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2019.12.27.금요일,맑음

박종철고문치사 사건은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1월14일에 발생한 사건으로,

경찰은 서울 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을 체포하여 고문하다가 사망케 하여

공안당국의 은폐에도 불구하고 폭로되어 1987년 6월 항쟁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전두환 정권의 탄압과 그에 대한 저항은 198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 더해가고 있었다.

경찰은 ‘민주화 추진위원회 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후배인 박종철을 불법으로 체포했다.

1987년1월14일,경찰은 치안본부 대공 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박종철에게 

   폭행과 고문을 가해 사망케 했다.

1987년1월15일,강민창 치안 본부장은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다.

   부검의의 증언과 언론 보도 등으로 의혹이 제기되자 사건발생  5일 만인 19일에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했다.수사 경관 조한경과 강진규 등 2명을 구속했다.

   정부는 내무부 장관 김종호와 치안 본부장 강민창의 전격 해임과 고문 근절 대책 수립 등

   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1987년5월18일, 광주 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와 관련된 경찰의 은폐 조작을 폭로했다.

   치안 본부 5차장 박처원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 조작하였고,고문가담 경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안기부,법무부,내무부,검찰,청와대 비서실 및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참여하는 관계기관

   대책 회의가 은폐 조작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박종철 고문치사는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정권 규탄 시위를 촉발했다.

이 사건으로 1987년 6월항쟁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여 민주화 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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