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와 함흥차사 석성린             작성일자; 2007.10.27.토요일,맑음

 

1395년(태조 4년) 이성계의 친구이자 한성부 판사(지금의 서울 시장)가 된 성석린이다.

함흥차사가 되면 다 죽었다고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나,많이 와전되어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1~2차 왕자의 난으로 골육상쟁을 겪게 된 태조는 함흥으로 가신들을 데리고 은둔의 길을 떠난다.

태조 이성계는 왕자의 난으로 인하여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떠나 버리자 

자식으로서 끝까지 불효하기를 원치 않았던 태종 이방원은 노심 초사하게 된다.

태조 이성계의 한양으로의  귀향을 위해서 태종 이방원은 여러 명을 함흥에 차사로 보냈지만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신하들도 없었고,태조 또한 돌아올 기약이 없었다.

조선 개국 초의 상황에서 부자의 의가 끊기는 것을 우려했던 성석린은 태조 이성계의 친구로서 부자간의 화해를 위해

함흥에 가기를 자처하였다.

태종 이방원의 허락을 받고 복색에 백마를 타고 함흥까지 가서 마치 지나가는 과객인양 위장을 하고 이성계가 기거하는

먼 거리에서 말에서 내려 휴식을 취하면서 불을 피워 밥 짓는 시늉을 했다.

이때 이성계가 멀리서 여러 사람들이 휴식을 하면서 밥짓는 모습을 바라 보다가 내시를 시켜 그 곳으로 가 보게 하였다.

내시가 다녀 와서 말하기를 "성석린이 볼 일이 있어 이 곳을 지나가다 해가 저물어 밥 짓고 있더라. "고 아뢰자

이성계는 가장 가까운 친구가 길을 지나 간다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성계는 기뻐하며 성석린을 불렀다.

이성계는 친구인 석성린과 술잔을 기우리며 자식들의 권력다툼에 탄식하고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였다.

성석린은 부자간의 인륜의 도리를 이야기하자 태조는 갑자기 노여워 얼굴빛이 변하며 성석린을 향하여,

"그대가 그대 임금 태종을 위하여 나에게 아양을 떠는 것인가?" 라고 소리를 질렀다.

성석린도 깜짝 놀랐다.

친구간에 이렇게 화를 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엉겁결에 석성린도 큰 맹세를 하게 되었다.

석성린은 "만약 임금(태종)을 위해 이렇게 한다면 저의 자손은 앞으로 반드시 눈 먼 소경이 되오리다.

"엄청난 약속과 맹세를 하자 태조 또한 마음이 풀어져,

그동안 가슴에 묻어 두었던 이야기로 밤을 보내고 성석린을 죽이지 않고 돌려 보냈다.

 

함흥에 간 신하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고,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인물이 석성린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특히 석성린의 일화가 유명한 것은 태조 이성계와 친구라는 것과 그의 목숨을 아끼지 않은 우국충정과 주군에

대한 군신의 의리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우연인지,

그 맹세의 인과응보인지 모르지만 석성린의 장남인 지도와 차남인 발도가 모두 눈이 멀었고,

장손인 구수와 증손까지 모두 백내장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거짓 맹세가 그대로 들어 맞았다고 하였다.

 

태종 이방원이 왕권을 유지하는데는 어느 누구 보다도 가장 큰 희생을 한 인물이 성석린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비록 3대의 자손들이 눈이 머는 가문의 희생은 치렀으나,

조선 초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의 부자 간의 천륜을 이어 주었으니 과연 충신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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