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1929년,만주지구 공산주의 청년동맹 서기로 활동하다,
10월에는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길림 감옥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다.
1932년4월,항일 유격대를 조직하여 장백산맥과 송화강 유역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1936년,중국 공산당 지도하에 있는 항일 유격부대와 연합하여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
제1로 2군의 지휘 간부로 활동하였다.
제2군은 주로 조선 사람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도 하였다.
1936년,통일 전선 조직이며 지하 혁명 조직인 '조국 광복회'를 조직하고,
국내에 광복회 지하 조직망을 구축하는 공작을 전개하였으며,
1937년6월,국내 조직과 연계하여 압록강 상류인 혜산진의 보천보를 습격하였다.
두만강 일대의 국경 지대에서 유격 활동,
그 뒤 소조 활동으로 전환하면서 일본 토벌군의 추격으로 연해주 지방으로 이동,
1945년8월, 소련군의 진격과 함께 대원들을 인솔하고 원산으로 상륙하였다.
이렇게 입북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항일 유격대들은 북한 권력의 핵심 세력으로,
그리고 김일성은 처음부터 당과 국가,군의 수위에 있으면서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을 주도하였다.
1945년10월,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조직되었는데 11월에 분국의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
이에 앞서 10월14일에는 평양에서 ‘김일성 장군 개선 환영 군중 대회’가 열렸다.
1946년2월,각 지방에 조직된 인민위원회를 바탕으로
정권 기관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임시인민위원회가 반제·반봉건과 지주제를 청산하는 토지 개혁과
일본인 소유인 중요산업의 국유화를 실시하고,'남녀평등권 법령'과 '노동법'을 발표하였다.
1946년4월,김일성은 기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북조선 공산당'으로 창당해
조선 공산당 중앙(서울 박헌영)과의 관계에서 벗어났다.
1946년8월, 북조선 공산당은 북측 신민당(조선신민당)과 합당하여
대중정당인 '북조선노동당'으로 당명을 바꾸고,말에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가 실시되어
1947년2월,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다.
이 때부터는 사회주의 과도기 과업을 수행하는 길에 들어섰으며,
1948년3월,개최된 제2차 당대회에서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4월에는 56개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가 참가한 남북연석회의를 주도하였다.
같은 해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되자 내각수상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6월,남북 노동당이 합당하여 조선 노동당으로 발전하게 되자 당의 위원장이 되었고,
남북의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을 통합하여 출범한
조국통일민주주의민족전선(조국전선)의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6월25일,기습적으로 남한을 침략하여 전쟁을 일으켰으며,
6·25 전쟁 당시에 '군사위원회' 위원장과 인민군 최고 사령관으로
군사 작전과 전시 동원 체제를 통괄하였다.
1953년7월,휴전이 성립되고 동 협정의 당사자로서 서명을 하였으며,
다음날인 28일에는 북한에서 최고의 영예인 영웅칭호를 받았다.
휴전 후부터는 전후복구 건설과 함께 농업집단화와 개인상공업의 사회주의화 등
사회주의 개혁이 본격화되었는데 1956년4월,개최된 3차 당대회에서 당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3차 당대회를 전후해서 권력내에 잠재해왔던 각 계파간 대립과 갈등이 한층 표면화되자
김일성 중심의 실권파는 ‘반종파 투쟁’을 전당적으로 전개하여 반대파를 모두 숙청하고 말았다.
1961년9월,개최된 4차 당대회에서 김일성 중심의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가 확립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수령의 유일적 지도체제로 발전하게 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수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의 중심, 통일과 단결의 중심을 의미한다.
1972년12월,채택한 '조선사회주의헌법'은 김일성을 국가 주석으로 추대함으로써
수령 중심의 권력체제를 확립하고 모든 권력이 주석인 김일성에게 집중되었다.
1974년2월,당5기 8차 전원회의에서는 혁명 1세대들의 제의에 의해
김정일을 수령인 김일성의 후계자로 추대하고 당의 정치위원과 비서를 겸하게 하였다.
이 때부터 김정일은 후계체제를 구축하는 사업을 전개하였고,
1980년10월,개최된 6차 당대회에서 후계자로서의 당적지위가 공식화되었다.
1980년대는 사회주의 건설의 모든 정책을 김정일이 직접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체제수호에 모든 것이 복종되었는데,
1990년5월,최고인민회의를 개최하여 국방 위원회를 신사회주의권이 붕괴된 하에서
군을 전면에 내세우는 군중시체제로 전환하였다.
처음에는 김일성을 위원장, 김정일이 제1부위원장, 오진우 부위원장,
그리고 혁명1세대들을 위원으로 하는 국방위원회를 구성하여
군을 전면에 내세우는 군중시체제로 전환하였는데 1993년부터는,김정일이 위원장직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군사 지도권을 주석 김일성의 권한으로부터 분리시켜 국방 위원장(김정일)이 갖도록 하였다.
이는 김정일이 군중시체제의 실질적인 관리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무렵 김일성은 대원수 칭호를 받았다.
1991년9월,북한은 유엔에 가입함으로써 국제적으로 안전보장을 확보하게 되었고,
미·일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서둘렀다.
그리고 남북간에는 총리를 대표로 하는 고위급회담이 개최되어
1991년12월,'화해와 협력 및 불가침에 관한 기본합의서'가 채택되었는데
1992년 2월 2일 발효를 위한 비준 서명을 하였다.
1993년6월부터는,북미간에 북한의 핵개발 문제를 가지고 고위급 회담이 진행되었으나
쌍방의 이해관계의 차이로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던 차에,
전 미국대통령인 카터가 평양을 방문, 김일성과의 회담을 통해 해결의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이 회담에서 남북 정상회담에 합의, 부총리급의 실무접촉을 통해 모든 실무적 문제에 합의하였으나
김일성 사망으로 무기 연기되고 말았다.
1994년7월9일 정오,북한은 방송을 통해
김일성이 1994년 7월 8일 2시에 심근경색증으로 사망 했음을 보도하였다.
이 날 김정일·오진우·강성산 등 273명으로 국가장의 위원회가 구성되고
조의식(7.11)과 영결식(7.19)에 이어 영구를 금수산 기념 궁전에 안치하였다.
1997년7월,만 3년상 탈상 후 북한은
김일성이 출생한 1912년을 원년으로 하는 ‘주체’연호를 쓰게 하고
생일날인 4월15일을 태양절로 정하였다.
이는 김일성이 1950년대 중반에 주체의 확립 문제를 강조하고,
그 후 정치에서 자주,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노선을 견지 하였으며,
또한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정식화하여
그를 구현해 나가는 ‘주체의 나라’·‘우리식사회주의’를 확립하였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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