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에 얽힌 숨겨진 사연          작성일자; 2019.07.29.월요일,맑음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족보가 가장 발달한 나라다.  원래 김씨였던 안동 권씨 

안동 권씨의 시조는 원래 신라 왕실의 후손인 경주 김씨였다.

서기 927년,후백제의 견훤이 927년 경주에 침입해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우자

안동에 살던 김행은 복수를 결심한다.

김행은 3년 후에 후백제군과 왕건의 고려군이 안동 지역에서 대치하자 

성주 김선평과이 지역의 호족 장정필과 함께 군사를 모아 

안동군 와룡면에서 견훤의 8000 대군을 함몰 시키는 큰 공을 세운다.

이 전투로 후삼국의 주도권을 쥐게 된 왕건은 김행에게 권씨 성을 내린 것이 안동 권씨의 시작이다.

 
고려는 성종2년(983) 권행,김선평,장정필 등 세 명을 기리기 위해

현재의 안동시 북문동에 삼태사묘를 세웠다.

천여 년이 지난 현재도 안동 권씨(시조)와 안동 김씨(시조),안동 장씨(시조)는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 파평 윤씨 시조 겨드랑이에 잉어 비늘

파평 윤씨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에 공을 세운 윤신달을 시조로 삼는데 잉어를 먹지 않는다.

여기에는 시조 윤신달과 그 5대손 윤관이 관련되어 있다.

경기도 파평(파주)에 살던 윤 온 할머니는

파평산 기슭의 용연이란 연못에서 금궤를 주워 열어보니 한 아이가 누워 있었다.

그 아이의 어깨 위에는 붉은 사마귀가 돋아 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잉어 비늘이 나 있었으며 발에는 황홀한 빛을 내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이 아이가 훗날 윤온 할머니의 성을 따서 윤신달이 된다.

파평 윤씨의 또 하나의 잉어 전설은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전설에서 유례되는데,

거란과 싸우던 윤관이 함흥 선덕진 광포에서 쫓겨 강가에 이르자

잉어들이 다리를 만들어주어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윤관이 영평(파평)백에 봉해짐으로써 파평을 본관으로 삼은 윤씨들은

잉어의 자손이자 윤관에게 도움을 준 데 대한 보답의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  자라를 먹지 않는 경주 이씨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사형 당한 이원의 모친은 사육신 박팽년의 딸이었다.

그의 부친 이공린이 혼례날 밤 꿈에 늙은 첨지 여덟 명이 절하면서

“우리들이 장차 솥에 삶겨서 죽게 되었는데,

만약 죽을 생명을 살려 주시면 후하게 은혜를 갚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놀라서 깨어보니 자라 여덟 마리를 막 국에 넣으려고 하므로 즉시 강물에 놓아 보내라고 명령했다.

이때 한 마리가 달아나자 어린 종이 삽으로 잡으려다가 잘못해 자라목을 끊어 죽이고 말았다.

그날 밤에 첨지 일곱 명이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꿈을 꾸었다.

결혼 후 이공린은 여덟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오·귀·원·타·별·벽·경·곤으로 지었다. 

꿈의 상서로움을 기념해 자라나 물고기와 관련이 있는

맹(맹꽁이)·귀(龜:거북)·어(魚:물고기)를 부수로 사용한 것이다.

사화로 희생된 이원이 어린 종에게 죽은 자라라고 해석되면서

꿈의 징험은 더욱 뚜렷해진 셈이 되었는데,

이긍익은 연려실기문에서 ‘지금도 경주 이씨들은 자라를 먹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 통혼 않는 김해 김씨,김해 허씨,인천(인주) 이씨

김해 김씨의 시조는 가락국의 김수로왕인데,

그 왕비는 멀리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 허황옥이었다.

그런데 김해 김씨는 김해 허씨,인천(인주) 이씨와 통혼하지 않는다.

장자 거등왕은 수로왕의 뒤를 이어 김해 김씨가 되었지만

김해 허씨 등은 어머니 허황후의 뒤를 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문적인 ‘금관고사급허성제문집’은 허황후는 일곱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 거등은 태자에 봉해졌고 차자는 어머니의 성을 좇아 허씨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형제간이기 때문에 통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씨가 포함 된 데는 신라 경덕왕 14년(755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고 알려지고 있는 허기와 관련이 있는데,

그는 안록산의 난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고 당나라 현종을 따라 촉나라로 피란했다.

난이 평정된 후 현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종성인 이씨 성을 하사했는데

이후 허씨는 이씨와 복성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인천 이씨는 양천 허씨에서 갈라진 태인 허씨에서 다시 갈라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양천 허씨의 시조 허선문은 원래 김해 허씨로,

왕건이 견훤과 싸울 때 군량을 공급한 공으로 공암(양천)을 식읍으로 받았는데,

여기에서 허사문을 시조로 하는 태인 허씨가 갈라져 나왔고,

태인 허씨에서 다시 이허겸을 시조로 하는 인천 이씨가 갈라져 나왔다.

이처럼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 인천 이씨 등은 모두 같은 시조에서 갈라진 한핏줄이며,

그래서 이들은 서로 다른 성씨에도 불구하고 가락 중앙 종친회에 함께 소속되어 있다.



☞ 결혼 금하는 청송 심씨와 나주 박씨 

청송 심씨와 나주 박씨는 원한 때문에 혼인을 거부하는 성씨다.

세종비 소헌 왕후 심씨의 부친 심온은 세종의 즉위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세종 즉위년인 1418년,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다가 그를 전별하는 거마가 장안을 뒤 덮었던 것이

상왕 태종의 심기를 건드려 화를 당한다.

태종은 심온의 동생 심정이 총제로 있으면서

‘금위 군사로 상왕(태종)과 주상(세종) 두 분을 호위하려니 숫자가 적다’며 불평한 것을

역모로 몰아 고문 끝에 심온을 끌어들인다.

귀국길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사형 당한 심온은,

이를 좌상 박은의 무고 탓으로 돌려 ‘이후로는 박씨와 혼인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두 집안이 혼인하는 예가 드물었는데,

사실상 심온을 죽인 인물은 박은이 아니라 태종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 당파 따라 옷고름 달리 매기도

조선 후기에는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로 다른 당파 끼리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당파에 따라 옷고름 매는 방법까지 달라 멀리서 봐도 서로 무슨 당인지 알 수 있을 정도 였다니

그 정도의 심각함을 알 수 있다.

 

1985년을 기준하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성씨는 총 275개, 본관은 3349본이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95%는 120여개 성씨 600여 문중에 속해 있으며,

나머지 150여개 성씨에 해당하는 인구는 총인구의 5%정도에 불과하다. 

다섯개 성씨 외에 100만명이 넘는 성씨는 없다.

첫번째는 많은 성씨는 본관을 고려 초기 부터 쓰기 시작한 김해 김씨다.

두번째는 밀양 박씨이고

세번째는 전주 이씨다. 

네번째로 경주 김씨

다섯번째는 경주 이씨다.

 

특이한 점은 많은 씨족이 신라,가야국,중국,일본,베트남,몽골 등에 원류를 두고 있다 것이다.

고구려나 백제 또는 발해에 원류를 두고 있는 씨족은 찾아 보기 힘들다.

이유인 즉,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백제인들은 그 땅에 살았으며,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고구려인들은 그 땅에 살며 발해를 건국하는 세력이 됐다.

발해가 멸망한 후에는 수십만 발해인들이 고려로 귀속돼 들어왔다.

현재 백제계라 주장하는 씨족은 '부여 서씨'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고,

발해계로 주장하는 씨족은 '영순 태씨'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고려에 의해 멸망한 신라 왕손들은

왕건의 호족 융합 정책에 따라 지배층의 지위를 계속 이어갔다.

왕건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고,

경순왕에게 자신의 장녀 낙랑공주를 시집보낸 뒤 경주를 식읍으로 줬다.

 

경주 김씨 족보는,

경순왕의 셋째 아들 김명종을 경주 김씨의 대표적 지파인 영분공파의 시조로 모시고 있다.  

왕건의 개성(송악) 왕씨는,

조선 개국 후 극심한 탄압을 받아 옥(玉)·금(琴)·마(馬)·전(田)·전(全)·김(金)씨 등으로 변성해

혈통을 유지해야 했으며,

이들은 조선 정조 때에 와서야 문헌 등을 다시 조사해 왕씨로 성을 도로 바꾸고 개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반면 조선의 종성인 전주 이씨들은

합방의 형식을 강조하고 싶었던 일제에 그다지 큰 탄압은 받지 않아 현재도 대성으로 남아 있다. 

나라가 망한 뒤 수많은 사람들이 성(姓)을 버린 채 지배 당하며 살았고,

출신을 숨기거나 변조했으며

후대의 자손들은 권력의 변천에 따라 유력한 다른 씨족에 흡수돼 들어갔거나 근근이 혈족을 보존해 갔다.


‘완벽한 양반집안’ 존재하지 않아

우리 나라 성씨는 실제 중국에서 건너온 자손들도 있지만 상당수는 귀화해 온 자손이다.

조선 시대는 사대 외교가 일반적인 정치 행태의 하나였다.

자기 신분을 높여 보려는 의도로 중국 성씨를 갖다 붙이는 경우가 흔했다. 

일부 씨족의 경우엔 중국의 역사적 인물을 원조로 기록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심할 경우 족보를 편찬하는 시점에서 수천년 전 인물을 자신들의 조상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어느 한 인물이 처자를 데리고 중국에서 조선으로 귀화하여 계속 조선에서 살았다면

그의 아들은 조선 여자와 결혼했을 것이고

자손들도 대대로 조선인과 결혼해 자식을 낳고 살았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5세손 아래로 내려가면 그 자손의 혈통은 현지인의 것과 구별되지 않는다.

귀화한 지 100년이 지났다면

그 사람의 자손들에겐 이미 귀화국의 피가 더 많이 흐르고 있다고 봐야 한다.

조선 초 한반도의 인구는 1000만명을 넘지 않았다.

우리 계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어느 특정 인물이 중복돼 조상으로 등장하는 것을 기록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5대 이상 이 땅의 사람들과 혼사를 맺으며 살아온 사람들은 모두 같은 혈통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0%도 안되던 ‘양반’ 조선 말 70%로 급증

우리나라에선 어느 문중이든 그 소속원 모두가 완벽한 양반이라고 할 수 없다.

양반 계급은 조선 초기만 해도 전체 인구의 10%에도 미치지 못했던것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 70%로 갑자기 늘어나게 된다.

1909년, 일본의 압력으로 민적부를 호구단자로 대체하면서

성이 없던 노비들에게 성과 본관을 지어 주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우리 성은 모두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성을 쓴 시기는

한자가 유입된 시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성과 본관은 원래 씨족의 명칭이었기 때문이다.

부족국가 시대에 중국식 성이 없었다 하더라도

부족의 명칭이 하나의 성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현재와 같은 성을 쓰게 된 것은 4~5세기부터다.

하지만 성을 쓴 초기에는 본관이란 것이 없었고

필요에 의해 스스로 성씨를 정한 경우도 있었으며 임금이 정해준 사성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문헌으로 나타난 최초의 사성은

고구려 시조 고주몽은 부여에서 남하 도중 만난 세 명에게

각각 극(克)씨,중실(仲室)씨,소실(小室)씨를 내려줬는 성이다.

이후 신라의 3대 유리왕은

박혁거세를 추대한 육부의 촌장에게 이(李)·정(鄭)·손(孫)·최(崔)·배(裵)·설(薛)씨를 내려준다.

경주가 본관인 이들 6개 성씨는 모두 현존하는데 반해

주몽이 사성한 세 성씨는 모두 없어졌다는 사실은

역사에서 왕권의 흥망 성쇠가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사라진 성씨 포함하면 총 496개 성

본관은 고려 초에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보편화된 것은 고려 중기에 이르러서다.

본관은 연고가 있는 군현의 명칭을 따라 정해졌는데

평민은 감히 군현의 명칭을 쓰지 못하고 그 아래 단위인 방(坊)의 명칭을 따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몰락하여 천민이 된 천민 아닌 천민은 성도 본관도 가질 수 없었다.

 

우리나라 성씨의 수는

1486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277성이 게재돼 있고,

영조 때의 도곡 이의현이 편찬한 ‘도곡총설’에는 298성이 나와 있으며, 

1930년 국세 조사에서는 250성이,

1960년 국세조사에서는 250성이,

1985년 인구 및 주택센서스에서는 275개의 성이 보고되고 있다. 

 

18세기 들어 족보 편찬 일반화 

우리나라에서 왕의 계대가 아닌 옛 명가들의 계보가 단순한 형태로 형성되기 시작한 연대는

13세기로 보인다. 

고려 말(14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일부 명문가의 소략한 계보와

1401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해주오씨족도’가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계보가 체계화되어 보첩의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실물은 전하지 않으나

1423년의 문화 유씨의 ‘영락보’ 서문이 전하고 있는 것을 보아, 

고려 후기 늦어도 15세기 초이다.

러나,100여 씨족을 제외한 대다수의 씨족에서 족보 편찬이 일반화된 것은 18세기이다.

16세기 이전에는 족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동일 혈족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16세기 이전의 족보에 이름이 오를 수 있는 사람을 따져보면

외손을 포함해도 100여명이 채 안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대대적으로 족보를 편찬했다기보다는

간단한 계보를 기록한 ‘단자’를 만든 것으로 봐야 한다.


 성씨 마다 초간보

1476년에 발행돼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안동권씨세보(성화보)’가 

제대로 편찬된 족보다운 족보로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임진왜란(1592) 이전에 발행된 족보로 가장 방대한 것은

1565년에 발행된 ‘문화류씨세보 (가정보)’로 외손까지도 매우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귀중한 유산이다.

이 족보는 수십년 전에 분실되어 현재는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18세기에 초간보를 발행한 명문가는

임란 때의 명 재상 서애 유성룡을 배출한 풍산 류씨는 1758년에야 초간보(무인보)를,

충무공 이순신과 율곡 이이를 배출한 명문 덕수 이씨는 1712년에 초간보(임진보)를,

충무공의 선봉장이었던 방덕용,방응원을 배출한 온양 방씨는

1781년에 초간보(신축보)를 낸다.충무공은 온양 방씨의 사위였다.

 

문과급제자 수

이들 19세기 이전에 발행된 옛 족보는 학술상으로 매우 중요하다.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족보를 편찬하거나 발행하지 못한 씨족도 상당수 있다. 

문과급제자 1만4600여명 중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은 전주 이(李)씨가 가장 많고,

안동 권 씨,파평 윤씨, 남양 홍씨,안동 김씨,청주 한씨, 밀양 박씨, 광산 김씨, 연안 이씨,

여흥 민씨,경주 김씨,한산 이씨 순이다.

상위 50개 가문이 전체 합격자의 56%를 차지하는데, 1명만 배출한 가문도 319개나 되었다.

10명 이상의 정승을 배출한 전주 이씨가 22명으로 역시 1위,

동래 정씨가 16명으로 2위, (신)안동 김씨가 15명으로 3위이고,

청송 심씨 13명,청주 한씨 12명,파평 윤씨·여흥 민씨

각 11명 등이 잇고 있다.

 

☞ 당파에 의한 명가 등장

후기 당쟁이 격화되자 당파에 따른 명가가 등장하는데,

조선 멸망 시까지 집권당이었던 노론은 안동 김씨,연안 이씨,광산 김씨 등이 핵심가였다.

이 무렵에는 한 씨족 내에서도 특정 지파에서 인재가 집중 배출될 때 명가로 평가받았다.

예를 들면 연안 이씨 판사공파는 이단상,이일상,이은상),이익상 등 상(相)자 돌림의 8상(相)을 배출했다.

광산 김씨 사계파도 김만기(숙종비 인경왕후의 부친)는 ‘구운몽’의 작가인 동생 김만중과

형제 대제학이었을 뿐만 아니라 김춘택,김복택 등 이른바 8택의 조부이기도 했다.

김춘택은 벼슬도 없는 신분으로 남인 정권을 붕괴시키고

서인 정권을 등장시킨 갑술환국의 주역으로 유명하다.

 

전주 이씨,정승 22명 배출해

조선 말기에는 안동 김씨 중 김상헌의 직계 후손들이 세도정치의 주역이 되었다.

세도정치 이전에도 김수항,김수흥,김창집,김창협,김창흡 등을 배출했는데,

김창집이 당쟁 와중에서 사형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손자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으로 세도정치를 열었다.

김조순 대에 우의정 김달순,이조판서 김문순,형조판서 김희순 등 모든 요직을 독차지한 이들은

아들 대인 근(根)자 항렬에 와서는 김좌근,김흥근이 영의정,김홍근이 좌의정,김응근이 공조판서를 역임했으며,

다음 병(炳)자 항렬에서는 김병학,김병국,김병시가 영의정, 김병덕이 좌의정,김병기가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들 가문은 명성황후 민씨의 여흥 민씨와 함께 ‘조선 멸망의 원인’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소론은 영조 중기 이후 권력에서 소외되었지만

경주 이씨 백사파 만은 조선 말까지 살아남아 고종 때에도 이유원이 영의정을 지냈다.

나라가 망하자 이 가문의 이회영 6형제는

전 가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나섰다가 이시영을 제외한 5형제가 순국하는 전형을 보여주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성씨 

ㄱ-가(賈) 간(簡) 갈(葛) 감(甘) 강(姜) 강(康) 강(强) 강(剛) 강(疆) 개(介) 견(堅) 견(甄)

     경(景) 경(慶) 계(桂) 고(高) 곡(曲) 공(孔) 공(公) 곽(郭) 구(丘) 구(邱) 구(具) 국(菊)

     국(國) 국(鞠) 군(君) 궁(弓) 권(權) 근(斤)

     금(琴) 기(奇) 기(箕) 길(吉) 김(金) 궉(喬아랫부분을 鳥로) 

ㄴ-나(羅) 남(南) 낭(浪) 내(乃) 내(奈) 노(盧) 노(魯) 노(路) 뇌(雷) 남궁(南宮) 

ㄷ-단(段) 단(單) 단(端) 당(唐) 대(大) 도(道) 도(都) 도(陶) 돈(敦) 돈(頓)동(董)두(杜)독고(獨孤) 동방(東方)

ㄹ-뢰(賴) 류(柳)

ㅁ-마(馬) 마(麻) 만(萬) 매(梅) 맹(孟) 명(明) 모(牟) 모(毛) 목(睦) 문(文) 미(米) 민(閔)

ㅂ-박(朴) 반(潘) 반(班) 방(房) 방(方) 방(邦) 방(龐) 배(裵) 백(白) 범(范) 범(凡) 변(卞)

     변(邊) 복(卜) 봉(奉) 봉(鳳) 부(夫) 비(丕) 빈(彬) 빈(賓) 빙(氷) 

ㅅ-사(史) 사(謝)사(舍)삼(森)상(尙)서(徐)서(西)석(昔) 석(石) 선(宣) 설(卨) 설(薛)섭(葉) 성(成) 성(星)

     소(蘇) 소(邵) 손(孫) 송(宋) 송(松) 수(水) 수(洙) 순(淳) 순(荀) 순(舜) 순(順) 승(承)승(昇) 시(施)

     시(柴) 신(愼) 신(申) 신(辛) 심(沈) 사공(司空) 서문(西門) 선우(鮮于)

ㅇ-아(阿) 안(安) 애(艾) 야(夜) 양(梁) 양(楊) 양(樑) 양(襄) 어(魚) 엄(嚴) 여(呂) 여(余)여(汝) 연(延)

    연(燕) 연(連) 염(廉) 영(影) 영(榮) 영(永) 예(芮) 오(吳) 옥(玉) 온(溫)옹(邕) 옹(雍) 왕(王) 요(姚)

    용(龍) 우(禹) 우(于) 운(雲) 원(元) 원(袁) 위(韋) 위(魏)유(兪) 유(劉) 유(庾) 육(陸) 윤(尹) 은(殷)

    음(陰) 이(李) 이(異) 이(伊) 인(印) 임(林)임(任)

ㅈ-자(慈) 장(張) 장(章) 장(莊) 장(蔣) 전(全) 전(田) 전(錢) 점(占) 정(丁) 정(程) 정(鄭)

     제(諸) 조(趙) 조(曺) 종(宗) 종(鍾) 좌(左) 주(周) 주(朱) 준(俊) 지(智) 지(池) 진(晋)

     진(眞) 진(秦) 진(陳) 제갈(諸葛)

ㅊ-차(車) 창(昌) 창(倉) 채(蔡) 채(菜) 채(采) 천(千) 천(天) 초(楚) 초(肖) 최(崔) 추(秋)추(鄒)

ㅌ-탁(卓) 탄(彈) 태(太)

ㅍ-판(判) 팽(彭) 편(扁) 편(片) 평(平) 포(包) 표(表) 풍(馮) 피(皮) 필(弼)

ㅎ-하(河) 하(夏) 한(漢) 한(韓) 함(咸) 해(海) 허(許) 현(玄) 형(邢) 호(扈) 호(胡) 홍(洪)

     화(化) 황(黃) 황보(皇甫) 황보(黃甫) 후(后)

 

희귀한 성씨

개성 내씨,교동 뇌씨,희천 편씨,궉,삼,애,옹,탄씨 등은 희귀姓으로 인구 100명도 안된다. 

1985년의 인구조사에서 우리나라의 성씨는 275성이고, 본관은 3349본이다.

100만 명 이상의 본관 성씨는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전주 이씨 등 5개에 불과하다.

10만 명 이상의 본관 성씨는 모두 78개로서 여양 진(陳)씨가 10만232명이다.

3만7872명의 삭녕 최(崔)씨가 150위인데,

인구 천 명에 한 명꼴 정도이니 그 다음부터를 희귀 성씨로 분류해도 좋을 것이다.

희귀 성씨는 대개 귀화 성씨가 많지만

여기에는 기자(箕子)를 시조로 모시는 여러 성씨들처럼 후대에 자의적으로 연결한 경우도 적지 않다.

희귀 성씨에는 역사 사건들과 관련있는 성씨들이 있는데 천녕 견씨가 그런 예다.

왕건이 후백제 견훤의 아들 신검을 토벌할 때 고려 대상이었던 견권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아자개를 시조로 모시는 견씨와 견훤을 시조로 모시는 견씨 등 6개 본관에 1985명이 있다.

희기성 중 옛 왕족의 성씨인 개성 내씨(開城 乃氏)는 원래 개성 왕씨였는데, 

조선 개국 후 탄압을 피해 도망가던 중 임진강 나루터에서 검문을 하던 군졸이 성씨가 뭐냐고 묻자

당황해서 ‘네?’라고 반문한 것이 내씨로 기록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283명으로 조사되었다.

밀양 대씨(大氏)는 발해의 국성에서 유래했다.

시조 대중상(걸걸중상)의 아들이 대조영이다.

발해가 망한 후 그 후손이 경남 밀양에 정착했는데 밀양과 대산(김해)의 두 본관에 499명이 있다. 

 개성 노씨(開城 路氏)의 시조 노은경은 원나라 한림 학자로서 고려 공민왕 때 노국공주를 따라와

개성에 정착했는데,1307명이 조사되었다.

강음 단씨(江陰 段氏)의 시조 단희상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병으로 왔다가 귀화해 강음에 정착했는데,

조사에 따르면 720명이다.

사성(賜姓) 김해 김씨는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의 부장이었던 김충선은

일본 이름이 사야가였으나 귀화 후 선조로부터 김충선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진주 목사 장춘점의 딸을 아내로 맞아 들였다.

사성 김해 김씨는 우록 김씨로 불린 적도 있는데,김해 12만 5277명,우록 130명이었다.

연안 인씨(延安 印氏)의 시조 인후는 ‘후라타이’란 이름의 몽골인이었는데,

아들 인승단이 충목왕 때 연안부원군에 봉해진 것이 본관이 되었다. 조사에 따르면 120명이 있다.

화산 이씨(花山 李氏)는 안남(베트남)계 왕족인데,

안남국이 트란 왕조에 점령되면서 국왕 이천조의 둘째 왕자 이용상이,

고려 고종 13년(1226)에 황해도 옹진군 화산으로 이주하자 고종이 화산군에 봉했다.

조사에 따르면 1131명이 있다.

‘천방지축마골피’는 잘못된 통설

‘천방지축마골피’를 천계(賤系)의 대표인 것처럼 말하지만 근거가 없다.

‘축씨’와 ‘골씨’는 1985년 조사 때의 275개 성씨 중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천씨는 ‘하늘 천(天)’자와 ‘일천 천(千)’자를 쓰는 두 경우가 있다.

천(天)씨는 밀양 등 5개 본관에 1351명이 있는데,

조선 정조 때 천명익이 진사시에 합격한 것으로 봐서 천계(賤系)는 아니다.

영양 천씨(潁陽 千氏)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군으로 온 귀화 성씨로서

중시조 천만리가 자헌대부와 화산군에 책봉 받았으니 천계(賤系) 천계가 아니다.

방씨도 대표격인 온양 방씨(溫陽 方氏)의 경우 중간 시조로 알려진 방운이,

고려 성종 때 온수(온양)군(君)에 봉해지자 온양을 본관으로 삼은 것이다.

남양 방씨(南陽 房氏)는 고려 때 벽상공신 삼중대광보국을 역임한 방계홍을 1세 조상으로 하고 있으며,

개성 방씨(開城 龐氏)도 고려 때 원나라 노국대장 공주를 따라 온

원나라 벼슬아치 방두현을 시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천계(賤系)는 아니다.

지씨의 대표격인 충주 지씨(忠州 池氏)는 지용수가,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일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조선 시대 때는 문과 급제자 10명을 배출했다는 점에서 천계(賤系)가 아니다.

복성(複姓) 중에는 남궁,독고,사공,선우,제갈,황보씨 등 비교적 많이 알려진 성씨 외에,

강전,장곡,서문씨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성씨들이 있다.

이 중 서문씨를 예로 들면,

안음 서문(安陰 西門)씨는 1985년에 2328명이 조사되었는데,

공민왕 때 노국대장 공주를 따라 들어온 서문기가 안음군에 봉해지면서 본관이 되었다.

발음이 희귀한 성씨로는 궉씨가 있다.

조선시대 학자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순창에 궉씨가 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으며 중국의 성이라고도 한다’는 기록이 있고,

실학자 이덕무의 앙엽기에는 ‘선산에 궉씨촌이 있는데 선비가 많다’는 기록이 있다.

조사에 따르면 선산,순창,청주의 세 본관과 243명이 있다.



인구가 100명 이하인 극희귀 성씨들도 적지 않다.

사(謝)씨는 진주와 한산의 두 본관이 있는데,

1960년에 19명이 있었으나 1985년에는 4가구에 30명으로 늘었다.

삼가 삼(三嘉 森)씨는 1930년에 조사 때는 나타나지 않은 성씨인데 1985년에는 85명이 확인되었다.

애(艾)씨는 연풍,전주,한양의 세 본관에 66명이 있는데, 1930년 조사 때도 있던 성씨이다.

파평 옹씨(坡平 雍氏)는 조사 때 80명이 확인되었다.

원래 순창 옹(邕)씨였는데 1908년 민적 기재 때 옹(雍)씨로 잘못 기재되었다고 전한다.

탄(彈)씨는 진주,해주의 두 본관에 94명이 있는데,

1930년도 조사 때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구한 말 무관학교 교관 중에 탄원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전부터 실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희천 편(扁)씨는 조사에 따르면 68명이 있는데,

1930년 조사 때 처음 나타난 성씨로 충북 옥천에 1가구가 살고 있었다. 

교동 뇌씨(喬桐 雷氏)는 조사 때 정확히 100명이었다.

강화도 교동이 연산군을 비롯해 여러 선비들의 귀양지였다는 점에서 귀양 갔던 선비의 후예로 추측된다.

그 외에 51명의 연안 단(單)씨와 36명의 한산 단(端)씨 등이 있다.

 

☞ 로버트 할리 귀화로 생긴 영도 하씨

최근에 생긴 희귀 귀화 성씨에는 영도 하씨(影島 河氏)가 있는데

미국 태생의 국제변호사 이자 사업가인 로버트 할리가 1997년 귀화하면서 성명을 하일로 정했는데,

한국인 부인에게서 낳은 3명의 자녀가 있다. 

 

',·´″″°³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식 퀴즈  (0) 2020.03.02
어버이 날의 의미  (0) 2019.08.07
잘못 알고 있는 역사 상식  (0) 2019.07.29
한식(寒食)의 유래  (0) 2019.07.29
식목일의 유래  (0) 2019.07.2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