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붕                          2019.12.18.수요일,맑음

이기붕(생졸; 1896년-1960년)은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태종 이방원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 의 17대손이며,아버지는 예조판서 이회정의 손자

이낙의다.

부인 박()마리아와의 사이에 이강석,이강욱 두 아들을 두었다.


해방 후 이승만의 비서를 지냈고,서울특별시 시장,국방부 장관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을 창당하였고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사사오입을 강행하다

4·19 혁명이 일어나자 전가족이 자살하였다.


1915년,

서울의 보성 학교를 졸업하고 연희 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정 형편으로 중퇴 하여

선교사 무스의 통역으로 있다가 그의 도움으로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3년,

아이오와주 패사디나시에서 고학으로 데이버 대학 주립대학의 문과를 졸업한 후 뉴욕에서 허정 등과 함께 '삼일신보' 발간에 참여하다가 1934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허정과 충북 영동의 광산에 투자하여 광산 사업을 했다.

광복 후,

미군정청에 들어가 군정 재판장의 통역을 역임하고, 민주의원 의장 이승만의 신임을 받아

비서가 되었다.

1946년,

대한 기독청년회,대한 적십자사 등의 이사를 역임하면서 사회적 발판을 다졌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로서 정치적 기반이 굳혔다.

1949년,

서울특별시장,

1951년4월,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어 신성모 국방부 장관 시절에 발생한 ‘국민 방위군 사건’을 수습했다.

12월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자유당을 창당하여 발췌 개헌안 통과를 담당하였다.

1952년,

대한 체육회장이 되었고,

1953년,

대한 올림픽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어 국제 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 진출하였으며,

한미재단 한국 사무소장직도 역임하였다.

1953년,

이승만의 자유당 내 족청계 제거 지시에 따라 자유당 총무부장을 맡아 박용만 조직부장 등과 함께 이를 추진하였고 12월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올라 자유당의 제2인자가 되었다.

1954년3월,

제5차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자기 중심의 당편제를 완료,

5·20총선에서 대승을 거두고 무소속을 포섭하여 재적 3분의 2를 넘는 137석을 확보하여

제2대 민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자유당의 헌법 개정을 바탕으로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위하여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의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발의하였다가 1명이 미달되어 일단 부결되었으나,

바로 다음날에 사사오입을 통해 이를 번복,가결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같은 해 인하공과 대학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56년,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부통령에 입후보 하였다가 낙선하였으나

제3대 민의원의장에 선출되었다.

1958년,

경기도 이천 선거구에서 제4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고 제4대 민의원 의장이 되었다.

1960년3월15일,

제5대 정·부통령선거에서 자유당의 공천으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는 4·19혁명으로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960년4월28일,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함께 붕괴되고,

이기붕 일가는 경무대 관사 36호실에 피신하여 있다가 맏아들 강석의 총격으로 집단 자살

하였다.

그가 살던 서대문의 집은 '4·19 혁명 학생 도서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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