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합 야당 신민당 발족 2019.12.24.화요일,맑음
1967년2월27일,
1967년의 제6대 대통령 선거와 제7대 국회위원 총선거를 앞두고,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민주국민당,민주당,신민당,민정당,국민의 당,자유민주당,민중당,
신한당 등 분열된 보수 야당 세력을 정권 교체를 이룩할 목표로 다시 통합되어 신민당으로
창당되었다.
신민당은 반독재와 평화적 정권교체 등 2대 투쟁 목표를 내걸고 제1야당의 지위를 확보하여,
여당인 민주 공화당과 정치 투쟁을 전개하였다.
1967년,1971년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와 제7~10대 국회의원 총선거,
1969년의 3선 개헌 저지 투쟁을 벌였다.
1967년,제6대 대통령선거전에서 패배한 윤보선이 당1선에서 물러나자,
신민당은 유진오 총재의 영도 아래 구민중당계가 주도권을 잡았다.
1969년9월7일에는 3선 개헌안 부결을 위하여 소속 국회의원의 의원직 자동 상실을 노리고
당해체를 결의하였으나, 9월20일 다시 창당 절차를 밟음으로써 원상을 회복하였다.
1969년 말 유진오 총재가 사퇴하자,
1970년1월, 유진산이 당총재로 추대되었다.
1970년9월,1971년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1971년, 여당의 박정희 후보와 치열한 선거전을 벌였다.
그 후 신민당은 진산계와 반진산계로 양분되어, 당권의 정통성 문제로 법정투쟁을 벌이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1972년,10월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된 후,
1973년1월, 반진산계의 양일동,윤제술,유청 등이 신민당을 탈당하고 민주통일당을 창당
함으로써 또다시 통합 야당은 분열되었다.
1974년4월, 유진산이 죽자 8월에 김영삼이 총재가 되었으나 당내 파동으로 실권하고,
1976년5월, 이철승이 당권을 장악하여 온건 노선을 지향하였다.
1978년12월12일에 실시한 제1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신민당이 유효득표수에 있어
여당인 민주 공화당보다 1.1%나 앞서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약 3년 만에 다시 당권을 잡은 김영삼은 더욱 대여 강경 노선을 취하여 국회의원
제명 처분을 받았다.
1979년,10.26 사태로 박대통령의 사망으로 김대중이 복권되자,신민당 내부는 김영삼계와
김대중계로 분열 대립하는 와중에서
1980년10월27일, 공포된 제5공화정 헌법에 의하여 다른 정당과 함께 자동해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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