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계 대원군의 궁인 누동궁(樓洞宮) 2019.08.15.목요일,흐림
누동궁은 한성부 중부 경행방에 있던 궁으로 철종의 생부 전계대원군이 살았고 철종이 태어난 곳이다.
철종은 왕위에 오른 뒤 생사고락을 함께한 형 영평군을 이곳에 살게 했다.
1869년에는 안국동 별궁에 있던 전계대원군의 사당을 영평군의 집으로 옮겼다.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박영효의 혼례가 이곳에서 치러지기도 했다.
1752년 사도세자의 승은을 입은 숙빈 임씨는 은언군과 은신군을 낳은 후 양제(세자의 후궁으로 가장 높은 종2품)가 되었다.
그러나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은 뒤에 임씨도 폐서인이 되어 두 아들과 함께 궁궐을 나와서 전동(현재 우정총국 부근 종로구 견지동을 말하나 양제궁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에 살게 되는데,
‘양제궁’이라 불렀다.
영조가 은언군의 행방을 알아볼 때 ‘전동의 집’을 언급했던 적이 있다.
영조는 죄책감에서 인지 사도세자의 서자들에게 관대했다.
그러나 은언군과 은신군은 젊은 나이에 늙은 재상이 타는 남녀(藍輿)를 타고 다니고,
시전 상인들에게 수백 냥의 빚을 지고 갚지 않는 등 방자한 행동을 하여 제주도 대정현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양제궁은 문을 닫고 사람의 출입을 금했다.
1771년4월12일,은신군이 제주도에서 사망하자,
놀란 영조는 즉시 가시울타리를 철거하게 하고 시신을 운구하도록 한다.
그리고 즉시 은언군을 석방하라는 명을 내리고 은언군이 살 두어 칸의 집을 지급하고 생모 임씨와 노복의
왕래를 허락했다. 이때 마련해준 집이 당시 과천 흑석리에 있은 듯하다.
정조는 이복 동생 은언군을 서용하여 수릉관으로 삼았으며 관직을 회복 시켜 주었다.
은전군에게도 직첩을 주고 서용했다.
숙빈 임씨는 정조 즉위년에 복작되었고 고종 때 가서 숙빈으로 추봉되었다.
숙빈 임씨는 1771년7월12일까지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은신군의 흑석리 집은 당시에 과천현 흑석리였던 것이다.
1776년 홍봉한의 이복 동생 홍인한과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이 은전군을 추대하여 역모를 꾸몄다.
이들은 은전군의 생모 박씨가 장헌(사도)세자에 의해 죽었으므로 그 원한을 이용해 은전군을 왕으로 추대
하려고 한 것이다.
신하들이 추대된 은전군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정조는 은전군을 지켜주었다. 그
러나 은전군은 1777년에 홍상범 등에 의해 다시 왕으로 추대되어 다음 해에 왕명을 받고 자결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은언군은 정조 등극 후 홍록대부까지 올라 세 아들인 이담(상계군),이당(풍계군),이광(전계군)과 편안히 살았다.
그러나 1786년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 이자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씨가 죽자,
은언군의 장자 상계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았다.
풍산 홍씨의 대를 이었다고 해서 상계군을 완풍군으로 봉했으며 가동궁이라 했다.
홍국영이 죽은 뒤로도 역모는 이어졌고 상계군은 또다시 역모에 연루되었다.
이에 집안에서 폭사(스스로 참혹하게 죽음)하였다고 하는데 한때 아버지 은언군이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후 은언군은 다시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12년 후인 1798년,은언군이 유배지에서 도망쳐 도성을 드나 든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이에 정조는 인륜으로 형제를 만나는 것이며 10여 차례 만났다고 이야기한다.
그를 한양으로 들이고 싶지만 1년에 한번 정도 만나는 것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후 정조가 죽고,1801년 신유박해 때 대왕대비가 사학에 연루된 은언군 이인의 처와 며느리를 사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천주교인으로 순교하자 은언군은 강화도 귀양지에서 사사되었다.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양제궁에 유폐되어 있을 때 천주교 신자인 강완숙을 알게 되었고,
그녀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그리고 청나라 주문모 신부에게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또한 신유박해 때 양제궁에 주문모 신부를 피신시킨 일이 양제궁의 궁녀 서경의의 밀고로 알려졌다.
송마리아와 신마리아는 결국 사사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전국에서 많은 신자가 신앙을 증거하다가 목숨을 잃었는데, 송씨와 신씨는 유일한
왕실의 순교자가 되었다.
은언군과 부인 송씨의 묘는 진관외동에 있었는데 묘는 유실되고,
묘비는 1989년 전계대원군의 후손 이우영의 기증으로 절두산 순교성지로 옮겨와 조선 왕실의 첫 순교자를 기념하고 있다.
은언군이 죽고 난 뒤, 이당(풍계군)과 이광(전계군)은 강화도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세월이 지나 역모에 관한 일들도 잊혀지고 효명세자가 장성하여 14세가 되는 1822년, 순조는 사촌형제들이 살고 있는 강화도 집의 가시 울타리를 철거하여 일반 백성처럼 살도록 했다.
그리고 혼사 비용을 챙겨주고 종친부가 주관하여 혼사를 거행하게 했다.
이때 풍계군은 혼인하여 1824년 익평군을 낳고 2년 후에 죽었다.
익평군은 백부 상계군의 양자로 들어갔다.
전계군도 늦은 나이에 최수창의 딸과 혼인하여 원경(회평군)과 경응(영평군)을 낳았다.
그리고 최씨가 죽자 염성화의 딸을 부인으로 들여 원범(철종)을 낳았다.
철종은 경행방 사제(누동궁)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자랐다.
그런데 1844년 무인 민진용 등이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발각되어 원경이 사사되었다.
따라서 경응과 원범은 또다시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사도세자의 자손은 이렇게 끊임없이 역모에 연관되었다.
영조 이후 아들이 귀했고 또한 요절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왕실의 후계자로 은언군,은신군,은전군과 그 자손이 추대되었다.
이리하여 사도세자의 서자와 손자들에 이르기까지 역모에 관련되어 죽임을 당했다.
그 때문에 전계군과 흥선군의 아버지 남연군은 역모로 이용되어 죽는 종친들을 봐야 하는 남다른 아픔이
있었다. 흥선군이 시중 잡배 노릇에 파락호 생활을 한 것은 이러한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철종 이원범은 11세에 부친을 잃었고,
1844년 14세에 큰형 이원경이 역모에 거론되어 온 집안이 교동으로 옮겼으며,
10여 일 후 다시 강화도로 옮겨 유배 생활을 했다.
1849년 6월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순조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19세의 강화 도령 원범은 입궁하여 덕완군에 봉해지고 왕위에 올라 철종이
되었다.
따라서 이원범이 살던 곳은 왕이 살던 잠저라 하여 ‘용흥궁’이라 불렀다.
본래의 용흥궁(강화읍 동문안길 21번길 16-1)은 ‘철종조잠저구기’라고 쓴 비석과 비각이 있는 초라한
초가집이었다.
이것을 1853년(철종 4년)에 강화도 유수 정기세가 기와집으로 개축하고,
1903년 전계대원군의 사손 청안군 이재순이 보수하여 오늘날 우리가 보는 규모의 ‘용흥궁’이 된 것이다.
철종이 태어나던 날, 실록에는 순원왕후가 꾸었던 꿈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1831년 6월17일에 경행방의 사제에서 탄생했습니다.
이때 순원왕후의 꿈에 영안 국구(김조순)가 한 어린 아이를 올리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를 잘 기르시오.’ 했는데, 왕후께서는 꿈에서 깨고 나서 그 일을 기록하여 두었던 바,
그 후 임금이 궁궐에 들어오게 되자 이를 살펴보니 의표가 꿈속에서 본 아이와 똑같았습니다.”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했고, 인척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철인왕후)로 맞아들였다. 그 뒤로 김문근이 정권을 장악하여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계속되었다.
철종은 등극 후 두 형, 회평군과 영평군을 복작하고, 영평군에게 은신군집(안국동별궁)에서 전계대원군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 또 전계대원군의 사저였던 경행방의 집을 주었다. 영평군은 청도 김씨와 혼인하고 이 집에 살았는데 익랑(대문 좌우에 이어 지은 행랑)이 많았으므로 ‘익랑골’로 불렸다. 1869년(고종 6년)에는 안국동별궁에 모셔진 전계대원군의 사당을 경행방에 있던 영평군의 집으로 옮겼다.
왕의 교육도 받지 못하고 시골 무지렁이로 살던 철종은 재위 2년 반 만에 정사를 돌보았고, 재위 14년 만인 1863년에 생을 마쳤다. 자녀는 숙의 범씨의 딸 영혜옹주만 살아남고 모두 일찍 죽었다.
1872년 고종은 철종이 남긴 유일한 딸인 영혜옹주와 부마 박영효의 혼례를 영평군의 집, 누동궁에서 치르도록 했다. 박영효는 금릉위에 봉해졌고, 관훈동 30번지 근처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동안 영혜옹주와 박영효의 집은 인사동 경인미술관터로 알려져 남산한옥마을로 이전 · 복원했다. 그러나 2010년 서울시는 경인미술관터는 민영휘 가옥의 일부이며 박영효 가옥은 그 서쪽에 있었다고 밝혔다. 따라서 영혜옹주와 박영효의 집은 그 흔적이 없어져 인사동의 일부가 되었다.
고종은 철종의 둘째 형 영평군에게 후사가 없자, 1864년 선조의 아홉째 아들인 경창군의 후손 이신휘의 아들 이순달을 계후하게 하였다. 이순달은 1899년 청안군에 봉작되었으며 청안군이 후사가 없자 다시 풍선군 이한용을, 풍선군이 후사가 없자 1908년 청풍군 이해승을 계후하게 했다. 그리고 이해승의 아들 이완주와 손자 이우영이 전계대원군의 제사를 모셨다. 이해승은 1910년 일본 정부에서 후작 작위와 은사공채(恩賜公債, 조선총독부가 국권피탈에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준 사례금)를 받았으며, 6 · 25전쟁 때 납북되어 이후 행방은 알 수 없다.
1841년 전계군이 죽자, 아버지 은언군묘 근처인 경기도 양주군 신혈면 진관에 안장했다. 신혈면 진관은 1914년 양주군에서 고양시로 편입되면서 신혈면과 하도면이 합해져서 신도면이 되었다. 1973년에 신도면 관내 구파발리와 진관내 · 외리는 서울시로 편입되어 현재의 은평구가 되었다.
철종은 등극하면서 생부 전계군을 전계대원군으로, 아버지의 첫째 부인 최씨를 완양부대부인, 생모 염씨를 용성부대부인으로 추봉했다. 묘도 다시 정비하고 신도비를 세웠으며, 1856년에는 전계대원군과 완양부대부인의 묘를 포천시 선단동으로 옮겼다. 이후 용성부대부인묘, 회평군묘, 영평군묘가 옮겨져 일가가 함께 있다.
그랜드힐튼호텔이 자리한 홍은동 선산은 영평군에게 사패지(賜牌地, 왕이 내려준 땅)로 내려져 후손에게 내려왔다. 현재에도 이 부근의 산 대부분이 이우영의 소유다. 일제강점기와 8 · 15광복을 거치면서 왕족의 재산은 모두 국가에 귀속되었지만 덕흥대원군 · 전계대원군 · 흥선대원군 후손의 재산은 개인 재산으로 분류되었다. 그 때문에 고종의 직계 후손이 모든 재산을 빼앗길 때, 이들은 재산을 지킬 수 있었다.
이해승의 아들 이완주는 신봉원과 혼인하여 이우영, 이우진을 두었으나 일찍 죽었다. 신봉원은 1968년 학교법인 동고학원을 설립했고, 1969년 홍은동 선산 아래 홍은동 산 11번지 141호(연희로 37안길 51)에 정원여자중학교를 개교하고 이사장에 취임했다. 1995년에는 둘째 아들 이우진이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이해승의 며느리이며 동고학교재단 명예이사장 신봉원은 2010년 4월까지 살았다.
이우영은 1988년 5월에는 선산이 있던 홍은동 땅에 병원을 지으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침 한국에 취항하는 스위스항공에서 호텔 사업을 제안해옴으로써 스위스그랜드호텔을 세웠다. 그러나 2001년 세계적인 항공업계 불황으로 스위스항공이 파산하면서 2002년 4월 그랜드힐튼서울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계대원군이 살았고 철종이 태어났으며 영평군이 살았던 누동궁이 있던 곳은 궁동 또는 궁골이라 불렀다. 1914년에는 궁동, 익동, 돈녕동, 니동, 한동이 합하여 익선동이 된다.
누동궁터인 종로구 익선동 166번지 전체 넓이는 약 8,264㎡(2,500평)로, 남북으로 긴 형태의 궁이었다. 의친왕의 5녀 이해경은 2005년 9월 〈이코노미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누동궁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와 가끔 큰집이라 불리는 누동궁에 갔어요. 당시 이우영 회장의 조부인 이해승 씨가 집주인이셨죠. 들어가는 입구부터 조경이 잘 되어 있었고 경치가 수려했죠. 출입문 입구에는 양쪽으로 커다란 장식물이 나열되어 있어서 마치 중국의 성에 들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동궁 주변에서 중국식 석물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문득 이것들이 이해경이 이야기하는 누동궁 입구의 조경 일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승이 팔고 나간 종로구 익선동 166번지에는 한옥마을이 조성되었다. 구 등기부등본을 보면 1930년대에 익선동 166번지에서 분할되어 옮겨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누동궁은 분할되어 행랑길 · 누동궁 1길 · 2길로 나뉘었다가 다시 누동궁 1길 · 2길 · 3길로 나뉘었는데, 2010년 새 주소가 발표되면서 수표로 28길로 통합되었다. 이 한옥들은 아직까지 현존하고 있으나, 서울시는 2004년에 익선동 일대에 ‘익선동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이곳에 아파트, 관광호텔, 오피스텔, 근린생활시설이 들어올 예정이다.
언젠가 누동궁은 이 사업으로 그 흔적들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나마 남아 있던 ‘누동궁길’이라는 이름조차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도로명 주소가 편리한 점도 있겠지만, 그 지역의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길 이름들이 모두 사라져버려 과거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사람으로서 답답하기 그지없다. 나는 주변의 고층 건물이나 빌라에 올라가 누동궁의 흔적인 한옥마을을 바라보며 사라지기 전의 누동궁을 눈으로 가슴으로 새겼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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