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       2019.12.24.화요일,맑음

동백림사건 독백림 간첩단 사건

1967년 7월 8일

종결1969년 3월 31일

윤이상, 이응로, 민족주의비교연구회

1967년 7월 8일에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대규모 공안사건.


1967년7월8일부터 8월17일까지 7차에 걸쳐 중앙정보부는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 적화 공작단’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문화 예술계의 윤이상,이응로,학계의 황성모,임석진 등 194명이 대남 적화공작을 벌이다

   적발되었다”고 발표했다.

 

1958년9월부터 관계자들은 동백림 소재 북한 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이적 활동을 한 데 이어 일부는 입북 또는 노동당에 입당하고 국내에 잠입하여 간첩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또한 중앙정보부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민족주의비교연구회'도 여기에 관련된 반국가단체라고 발표했다.

이후 사법부는 동백림 및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을 별도 심리하기로 결정하고

1969년3월까지 동백림 사건 관련 재판을 완료하여 사형 2명을 포함한 실형 15명,집행유예 15명,선고 유예 1명,형 면제 3명을 선고했다.

중앙정보부의 발표와 달리 동백림 사건 관련자 중 실제로 한국에 돌아와서 간첩 행위를 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보복이 두려워서 또는 단순한 호기심에 북한에 잘 도착했다는 신호를

보낸 정도였다. 중앙정보부는 대규모 간첩단이라고 하여 무려 203명의 관련자들을 조사

했지만,실제 검찰에 송치한 사람 중 검찰이 간첩죄나 간첩미수죄를 적용한 것은 23명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실제 최종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된 사람은 1명도 없었다.


이러한 재판 결과는 동백림사건 수사가 강제 연행과 고문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학생과 교민들의 강제연행은 외교적 마찰을 불러 일으켰다.

서독과 프랑스 정부는 영토주권의 침해라고 강력히 항의하고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박정희 정부는 1970년 광복절을 기해 서독 및 프랑스의 의견을 수용하여 사건 관계자에

대한 잔여 형기 집행을 면제,정규명,정하룡 등 사형수까지 모두 석방했다.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2006년1월26일,정부가 단순 대북 접촉과 동조 행위를 국가 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여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과장했다고 밝혔다.

또한 사건조사 과정에서의 불법 연행과 가혹행위 등에 대해 사과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1.21 사태/191224  (0) 2019.12.24
⊙ 윤이상/191224  (0) 2019.12.24
⊙ 제7대 국회위원 선거 실시/191224  (0) 2019.12.24
⊙ 제6대 대통령 선거 실시/191224  (0) 2019.12.24
⊙ 유진산/191224  (0) 2019.12.2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