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너럴 셔먼호 사건                2019.08.15.수요일,흐림

1866(고종 3년)음력7.12(양력1866.8.27),

미국의 무장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평안도 용강현 주영포 앞바다에 도착한 뒤 대동강 하구에 정박 중인

제너럴셔먼호는 조선의 퇴거 요구에 오히려 뱃머리를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 통상을 요구하며

대포를 쏘고 민간인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1866.9.5(고종3년),당시 평안 감사 박규수 휘하의 조선군 부대가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우고 선원들을

살해한 사건이다.


흥선대원군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같은 해에 조선과 프랑스와의 일어난 병인양요를 계기로 양이정책인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 한층 강화하게 되었고,이 사건은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병인양요는 병인박해 직후 프랑스의 보복으로 일어났지만,


제너럴 셔먼호 사건 자체가 미국 정부의 지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민간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가 독자적으로 벌인 사건이다.

신미양요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뒤에 5년이 지나서야 일어났다.


이 사건의 시점에 조선은 이미 병인박해로 인해 프랑스 군대가 쳐들어 온다고 예상하고 있는 시점이라

미국이 이시점을 택할 이유가 없다.

엄밀히 말해 무장상선(해적선)에 불과했던 제너럴 셔먼호가 몰살당한 것은 바로 이 해적 행위 때문이었다.


이 사건 시점에 미국 본토에서는 남북 전쟁의 참화를 수습하기에 바빳고 전임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암살 당해 부통령이었던 앤드루 존슨이 후임자로 올라 상황을 수습하던 상태였다.

대응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미 정부는 직접 탐문 조사에 나서게 된다.

이듬해인 1867년에는 와추세트호,그 다음해인 1868년에는 셰난도어호가 조선을 방문했다.

셰난도어호가 방문했을 때 조선 정부는 미국에 공식 회답을 보내 제너럴 셔먼호의 생존자가 없음을 확인

시켜 준다.

그런데 이 두 번의 방문의 목적은 정보 수집이 주안점이었기 때문에 모두 별다른 충돌없이 끝났다.

신미양요가 일어날 때까지 전혀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미국이 이 사건의 전말을 확인하는 데만 3년이 걸린 셈이다.


신미양요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지 꽤 지난 5년뒤에 가서야 발발하게 되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병인양요가 발생하였고,이후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그 이후 신미양요가 발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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