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정부 수립 2019.11.17.일요일,맑음
해방 직후 평양의 평남 건국 준비 위원회(위원장 조만식) 등 각지에 건국 준비 조직이 결성
되었으며, 이러한 조직들은 소련군의 명령으로 좌·우 합작의 '인민 위원회'로 개편되었다.
1946년2월,
북한은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를 구성하고 무상 몰수하여 무상 분배하는 토지 개혁과
주요 산업의 국유화,8시간 노동제 실시,남녀 평등법을 제정하였으며 이러한 개혁으로
친일파,지주,자본가,종교인,지식인 등은 상당수가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1947년2월,
북한은 공산주의 체제를 확립하여 갔으며,
북조선 인민 위원회는 1차 회의에서 위원장을 김일성으로 하여 결성되었다.
1948년9월9일,
김일성이 내각 수상에 취임하면서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선포하였다.
조선 공산당은 북조선 분국을 설치하고 소련군과 함께 들어온 김일성 등이 주도하여
신탁 통치를 반대하는 민족주의자인 조만식 등 을 제거하였다.
이후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북조선 공산당'으로 개편하고 북조선 공산당과 조선 독립 동맹을 개편한 조선 신민당이 합당하여 '북조선 노동당'을 창당하였다.
위원장으로는 김일성, 부위원장으로는 김두봉을 선출하였다.
1949년6월
'조선 노동당'은 북로당과 박헌영의 남로당을 합당하여 위원장으로 김일성이 선출되어
일당 독재체제가 확립되었다.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이승만은 정읍 발언에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
하였다. 이것을 미국과 한국 민주당은 지지하였고 대다수의 단체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중도 우파였던 김규식과 중도 좌파였던 여운형이 연합하여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
하였다. 좌우 합작 운동은 좌·우의 대립을 극복하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는 중도파의
의지와 조선 공산당 등 좌익 세력을 탄압하며 중도파 중심의 정계 개편을 구상하던
미군정청의 지원이 맞물리면서 진행되었다.
이후 좌·우 합작 위원회를 결성하고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다.
(1946. 10.)
하지만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 결렬로 미군청청과 우익 세력의 단독 정부 수립 지지가
이어졌고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좌·우 합작 운동은 좌절되었다.
이후 남·북한 총선거의 무산으로 남한만의 단독 선거 실시가 결정되었다.
이에 김구,김규식 등이 북한을 방문하여 남북 협상을 개최하였고(1948. 4.)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외국 군대 즉시 철수,외국 군대 철수 후 내전 발생 부인,조선 정치회의 구성 후
총선거를 통한 통일 정부 수립,남한 단독 선거 반대 등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5·10 총선거에 불참하며 통일 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좌절되었다.
1946년6월,
이승만 정읍 발언에 의하면
무기한 휴회된 미·소 공동 위원회가 다시 열릴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였으나 여의치 않게 되었다. 우리 남한만이라도 임시 정부 또는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도선 이북에서 소련이 물러가도록 세계 여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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