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익희 2019.12.18수요일,맑음
신익희;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내무총장, 국회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
생졸; 1894년(고종 31)-1956년
본관; 평산
호; 해공
출생지; 경기도 광주
신익희는 조선시대 판서를 지낸 신단의 여섯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내무차장·외무차장 등을 역임했고, 귀국 후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어려서 사서삼경을 비롯한 한학을 익혔고,
1908년 관립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유학하였다.
유학 시절 '학지광'이라는 잡지 발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1913년, 와세다 대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17년부터는 보성 전문학교의 전신인 보성 법률고등학교에서 비교헌법 등의 강의를 맡기도 하였다.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원칙이 발표됨과 더불어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만주·북경·상해 등지를 드나들면서 해외독립운동원과의 연락을 맡아보고,안으로는 민족지도자들과 독립
운동의 방법을 토의하여 3·1운동의 도화선을 당기는 데 일역을 담당하였다.
만세 시위에 가담했던 그는 1919년 3월 다시 상해로 떠나 그로부터 26년간의 망명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상해에서 일본 유학생 친목단체인 '유일학회친목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상해에 있는 동안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기초하고 임시 정부의 초대 대의원과 초대 내무차관을 지냈으며,
그 뒤 내무총장·법무총장·문교부장·외무부장 등을 두루 맡았고 국무원 비서실장과 의정원 부의장을 겸임
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에 몸담기 시작하면서부터, 독립 운동이 처음에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시작되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군사 행동에 의하여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임시 정부에 있으면서도, 정부는 상징적인 것에 불과할 뿐 실력은 저항군에 있다는 믿음 아래,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한국청 년들에 의한 군대 조직을 시도해 보기도 하고,
당시 상승기에 있던 중국 혁명군과 연결하여 한중합작에 의한 군사행동의 실현을 추진해 보기도 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광복 이후 1945년9월, 조선 인민공화국 내각이 편성되자 신익희는 내각의 체신부장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1945년12월, 임정 요인의 한 명으로 귀국한 그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만들어 부회장을 맡았으며,
국민대학 학장과 자유 신문사 사장직도 맡았다.
당시 신익희는 귀국 후,김구 등 임시 정부 계통과는 노선을 달리하여 정치 공작대·정치위원회 등을 조직
하여 이승만과 접근하였다.
그 뒤 미군정하의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의장을 거쳐, 정부 수립과 함께 제헌 국회에 진출하였고,
대통령으로 뽑힌 초대 국회의장 이승만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1947년,지청천의 대동청년단과 합작해 대한국민당을 결성하고 대표 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950년, 한국 민주당과 합당, 개편된 민주 국민당의 위원장으로 뽑혔다.
그동안 그는 3선 국회의장으로 정치적 비중을 더해갔으며,
권력의 연장을 위하여 사사오입개헌까지 자행한 이승만한테서 민심이 등을 돌리자,
1955년, 장면,조병옥 등과 민주당을 창당하였고,
1956년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다.
1956년5월2일,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그의 유세에는 무수한 인파가 모여 그의 인기를 실증하였다.
사흘 뒤인 5월5일, 호남 지방에서의 유세를 위하여 전주로 가던 중 기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에게는 추모표로서 185만여 표가 던져졌으며,
1956년5월23일,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서울 우이동에 안장되었다.
1962년3월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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