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수                  2019.12.18.수요일,맑음

김성수(생졸;1891년(고종 28) 9월9일~1955년2월18일)는

기업인,교육자,언론인,정치인,친일반민족행위자,3·1운동,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설립운동,

학도지원병,징병제,신탁통치반대운동,부산정치파동,성방직 사장,동아일보 사장,보성전문

학교 교장,제2대 부통령 이다.


1891년9월9일,

전라북도 고창에서 출생한 김성수는 호남의 거부였던 아버지 김경중과 어머니 장흥고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의 세 형은 모두 어릴 때 죽었으며, 3세에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 방직 사장·동아일보 사장·보성전문학교 교장·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및 평의원 등을

역임했으며,

광복 후에는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제2대 부통령 등을 지냈다.

1955년2월18일,

숙환으로 사망했다.


1897년 부터 한학을 배웠다.

1904년,

전라남도 창평에 사는 장흥고씨 고정주의 딸 고광석과 혼인하였다.

1906년,

처가가 있는 창평 영학숙에서 송진우와 함께 6개월간 영어를 배웠다.

1908년,

군산의 금호학교에 다니다 그해 10월 일본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했다.

1909년4월,

도쿄 긴조중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1910년,

졸업한 후 그해 4월 와세다대학 예과에 입학해서 이듬해 정경학부를 택해

1914년,

졸업하였다.

1915년4월,

귀국 후 양부 김기중의 후원을 받아 중앙학교의 채무를 갚고 경영권을 인수했다.

1917년3월,

중앙학교를 정규학교로 승격시키고 교장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인 1917년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인수해서 직포업을 시작했다.

1918년3월,

중앙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경영에 전념했으나 쇠퇴하여 경성방직 설립 작업에 착수했다.

1919년,

3·1운동 초기 계획에 참여했다.

그해 10월 경성방직 설립 인가를 받았다. 동아일보 설립을 주도해서

1920년7월,

동아일보 사장이 되었다.

1921년7월,

조선인산업대회 발기총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그해 9월 동아일보가 주식회사로 전환되며 취체역으로 활동했다.

1922년 1월부터,

동아일보를 통해 물산장려운동을 폈다.

1923년3월,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조선민립대학기성회 회금보관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24년4월,

동아일보 취체역을 사직했다가, 그해 9월 고문으로 복귀해서 10월 사장 겸 전무 겸 상무로 취임했다.

1927년10월.

사임했다.

1928년3월,

경성방직 이사에서 물러났다.

1929년2월,

자신과 양부 김기중 등 7명이 60만원을 출자해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했다.

1931년9월,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하고 이듬해인

1932년3월,

재정난을 겪고 있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해

1932년6월부터 1935년6월까지 교장으로 활동했다.

1935년3월,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의 관장 겸 이사로 추대되었고 11월 경기도가 사상 선도와 사상범의

전향 지도를 목적으로 조직한 소도회의 이사로 선임되었다.

1936년11월,

동아일보의 ‘일장기말소사건’ 여파로 동아일보 취체역에서 물러났다.

1937년5월,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해 7월 19일과 8월2일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경성방송국 라디오 시국강좌를 맡았다. 8월에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 9월에는 학무국이 주최한 전조선시국강연대회 일원으로 강원도 춘천·철원 등지를 돌아다니며 강연했다.

1938년6월,국민정신총동원연맹 발기인으로 참여해서 이사가 되었다.

같은 해 8월 경성부 방면위원,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개선위원회의 의례 및 사회풍조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39년4월,

경성부에 있는 중학교 이상 학교장 자격으로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참사를 맡았다.

1940년대에 학도지원병을 고무하고 징병제 참여를 독려했다.

1941년5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 및 평의원에 선임되었고 8월에는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위원 및 경기도위원을 맡았다. 9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에 참여해서 10월 감사가 되었다.

같은 해인 1941년 조선방송협회 평의원과 조선사회사업협회 평의원을 겸했다.

학교장 대표로

1943년11월8일,

국민총력조선연맹 등이 주최한 ‘출진학도를 보내는 밤’에서 학도지원병을 격려했고,

1943년12월17일,

학도지원병 예비군사학교 입소식에서 축사를 했다.

광복 후인 1945년9월4일,

조병옥,이인 등과 연합군환영준비회를 조직했다.

9월 8일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해서 군정체제를 수립할 때 한국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임명

되었다. 같은 해 10월 미군정청 한국인고문단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1946년1월,

동아일보 사장에 다시 취임했다.

같은 달에 송진우의 뒤를 이어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추대되었다. 그

해 2월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사임했다.

1947년1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김구, 조소앙과 함께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지도했다.

같은 해 2월 동아일보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49년2월,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을 통합한 민주국민당 창당을 주도하여 최고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7월 동아일보 고문이 되었다.

1951년5월,

국회에서 제2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의원을 탄압한 부산정치파동의 서막인 5ㆍ26 정치파동을 일으키자

이에 항거해 5월29일 부통령을 사임하였다.


김성수는

반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행적이 상세히 체록되었다.

1955년2월24일,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되었으나 친일 행적이 인정되어 2018년 2월 서훈이 취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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