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경근 2016.12.16.월요일,맑음
장경근(생졸; 1911년5월18-1978년7월25일)은 평안남도 용천 에서 태어나 부천에서 성장
하였다.
판사 출신의 정치인이며 법조인인 장경근은,
제1공화국 내무부 장관과 제3,4대 민의원 의원을 지냈다.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에 재학하던 중 일본고등 문관시험에 합격하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지방법원과 검찰국의 사법관 시보로 법조 생활을 시작하여,
경성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 판사를 지냈다.
광복 후 미군정 시기에 경성 지방법원장에 임명되었다가,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제정되면서 일제 강점기 친일파이자 고위 관직 경력자에 대한 여론이 부정적인 쪽으로 흐르자 사임했다.
초대 대통령이던 이승만은 1949년에 장경근을 내무부 차관보와 차관으로 발탁했다.
장경근은 이승만을 설득해 허락을 받고 '반민특위'를 해체하게 만들게했다.
장경근이 내무차관으로 재직 중 그의 지시로 친일 경찰 세력들은 반민특위를 습격하였고,
이 문제가 제헌 국회에서 논의 되었을 때 반민특위 습격은 불법적인 유사 경찰 조직을 무장
해제하기 위한 정당한 것이었다고 답변했다.
또한 반민특위는 공산주의 단체라고 답변을했다.
분노한 국회는 장경근의 퇴진과 처벌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반민특위는 상해 및 공무집행 방해죄로 그를 고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반민특위는 크게 위축되었고,
1949년9월, 반민법 3차 개정을 거쳐 결국 중단되었다.
조봉암이 이승만과 결별하고 안호상,이범석 계열은 몰락하면서 ,
장경근은 이후 제1공화국의 핵심 관료이자 집권당인 자유당의 손꼽히는 이론가로 성장했다.
이승만의 종신 집권제를 추진했으며,자유당 의원총회에서 반대한 김두한 의원에게 주먹을 맞기도 했다.
제1공화국 후반기에 자유당이 창당된 뒤에는 이기붕 계열의 강경파로 활동했다.
1953년,1958년,1959년,1960년 네 차례에 걸쳐 각각 한일 회담의 정부 대표를 맡았을
정도로 일본통으로도 인정 받았다.
이 시기 야당 탄압 등 여러 정치공작 사건의 배후에 있었다거나,
이승만에 대한 과잉충성을 보였다는 평도 있다.
1960년3.15 부정 선거에 깊이 관여했다.
당시 직책은 자유당 선거대책 위원회의 기획 위원 겸 상임 위원회 제7부장(정책부장)이었다.
장경근은 경찰력을 동원하는 부정 선거 방법을 기획하여 치안 국장을 통해 하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4.19혁명과 5.16군사 정변이 일어나면서 부정 선거 책임자로 지목되어 구속되자,
재판 계류 중 입원해 있던 병원을 탈출해 일본으로 밀항했다.
이후 18년 동안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지병이 심해지면서 1978년 귀국하였고 귀국 직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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