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쌍용 자동차 농성 사태 2020.02.16.일요일,맑음
쌍용차 사태는
2009년5월22일부터 8월6일까지 약 76일간 쌍용자종차 노조원들이,
사측의 구조 조정 단행에 반발해 쌍용자동차 평택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민주노총 쌍용차 지부의 지부장인 한상균을 비롯한 64명의 노조원들이 구속
되었다.
쌍용 그룹은 본래 1970~80년대에 10대 재벌에 속할 정도의 대기업이었으나,
1997년의 IMF 구제 금융 사건 사태 이후 쌍용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쌍용 자동차가
그룹 정상화를 위한 구조 조정 과정에서
2004년10월28일,
최종적으로 중국의 상하이차가 5,900여 억원에 쌍용차의 지분 48.9%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채권단과 상하이차 간 쌍용차 매각 본계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지속되는 판매부진과 경기 악화로 악화되자,
노조와 경영진은 주택 융자금.학비 보조금 등 일체의 복지 혜택을 사측에 반납하는 한편,
2008년12월17일부터 약 2주간 공장 가동을 중단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2008년12월23일,
상하이차가 돌연 노조 측의 구조 조정 거부를 명분으로 철수를 시사하면서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쌍용차 경영진은 2대 주주인 산업은행과 정부에 유동성 공급을 요청했으나,
산업은행과 정부는 상하이차의 지원이 우선되어야 한다며 거절했다.
2009년1월9일,
쌍하이차는 쌍용자동차의 법정 관리를 신청하고 쌍용차의 경영권을 포기하였다.
상하이차는 경영권을 인수한 4년간 단 한 푼의 투자도 하지 않았으며,
애초 매각 협상 시 합의한 기술 이전료 1200억원 중 절반인 600억원만 지불한채 ,
쌍용 자동차의 라이브리드 엔진 기술 및 핵심 연구원들을 중국 현지 본사로 빼돌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09년4월14일,
인력 감축안이 발표되자 쌍용차 노조는 조합원 84%의 찬성으로 부분 파업에 돌입했고,
2009년5월21일,
공장을 점거하고 총파업에 돌입하게 된다.
2009년5월5월31일,
사측이 노조가 점거중인 쌍용차 평택 공장의 직장 폐쇄를 감행한다.
이후 노조와 사측은 대화와 협상을 거듭했으나,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9년7월6일,
법원이 평택공장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했고,
2009년7월20일,
경찰이 공장을 점거중이던 노조원들의 강제 해산 방침을 발표하고 본격적으로 공권력이
투입이 되었으나 공권력 투입에 반발한 공장 내 노조원들의 불법 무기 사용에
경찰이 최루액과 테이저건 등을 통하여 대응하는 등 대치 상황이 지속되었다.
2009년8월4일과 8월5일,
이틀동안 경찰이 진압 작전을 펼치면서 거의 모든 공장을 장악했고,
2009년8월6일,
노조와 사측이 마지막 협상을 타결하게 되면서 77일간의 공장 점거 총파업이 끝나게된다.
이 사건으로 노조원 90여명이 경찰에 연행되거나 구속되었으며,
경찰관 1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측은 파업으로 인하여 3000억원의 손실액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노사간 타협을 통해 48%는 무급 휴직,순환휴직,영업직 전직으로 구제하고,
나머지 52%는 희망 퇴직,분사 등을 하기로 했다.
파업에 참여한 인원 중 400여명은 무급 휴직을 받았으며,
마지막까지 농성을 이어간 200여명은 해고되었다.
2009년9월8일,
쌍용자동차 노조는 민주노총을 탈퇴하였다.
2010년11월,
쌍용자동차는 기업 회생 절차를 거처서,
매각 협상 우선 협상 대상자인 인도의 자동차업체 마힌드라&마힌드라와 인수 협상을 채결하면서 2011년에 쌍용 자동차의 기업 회생 절차가 종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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