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면             2019.12.20.금요일,맑음

장면(생졸; 1899년8월28일-1966년6월4일)은 서울에서 태어나 국회의원,주미대사,국무총리,부통령에 역임한 정치인이며,

재임 중 민주당 전당대회 저격 사건, 3·15부정선거, 4·19, 5·16,이주당 사건 등을 접하게

되었다.

1899년8월28일,

장면은 서울 종로구 적선동 외가에서 해방 이후에 부산 세관장으로 재직한 장기빈의 7남매맏이로 태어났다.8세에 인천 성당이 운영하는 박문 학교에 입학하여 한학을 수학하였다.

1913년,동성 상업학교에 부임,

1917년,수원 고등 농림학교(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전신)를 졸업하고,

1919년,서울 기독교 청년회관 영어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25년, 한국 천주교청년회 대표 자격으로 미국 맨해튼 가톨릭 대학을 졸업 후 귀국하여,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교회일과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활동하다가 해방 후 정계에

   입문했다.

1936년,

동성 상업하교 교장과 계성학교의 교장직도 겸임하여 광복 때까지 근무하였다.

1933년,

천주교 서울교구에서 발행한 월간 잡지 '가톨릭 청년'의 편찬위원을 맡기도 했다.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 회장이 되어 '구도자의 길','조선천주공교회약사','교부들의 신앙' 등의

   저서를 출판하였다.

1946년,

정계에 투신,민주의원과 과도 입법의원의 의원을 역임하면서 좌익과의 투쟁, 군정 당국과의 절충,미소 공동위원회에 대비한 정책 수립 등의 활약을 하였다.

1948년,

서울 종로 을구에서 제헌 의원으로 당선되고,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조병옥,장기영 등과 한국 수석 대표로 참석,

총회에서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 부라는 국제적 승인을 얻어냈다.

이어 대통령 특사로 교황청을 방문, 돌아오는 길에 맨해튼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49년,

초대 주미 대사로 임명되고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 한국 파병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50년에서 1952년4월23일까지 

제2대 국무총리가 되었으나 자유당에 맞서 야당 정치인으로 부통령에 당선되어 역임했다.

1951년, 대통령 이승만의 권유로 국무총리가 되었으나 이듬해 사임하였다.

   이후 야당의 지도자로서 자유당 독재 정권과의 투쟁에 앞장섰다.

   또한,로마 교황청 비오12세로부터 성신 베스터 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1955년,신익희,조병옥 등과 민주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이 되었고,

1956년8월15일부터 1960년4월25일까지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가 사망한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9월의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저격 당하였으나 경상에 그쳤다.

1959년,

민주당의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60년8월19일부터 1961년5월17일까지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의원 내각제 하에서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2공화국의 국무 총리로서 대통령 윤보선과 함께 내각 수반으로써 제7대 국무 총리로 역임

하였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선거 1개월을 앞두고 사망함으로써 다시 한번

부통령 후보로 선거에 임했다.

3·15 부정 선거로 인하여 이기붕 자유당 후보에게 낙선하였다.


집권 후 민주당의 구파가 신민당을 창당, 이탈해나가는 어려움을 겪었다.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던 정책이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여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 9개월 만에 실각하였다.


그 뒤 군사 정권의 정치 정화법에 묶여 연금 생활을 강요당하고,

세칭 '이주당 사건'인 반혁명 음모 사건에 연루,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석방된 뒤 5년간 신앙 생활을 하다가

1966년6월4일,

지병인 간염으로 사망하여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어 포천 가톨릭 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면에 대한 평가는

정치사적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로 의원 내각제를 실시하였다는 점과

4·19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속에서 민주적 선거 절차를 통해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리더십 측면에서 ,

체제 정당화와 정권유지와 관련된 정치적 안목과 기술 그리고 엘리트 장악력이 부족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그의 이러한 단점이 5·16의 한 원인이 된 것으로도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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