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 이범석 작성일자; 2019.12.18.수요일,맑음
이범석(생졸;1900.10.20-1972.5.11)은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겸 군인이자 대한민국의 정치가 겸 저술가다.
조선 세종대왕의 5남이었던 광평대군의 17대손이며 이문하의 아들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개화 사상에 감화된 아버지 이문하는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켰다.
그러나,당시 20여세 되던 노비 정태규는 어린 주인집 장남 이범석과의 정이 들어 집을
떠나지 않고 거주하고 있었다.
노비가 아닌데도 집에 두게 되어 지탄을 받게 되자
아버지 이문하는 정태규를 오씨 성을 쓰는 대한제국 육군 참령의 대대에 병사로 넣어 주었다.
정태규는 이후 박승환 대대의 전투병으로 근무하며 군복 차림으로 종종 이범석의 집을 방문하곤 했다.
1907년8월1일,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로 군대 해산 명령이 하달되었다.
구한국 군대 해산령에 불복한 박승환 대대장이 자결하면서
대대 병력은 서울 시내의 일본 군대에게 돌격하여 교전 하였으나 사살 되었다.
일본군은 경성의 민가에 무차별 난입하여 구한국 병사의 색출 작업에 나섰고
이범석의 집도 들이닥쳐 수색하였다.
그날 초저녁 병정이 쓰러졌다는 마을 주민들의 아우성 소리를 듣고 누이 이씨와 함께 마을 어귀로 나갔다가
검은 바지에 붉은 동을 맨 군복 차림이던 정태규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정태규의 처참한 시신을 보고 그는 복수심에 불타 배일사상을 품게 되었다.
자신을 친동생처럼 보살피던 정태규가 정미7조약이 강요한 군대해산에 저항하다 참살되는 것을 보고
이범석은 항일을 결심하였다.
소하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는 집안에 훈장을 초빙하여 한학을 배웠다.
10세에 부친 이문하의 재혼으로 계모 김해 김씨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뒤 20년 연하의 이복 남동생 이범혁이 태어났다.
유년기의 이범석은 개구쟁이였으나,그를 독립 운동가로 키워 낸 것은 계모였다.
1915년,
16세이던 중학교 2학년에 해당하는 경성고보 시절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고등 보통학교 재학 당시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만주에서 신흥 무관학교와 북로군정서 등지에서 항일 독립 활동을 하였으며,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 뒤 소련과 만주과 만주에서 활동하던 중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의 중장으로 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 등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직후 귀국을 시도했지만 강제로 상하이에 억류 조치 처분 되었다가
1946년 귀국하여 안호상과 함께 '조선 민족 청년단'을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반공 주의 정치 활동을 하였다.
김구의 남북 협상에 반대하여 이승만에게 협력,단독 정부 수립에 동참하여
1948년7월31일에서 1950년4월20일까지
제1대 대한민국구 국무총리를 역임하였고,8월15일부터는 국방부 장관도 겸임하였다.
이후 중화민국 주재 대사와 내무부 장관을 거쳐
1952년,제2대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고,
1956년,제3대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이승만의 견제로 낙선하였다.
1960년 이후에는,야당 정치가로 활동하다가 탈당,국토 통일원 고문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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