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 작성일자; 2010.04.14.수요일,맑음
강력한 신분제도를 바탕으로 양반 중심의 사회를 유지했던 조선 시대에 천민은 백성 취급조차 받지 못했다.
하지만 개중에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천출이란 주홍글씨를 벗어던지고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또렷하게 새겨놓은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세종 시대의 과학자 장영실이다.
선왕 태종의 혈흔이 낭자한 정치 안정의 기반 위에서 즉위한 세종은
초기부터 전제와 세제의 개혁이라는 화급한 과제와 마주쳤다.
토지의 분배와 공평무사한 세금 징수야말로 안정적인 국가 경영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한데 이런 목적을 달성하려면 경지 당 농업생산성을 대폭 향상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때문에 세종은 근대적 농법을 보급하고, 우리 실정에 맞는 역법을 제작함으로써 시기에 맞는 파종과 추수를 가능하게 했다.
농업이 국가의 중심 산업이었던 그 시기에 국왕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치력명시(治曆明時)’,
곧 백성들에게 농사지을 최적의 시간과 계절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세종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농업 발전을 위한 과학기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막연히 하늘의 뜻에 기대어 농사지을 것이 아니라 과학의 힘을 빌려 자연의 변화를 계수화 함으로써 기회는 최대화하고
위기는 최소화하겠다는 뜻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조선 최고의 발명가로 거듭난 장영실의 이름이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 소항주 출신의 귀화인이다.
장영실이 살던 시기는 중원에서 원나라가 축출되고 명나라가 기세를 올리던 때이다.
중국에서 왕조가 흥망하면 수많은 망명객들이 조선으로 몰려오곤 했다.
장영실의 아버지도 그런 사람들 틈에 끼어 조선에 들어왔으리라 짐작된다.
그렇다면 양반은 아니더라도 양인 정도의 신분을 얻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식인 장영실이 어찌하여 천민이 되었을까?
그 해답은 바로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어머니가 동래현의 기생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영실은 어머니가 관기였으므로 관청에 소속된 관노가 된다.
조선의 엄격한 신분제도에 따르면 일천즉천(一賤則賤),
즉 부모 중 한 명이라도 천민이라면 자식은 무조건 천민이 된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이 조건은 완급을 되풀이했지만,
어머니가 천민이면 자식은 천민의 신분을 갖는 천자수모(賤者隨母)의 법칙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바뀌지 않았다.
그러기에 조선시대에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무수한 홍길동들이 많았다.
이런 고통스런 환경 속에서도 장영실이 과학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기술자였던 아버지의 자질을 이어 받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장영실을 선조로 모시는 '아산장씨세보'에는 그가 항주 출신인 장서(蔣壻)의 9세손이고,
부친은 장성휘(蔣成暉)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실록과 족보의 기록상 다른 부분은 쉽게 사실 여부를 가릴 수 없지만 세종 시대에 그가 관노 신분이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기술자로서 장영실의 이름은 태종대부터 한양까지 알려져 있었다.
어린 시절 그가 틈틈이 동래현의 병기 창고에 들어가 낡고 못쓰게 된 병장기를 손질하면서 천재적인 자질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장영실은 관상감 출신의 남양 부사 윤사웅의 추천으로 한양에 올라와 궁중에서 일하게 된다.
1421년(세종 3년), 장영실은 윤사웅과 함께 북경에 가서 관성대를 살펴보고 돌아왔다.
관성대는 13세기 원나라의 곽수경이 만든 동양 최대의 천문대로 각종 천문기기를 통해 천문을 살피는 장소였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장영실은 세종 시대에 완성된 각종 천문기기를 제작했던 것이다.
'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세종은 '우리나라는 멀리 해외에 있어서 모든 것을 하나같이 중국의 제도를 따라 시행하는데, 유독 천문을 관찰하는
기계만 빠졌다.'라면서 정인지와 정초에게 천문기상기기의 내력 및 출전을 연구하게 하고,
이천과 장영실에게 천문기상기기의 제작을 맡겼다.
당시 세종은 양각혼의성상도감을 설치하고 기기 제작을 맡은 장영실에게 책임에 걸맞은 벼슬을 내려주려 했지만
중신들의 완강한 반대로 포기해야 했다.
천출이라는 신분의 제약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영실은 낙심하지 않고 1424년(세종 6년)에 수동 물시계인 경점기(更點器)를 개선함으로써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자 세종은 그에게 상의원 별좌 벼슬을 내리기로 마음먹고 이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이때 허조는 '기생의 자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며 반대했지만
조말생은 “이런 무리는 오히려 상의원에 적합하다.”며 찬성했다.
이에 세종이 다른 대신들을 불러 재차 묻자,
그 중에 유정현이 나서서 “장영실이라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며 찬성했다.
그렇게 세종은 여러 대신들의 공론을 거친 다음에야 장영실에게 ‘상의원 별좌(尙衣院 別坐)’ 벼슬을 내렸다.
장영실을 면천시켜 양반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행여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상의원(尙衣院)은 임금의 의복을 만들고 궐내의 재물과 보물을 관리하던 관청이었고, 별좌는 종5품의 문반직으로
월급은 없는 무록관(無祿官)이었다.
하지만 장영실이 천민의 너울을 벗어던지는 데는 충분한 자리였다.
이런 영광이 그를 자만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이듬해 1425년(세종 년) 5월,
장영실은 이간이란 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대사성 황현, 양주 부사 이승직 등과 함께 태형 20대의 벌을 받았다.
하지만 그 후에도 장영실은 세종의 배려로 궁궐에서 자신의 직무에 종사했고,
수시로 사신을 따라 명나라를 오가며 우수한 과학기술을 입수했다.
1432년(세종 14년)부터 세종은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한 과학기술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가동시켰다.
천문 관측기구를 제작하는 의표창제(儀表創製)를 시작하면서 예문관 제학 정인지에게 총 지휘를 맡기고
천문관측 관청인 서운관을 확장하는 한편, 대형 천문대인 대간의대(大簡儀臺)를 경복궁 안에,
소형 천문대인 소간의대(小簡儀臺)를 북부 광화방 인근에 지었다.
대간의대는 높이가 9.5미터에 이르는 왕립천문대로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이때 장영실은 이천과 함께 간의대에 필요한 각종 기구 제작에 나섰다.
여기에는 과거 명나라의 관성대에서 입수한 정보가 커다란 밑천이 되었음은 두 말 할 필요조차 없다.
두 사람은 우선 간이(簡儀)를 만들어 한성의 위도를 새로 측정하는 한편,결과를 기준으로 각종 기구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간의는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이 만든 천문 의기로 혼천의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혼천의는 천체의 위치와 시각과 함께 태양과 달의 운동을 측정할 수 있지만 간의는 천체의 위치만 측정하는 기기였다.
세종은 그 과정에서 장영실에게 정5품 무관직인 ‘행사직(行司直)’을 제수함으로써 업무 의욕을 고취시켰다.
그러자 장영실은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불과 1년 만에 혼천의를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혼천의는 ‘선기옥형(璇璣玉衡)’ 또는 ‘기형(璣衡)’이라고도 하는데,
천구의(天球儀)인 혼상(渾象, 하늘의 별을 둥근 구형에 표시한 의기)과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이용하여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되어 천체의 운행에 맞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으므로 혼천시계(渾天時計)라고도 부른다.
자격루
시계가 없었던 고대에는 낮에는 해 그림자를 통해 시간을 측정했고, 밤에는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시간을 측정했다.
하지만 날이 흐리면 해도 별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물시계였다.
기원전 7세기경 중국에서 발명된 물시계는 매우 단순한 구조였다.
물을 채운 항아리 한 귀퉁이에 구멍을 뚫어 물방울이 떨어지게 한 다음
다른 항아리에 그 물방울을 받아 부피를 잰 다음 12등분하여 한 시간의 길이를 계산했던 것이다.
그런데 물시계는 매일 물을 갈아주어야 했고, 조금만 주의를 게을리 해도 물이 말라 시간을 제대로 맞출 수 없었다.
그래서 송나라의 과학자 소송(蘇訟)은 1091년경 물레바퀴로 돌아가는 거대한 자동 물시계를 발명했지만
장치가 너무 복잡하여 기술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가 죽은 뒤 사라졌다.
12~13세기경에는 아라비아인들이 쇠공이 굴려 종이나 북을 쳐 시간을 알리는 자동 물시계를 만들었다.
세종은 일찍이 자동 물시계를 구상했지만 과학기술의 불모지였던 조선 땅에 시계 제작에 필요한 자료와
기술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정인지와 정초가 중국에서 소송의 물시계와 이슬람의 물시계 자료를 수집했고,
장영실이 그것을 바탕으로 ‘자격루’라는 새로운 자동 물시계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오랜 자신의 구상이 실현되자 세종은 매우 기뻐하며 경회루 남쪽에 보루각(報漏閣)을 짓고 자격루를 설치했다.
자격루는 보루각루(報漏閣漏), 혹은 궁궐 안에 있다고 하여 금루(禁漏)라고도 불렸다.
혼천의가 국가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면 자격루(自擊漏)는 백성들을 위한 순수한 창작품이었다.
당시 세종이 장영실의 공로를 치하하며 정4품 무관직인 ‘호군(護軍)’을 제수하자 여러 대신들이 반대했다. 그
러나 황희가 과거 태종이 김인이라는 평양의 관노를 호군으로 제수한 적이 있다는 전례를 듦으로써 무리 없이 통과되었다.
그 무렵 세종은 장영실의 교묘한 실력만이 아니라 매우 똑똑하다는 이유로 늘 곁에 두고 내시를 대신하여 왕명을 받들게
하기도 했다.
1434년(세종 16년) 7월 1일, 세종은 자격루를 조선의 표준 시계로 선포했다.
그때부터 자격루에서 시간을 알려주면 궁궐 밖에 있는 종루에서 북이나 종을 쳐서
오정(낮 12시)이나 인정(밤 10시경) 등의 시각을 백성들에게 알려주었다.
서울의 거리 이름인 종로(鐘路)는 바로 이 종루에서 유래된 것이다.
1438년(세종 20년), 장영실이 또 하나의 자동 물시계인 옥루(玉漏)를 완성하자,
세종은 경복궁 천추전 서편에 흠경각(欽敬閣)에 짓고 옥루를 설치했다.
옥루는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의 기능을 합친 다목적 물시계였다.
시간은 물론 계절의 변화와 절기에 따라 필요한 농사 일까지 알려주는 기계가 탄생한 것이다.
세종은 새삼 장영실의 능력에 감탄하며 우승지 김돈에게 '흠경각기(欽敬閣記)'를 짓게 했다.
안타깝게도 옥루는 1553년(명종 8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었고,
이듬해 다시 제작했지만 임진왜란으로 불타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그 무렵 장영실이 제작한 과학기기는 혼천의를 간소화한 대간의와 소간의,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 천평일구,
시간과 함께 남북의 방위도 알려주는 해시계인 앙부일구, 밤낮으로 시간을 잴 수 있도록 만든 일성정시의,
해 그림자에 따라 절기를 알 수 있게 만든 규표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개발은 고려 고종 때인 1234년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
인쇄 이 후 답보상태에 빠졌다.
조선에서는 1403년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子)가 만들어졌는데,
크기도 일정하지 않았고 활자를 고정하는 데 밀랍을 사용했으므로 많은 양의 인쇄물을 찍을 수가 없었다.
몇 차례만 인쇄해도 밀랍이 녹아버렸기 때문이다.
1420년, 장영실은 이런 현실을 직시하여 이천, 김돈, 김빈 등과 함께 계미자보다 작고 정교한 경자자(更子字)를 만들었고,
이를 다시 개량한 것이 바로 갑인자(甲寅字)이다.
대소 활자 두 종류로 20여만 자가 넘는 갑인자의 효용은 대단했다.
아름답고 선명한 인쇄는 물론이고 종전보다 2배나 빨리 인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자소에서는 이 갑인자를 이용해 수많은 서적을 인쇄함으로써 세종 대 문화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다.
현재 갑인자는 전해지지 않지만 '대학연의','분류보주 이태백시' 등 갑인자로 찍어낸 서책들이 살아남아 그 유적을
보여주고 있다.
장영실이 만든 또 하나의 회심의 작품이 바로 측우기다.
농업국가인 조선에서는 농산물의 생산량이 곧 국력의 바로미터가 된다.
때문에 정밀한 강우량의 측정은 농사의 질과 양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였다.
그때까지 조선에서는 비가 땅 속에 스며든 깊이를 재서 강우량을 측정하는 원시적인 방법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1436년 전후 한발과 폭우로 인한 흉년이 거듭되자 세종은 장영실에게 측우기 개발을 명했다.
그리하여 세자 이향과 장영실이 함께 아이디어를 짜낸 끝에
1441년, 높이 41.2센티미터, 직경 16.5센티미터 크기의 원통형 쇠그릇을 만들었다. 세계 최초의 측우기였다.
이 측우기는 이듬해 높이 30.9센티미터, 직경 14.1센티미터로 규격이 통일되었다. 그
런데 측우기는 정밀한 만큼 대량 제작이 어려웠다.
이에 장영실은 좀 더 대중성 있는 측우기를 구상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수표(水標)이다.
측우기
청계천의 마전교 서쪽과 한강변에 설치된 수표는 백성들이 쉽게 강우량을 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실용적이었다.
수표교(水標橋)라는 다리 이름의 유래이기도 하다.
이것은 쉽게 강우량을 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실용적이었다.
장영실은 이처럼 조선의 과학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종3품 대호군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쓸쓸했다.
최근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장영실은 세종대의 유명한 천문학자 김담의 매형이었다.
그가 실력을 발휘한 천문 분야에 대한 지식의 원천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를 추측하게 한다.
그렇듯 뛰어난 능력으로 세종의 과학 입국을 선도하던 장영실의 만년은 쓸쓸했다.
1442년3월 16일 자의 '세종실록' 기록에 따르면
바로 그 해에 세종이 어가(御駕)에 올랐다가 부서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어가는 장영실이 설계하고 장인 임효돈이 제작한 것이었다.
그 일로 인해 대간의 탄핵을 받은 장영실은 졸지에 죄인의 몸이 되고 말았다.
대신들은 때를 만난 듯 그를 성토했고, 파직과 함께 곤장 100대에 처해야 한다고 상주했다.
그런데 세종의 조치는 뜻밖이었다.
저간의 공이 있으니 곤장 80대로 감해주라는 것이었다.
그 동안 장영실을 중용하고 아꼈던 세종의 마음이 왜 그렇듯 냉정하게 돌아섰던 것일까?
그 후 장영실의 자취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사생활은 물론이고 말년의 행적조차 깨끗하게 묻혀버렸다.
일개 관노에서 종3품 벼슬까지 올랐던 그의 영광도 거기에서 끝이었다.
어쩌면 미천한 출신 성분 때문에 사가들로부터 외면당했을 수도 있다.
혹은 그가 갑작스런 지위 상승으로 인해 오만하고 나태해져서 완벽주의자 세종에게 버림받았을 수도 있다.
단초는 있다.
그가 몇 차례 뇌물 수수로 벌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잘못으로 저간의 빛나는 업적이 상쇄될 수는 없다.
더군다나 그는 과학입국을 지향하던 세종대왕의 대표선수가 아니었던가.
그러기에 오늘날 그의 말년 행적을 둘러싸고 다양한 추측이 나돌고 있지만 대부분 드라마틱한 상상일 뿐이다.
장영실,
귀천이 엄연했던 전제정치 시대에 강고한 신분의 벽을 뚫고 조선 최고의 과학자가 되었던 인물,
매 순간마다 뜨겁게 열정을 불살랐던 그는 아직도 조선 최고의 발명가로서, 성공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표상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 우주를 유영하고 있는 소행성 68719호에는 ‘장영실(Jangyeongsil)’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아직도 그는 별빛을 반짝이며 우주 공간을 유영하고 있는 것이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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