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시영 2019.11.17.화요일,맑음
이시영 (생졸;1869.12.3-1953.4.17)은 서울 저동에서 태어났다.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이며,부친은 우찬성․이조판서 유승이며,어머니는 동래 정씨로 이조
판서 순조의 딸이었으니 당대에도 명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다.
6형제 가운데 다섯 째로 태어난 이시영은 첫 부인으로 영의정 김홍집의 딸을 맞았으나 사별하고, 반남 박씨를 둘째 부인으로 맞았다.
이시영은 일찍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하였고, 소용돌이치는 한말 정국 속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1885년(고종 22),
만 16세 되던 해진사가 되고 동몽교관에 임명된 뒤, 18세에 형조좌랑를 역임하였다.
1891년,
만 22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로는 홍문관교리‧승정원부승지‧궁내부수석참의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즉 10대 후반부터 20대 전반 사이에 주로 궁궐 안의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것이다.
1895년,
관직을 물러나 10년 동안 자신을 가꾸었다.
중형 이회영을 비롯하여 이상설과 같은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근대학문의 탐구에 몰두한 것이다.
1905년,
그는 다시 관직에 나선 시기는 관직을 물러난 지 10년 지난 시기였다.
이번에는 외부 교섭국장에 임명되자 마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이른바 을사 보호조약이라는 것이 강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시영은 이것을 막아내야 한다고 작정하고,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일제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강하게 요구하였다. 그렇지만 박제순은 을사조약을 받아들였다.
이에 비감해진 선생은 교섭국장직을 사직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집안은 박제순 집안과 절교를 선언하였다.
당시 그의 조카와 박제순의 딸이 약혼한 상황이었는데, 을사조약 체결에 박제순이 동의하자 즉각 혼약을 파기하고 절교해 버린 것이다.
이시영이 외부 교섭국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약 강제체결을
막지 못함에 따른 충격은 매우 컸을 것이다.
1906년,
만 37세로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된 것이다.
당시 평안남도가 얼마나 중시되던 지역이었는지를 고려한다면 그에 대한 고종황제의 신망은 대단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지에 부임하여 근대학교 설립 및 구국계몽운동 확산에 힘을 쏟았다.
1907년,
중추원 칙임의관이 되어 상경하고,
형인 이회영을 비롯하여 안창호․전덕기․이동녕 등이 신민회를 비밀리에 조직하고 국권회복운동에 나섰을 때, 선생은 관직생활을 하면서도 이에 참가하였다. 이 사실은 나라를 잃자마자 해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에 동참한 것이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신민회 지도자들은 계몽운동만으로 독립을 찾을 수 없다는 현실을 바로 인식하면서, 계몽운동에 의병항쟁의 방략을 도입하였다. 1900년대에 의병항쟁을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방략이라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계몽운동가들 가운데, 신민회 그룹은 무장항쟁의 방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의병처럼 준비되지 않은 전투가 아니라,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밀고 나가기 위한 군사력 양성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틀을 잡아 나갔다. 이를 위해서는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전략이라고 판단한 신민회는 일제 강점에 들기 전부터 만주지역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를 잃자마자 만주로 망명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여기에서 망명이란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고 떠난 길이다. 눈 질끈 감고 일제에 적당하게 타협하고 살면 조상 대대로 누려온 권리와 명예를 고스란히 누릴 수도 있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두 포기하고 떠난다는 말이다. 가는 길이 험할 뿐만 아니라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는 길이었다. 그러므로 사실상 대가족이 모두 망명길에 오른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명문거족이나 권문세가 출신으로 다수가 망명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회영과 이시영 선생 형제 일가 50여 명이 만주로 망명한 사실에 대해 박은식은 ‘명문거족 가운데 유일한 경우’라고 평가하였다.
1908년,
한성 재판소장․법부 민사국장․고등 법원판사 등 법부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1910년 말,
이시영은 형제들과 더불어 가재를 처분하여 재원을 마련하고,서간도로 출발하였다.
그들이 정착한 곳은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였다.
1911년4월에,
일행이 도착한 직후대고산에서 노천 군중대회를 개최하여 교육진흥 및 독립군양성을 표방한 경학사와 신흥 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전자는 동포사회의 자치기관이요, 후자는 인력양성기관이었다.
독립전쟁을 일으키자면 군대가 필요하고, 또 그것을 조직하고 운영하자면 인력과 재력이
필요했다. 우선 동포사회를 구성하여 인적 자원을 확보하고, 근거지를 마련하여 정착지를
갖춰야 했다.
경학사의 결성은 곧 동포사회의 형성과 운영을 이끌어 가는 데,
또 신흥강습소는 인력, 특히 군사력을 양성하는 데 목표를 둔 기관이었다.
경학사의 기능은 부민단과 한족회로 계승․발전되어 갔고,
신흥강습소는 신흥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로 발전되어 가면서 독립군기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이 당시 경학사 초대사장에는 이상룡이, 신흥강습소 초대교장에는 이동녕이 추대되었지만, 이시영 형제들도 모두 여기에 참가하면서 국내에서 마련해 간 재원을 쏟아 부었다.
이들의 활동에는 머지 않은 장래에 러.일전쟁이나 중.일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예상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이시영이 참가한 독립군기지 건설이 허망한 사업이 아니었음이 증명되었다.
바로 1920년의 청산리대첩이 그를 확인시켜준다. 그 날의 승리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누리던 온갖 특권을 버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망명길에 올랐던 이유와 그곳에서의 노력이 하나의 결실로 나타난 것이 청산리 승전이었기 때문이다.
이시영은 망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원세개에 주목하기도 했다.
이시영은 1913년 9월에 북경으로 갔다.
국내에서 이미 잘 알고 있던 원세개를 이용하여 한‧중연합전선을 결성해 보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북경행이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원세개가 사망하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던 그 무렵에 그기 자리잡은 남만주 서간도 지역에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1919년2월1일자로 발표된 이 선언에는 남만주 일대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활동하던
주역들이 서명하였는데, 이시영도 이상룡․이동녕․김동삼 등과 여기에 참가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한성정부를 비롯하여 국내외 곳곳에서 수립 선포된 정부마다 선생을 법무총장이나 재무총장 등 중요한 각료의 한 사람으로 기록했던 이유가 모두 이러한 활동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독립운동에도 변화가 예상되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가 닥치고 이와 함께 독립의 기회가 나타나리라는 기대감에 독립운동가들도
정세변화에 온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시영은 바로 그 시기에 북경에 가 있었고, 따라서 3․1운동 소식을 들은 곳도 바로 북경이었다. 당시 북경에 머물렀던 이유는 고종 황제를 망명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정세변화에 맞는 돌파구를 마련하려던 활동의 하나였다.
그러다가 고종의 사망과 3․1운동 소식을 듣게 되었다.
거족적인 항쟁 소식을 듣자마자 당시 북경에서 활약하고 있던 이회영과 이동녕 및 이광과
함께 상해로 갔고, 그곳에서 4월10일에 열린 회의에 참가하였다.
29명의 독립운동 최고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다음 날 아침까지 열린 이 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 결정되었으니, 결국 제헌회의에 참가한 셈이 되었다.
이후에도 2회(4월 22-23일)와 3회(4월 25일) 의정원 회의에 참가하였다.
4월 13일에 임시정부의 수립이 선포되고, 다음 날 위원제가 실시되면서 법무총장을 맡았고, 당시 법무위원으로는 남형우․김웅선․한기악이 임명되었다.
이시영이 법무총장을 맡은 시기는 5월 10일까지 짧은 기간이었고,
9월 15일부터는 재무총장을 맡아 임시정부의 자금 관리를 도맡았다.
특히 이 시기에 대다수 총장들이 아직 상해로 부임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담당한 역할과
위상은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안창호가 임시정부에 도착한 5월 이후 일단 임시정부는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체제를 갖추어 갔다. 그러나 1920년 중반을 넘어서면서 임시정부는 서서히 활력을 잃어갔다.
베르사이유 체제가 형성되면서 독립의 기회가 멀어져 갔고, 국내와 임시정부를 연결하던
연통부와 교통국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위기에서 이시영은 임시정부를 지켜내는 데 매달렸다.
여기에 두 가지 사례가 있다.
하나는 이승만 임시대통령의 상해방문 직후의 공황기를 버텨내는 데 기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립전쟁 준비방략을 추진한 한국노병회에 참가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1920년 후반에 들면서 침체기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12월에 이승만 임시대통령이 상해에 도착하였지만, 문제가 해결되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불거져 갔다.
그러다가 1921년 5월에 이승만이 상해를 떠나 버린 뒤, 임시정부를 지켜나간 인물은 신규식과 이동녕 및 선생이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국제전이 일어날 때까지, 즉 독립의 기회가 올 때까지 확실하게 전쟁을 준비하자는 노력이 1922년10월 한국노병회 결성으로 나타났는데,
이시영도 여기에 참가하여 통상회원으로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이후 임시정부에서 이시영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1930년1월25일에 상해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이다.
1926년부터 민족유일당 운동이 전개되다가
1929년 말에 좌파의 이탈로 좌우합작운동은 일단 중단되었다.
더구나 좌파가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결성하자, 임시정부를 유지하던 우파 인물들이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나섰는데, 이시영은 28명의 발기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이어서 이봉창․윤봉길 의거 등 한인애국단의 항쟁이 줄을 잇는 무렵에는 미리 항주로 이동
하여 임시정부 요인들의 피신처를 준비하는 역할을 맡았다.
1932년4월29일,
윤봉길 의거가 있은 직후에 임시정부는 일제의 추격을 피해 항주로 이동하였다.
임시정부 최고의 시련기를 보내던 항주에서 한국독립당의 13명 이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또 1933년에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법무장)으로 활약한 모습이 확인된다.
즉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요, 그 정부의 유일여당인 한국독립당의 이사를 맡아 항주와 가흥 일대에서 김구와 더불어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1935년,
다시 좌우합작운동이 대두되고, 김원봉을 중심으로 조선민족혁명당이 결성되면서 임시정부는 해체 위기에 처해졌다. 그 위기를 지켜내기 위해 임시정부 지원정당으로서 남경에서 한국국민당이 결성되었는데,김구와 함께 주역이 되고, 조성환․양우조와 함께 감사를 맡았다.
이어서 그 해 11월에는 새로운 내각이 결성될 때, 그는 법무장에 선임되었다.
참고로 당시 내각진영을 보면,
이동녕(주석)․조완구(내무장)․김구(외무장)․송병조(재무장)․이시영(법무장)․조성환(군무장)․차리석(비서장) 등이었다.
따라서 임시정부의 법무장이요, 그의 여당인 한국국민당의 감사로 활동했다는 말이다.
이후 임시정부가 진강에서 장사․광주․유주․기강을 거쳐 중경에 도착할 때까지 임시정부의
법무장으로서, 그리고 임시의정원에서 경기도 출신 의원으로서 활약하면서 정부를 전시
체제로 바꾸어 나가는 데 힘을 쏟았다.
1934년,
'감시만어'라는 사론을 편찬한 일이 있다.
한국사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강조한 이 책은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항주로 피신한 시절인
1934년 3월 1일에 그곳에서 발간되었다.
‘절강성 어귀’에서 썼다고 밝혔으니 이시영이 활동하던 항주에서 쓴 것이 거의 분명하다.
이 책을 쓴 동기는 1933년 여름에 우연히 중국인 황염배가 쓴 '조선'이란 책을 읽게 된 데
있었다. “황염배의 글이 문체나 거친 말투나 허황된 표현이 많고, 마치 그가 일본인을 대신
하여 일본을 선양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고 지적하면서,
“군자의 의리로써 그의 실책을 힐책하고 나서 나의 관견을 덧붙일까 한다”라고 저술의 동기를 밝혔다.
중경에 도착한 뒤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을 축으로 활동하였다.
먼저 임시정부에서는 1940년 이후 해방을 던 1945년까지 줄곧 국무위원이면서 의정원 의원으로서 활동하였는데, 특히 재무부장을 맡던 기간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주로 중국국민당 정부로부터 지원되는 자금으로 운영되는 처지였지만, 갈수록 그 규모가 증
가하는 상황에서 전시체제에 맞는 재원조달과 지출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 상황에서 임시정부의 재무부장을 맡은 것이다.
한편 이시영은 의정원에서도 주로 재정분야를 담당하였다.
1942년10월부터 의정원의 제3과 분과 위원을 맡아 역시 재정분야를 담당했다.
다음으로 정당 활동 노선은 김구와 거의 같은 것으로 정리된다.
상해 한국독립당을 발기하고 이사로 활동한 이후,
남경 시절 한국국민당(1935)으로 연결되고, 다시 중경에 도착하면서 한국독립당(중경)으로 이어졌다. 중경시절의 한국독립당은 1940년 5월에 열린 우파 3당(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재건 한국독립당)의 통합체였다.
이 정당에서 주로 감찰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즉 중경에서 통합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자마자 선생이 감찰위원으로 선임되었고,
다시 1942년에 한국독립당이 중앙집행위원제로 변경되자 김구가 중앙집행위원장이 되고, 이시영은 감찰위원장을 맡았던 것이다.
한편 중국국민당 정부와의 외교문화활동에도 참가하였다.
중경에서 조직된 최고의 양국 우호단체가 한중문화협회인데,
1942년 10월 11일에 중경방송빌딩에서 창립되었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참가하였는데, 이시영․김규식․조완구․조소앙․박찬익․최동오 등과 중국의 손과․우우임․오철성․곽말약 등이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중경시절 그가 남긴 글에는 중경판 '독립신문'에 기고한 것이 있다.
1944년8월29일자 '독립신문'에 시림산인이란 필명으로 게재된 '담망국노얼'가 그것이다.
망국 당시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송병준․이용구 등 망국 원흉들의 매국 행적을 기록하고, 후손들에게 참고가 될 것 같다면서 1910년8월22일에 기초되고 8월29일에 선포된 이른바
'한일합병조약'을 제시했다.
해방을 맞아 중경을 출발한 선생은 상해를 거쳐 1945년11월23일에 임시정부 요인 제1진의 한 사람으로 환국하였다.
이시영의 바로 위인 넷째 형 이회영은 아나키스트가 되어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옥중에서
순국했다. 다른 네 형제도 중국 전역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세상을 떠났다.
만주로 떠났던 6형제 중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온 이는 이시영 선생 혼자였다.
환국 시기에 칠순인 이시영은 세상을 떠난 형제들을 생각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곤 했다.
고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선생은 세 가지 일에 힘을 쏟았다.
하나는 정치활동으로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으로 활약한 것이다.
둘째는 종교활동으로서 성균관 총재를 맡은 것과 대종교 활동에 진력한 것인데,
특히 대종교의 사교교질‧원로원장‧사교‧도형 등의 주요직책을 역임하였다.
셋째로 교육운동에 앞장섰다. 환국 직후부터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를 조직하여 신흥무관
학교의 건학이념 계승과 인재양성에 착수하여1947년2월 재단법인 성재학원을 설립하고,
신흥전문학관으로 발전시켜 1‧2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렇지만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일시 침체국면에 처하기도 하였으며, 그것이 오늘날의
경희대학교로 계승되었다.
귀국한 지 2년 가까이 지나면서 선생은 정치적 변신을 도모하였다.
우선 1947년9월 공직사퇴 성명을 발표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직을 사퇴하였다.
그리고 한 해 뒤인 1948년7월20일, 제헌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부산이 전시수도이던 시절인 1951년5월9일, 국회에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국정혼란과 사회 부패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대국민성명서'를 발표
하고 정부를 떠났다.
그리고 다음해인 1952년8월5일, 시행된 제2대 대통령 선거 때에는 야당인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시영은 1953년에 서거하였고, 장례는 9일간의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처음에 서울 정릉묘소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수유리에 있는 묘소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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