 미국과 소련은 또 다시 신경전을 벌였다.
소련은 남한 측 등록단체 425개를 118개로 줄이고, 반탁운동을 벌이는 정당, 단체를 협의 대상에서 제외할 것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반탁운동은 표현의 자유’라는 입장을 거듭 밝히며 이를 거부했다.
소련은 미국이 제안한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4개국 회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미국은 소련의 반대 속에 한반도 문제를 미국을 지지하는 세력이 우세한 국제연합으로 넘겼다.
결국 10월 21일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는 최종 결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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