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 조선 건국           작성일자; 2020.04.14.화요일.맑음

 

BC195년,중

국의 연왕 노관이 한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지방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 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위만도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을 박사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BC194년,

위만은 자신의 세력을 모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워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으니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 조선이라고 부른다.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로 가서 한왕이 되었다.

 

중국의 문헌들에는 성을 위(衛)라고 했으나 '삼국유사'에는 위(魏)로 되어 있다.

BC206년,

중국의 통일 제국 진(秦)이 멸망하고 한(漢)에 의해 다시 통일이 이루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유이민이 파상적으로 요동과 한반도에 유입되었다.

한이 중국을 통일한 뒤

건국 과정에 적극 참여했던 노관은 이성(異姓) 제후 7명의 한 사람으로

연왕(燕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곧 이성 제후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가해지면서 노관은 흉노로 망명했고,

연나라 지역은 한군(漢軍)에 의해 점령되어 혼란이 초래되었다.

이때 위만은 자신이 거느리던 무리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에 망명했다.

그 시기는 BC3세기말에서 2세기초로 추정된다.

위만은 고조선의 준왕에게 번병이 되기를 청하여

고조선의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일을 맡았고,

준왕의 신임을 얻어서 박사에 임명되었으며 100리의 땅을 받는 한편,

규(圭)도 하사받았다.

그는 차츰 유이민을 모아 자신의 세력을 기른 다음,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 한군이 공격해오니 왕을 호위하겠다고 거짓 보고하고

준왕을 쳐서 정권을 빼앗았다.

이때 준왕은 근신과 궁인을 이끌고 뱃길로 한으로 가서 한왕(韓王)이라고 칭했다.

 

위만은 이종족들이 중국의 변방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고

만이(蠻夷)의 군장이 천자를 찾아가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한의 혜제(惠帝:BC 195~188)와 고후(高后:BC 188~180) 때

한의 외신(外臣)이 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강화한 위만은

진번·임둔을 포함한 주변 지역을 복속시켜 사방 수천 리를 세력권에 넣게 되었다.

위만의 출신에 대해 중국 문헌은 모두 '연나라 사람'(燕人)이라 기록했다.

그러나 그가 망명할 때 '상투를 틀고 오랑캐의 복장'을 한 점을 들어

연나라 지역에 살던 고조선 계통의 인물로 보기도 한다.

머리카락을 틀어올리는 풍습은 동이족 이외에 다른 이민족에게도 있었던 것이며,

'오랑캐의 옷'[蠻夷服]이라는 것도

막연히 중국인의 복장이 아니었음을 말할 뿐이므로 명확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가 고조선의 왕위를 차지한 뒤 나라 이름을 계속 '조선'이라 했고,

고조선이나 진번 주민의 지지를 받았던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위만의 집권을 고조선 내에서의 단순한 정권 교체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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