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군의회 해외연수 추태 사건         작성일자; 2020.02.29.토요일,맑음

 

2019년2월2일,

예천군의회 해외연수 추태 사건은

예천군의회에서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하여 해외 연수 중에

박종철 의원이 한국계 미국인 가이드를 폭행하고,

권도식 의원이 여성 접대부를 요구하는 등 의 물의를 빚은 사건이다.

 

박종철은 부의장이었으나 사건 이후 부의장을 사퇴했고,

예천군 주민들은 군의원 전원사퇴를 요구했다.

 

2019년2월1일,

예천군 의회 윤리 특위는 의장에도 책임을 물어

이형식 의장과 권도식, 박종철 의원에 대한 제명안을 가결해 본회의 표결에 올렸다.

본회의 표결 결과

의장은 출석 정지 30일 및 공개 사과로 징계가 감경되고,

나머지 두 의원은 제명되었다.

군민들은 전원사퇴를 계속 요구하며 이에 반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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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썬 게이트            작성일자; 2020.02.29.토요일,맑음

 

버닝썬 게이트는

강남의 나이트 클럽 '버닝썬'에서 2018년11월24일,김상교씨가 폭행을 당했지만 경찰은

오히려 김상교 씨를 가해자로 체포하고 폭행까지 하자 경찰이 클럽 측을 옹호하였다고 폭로하였다.

이를 계기로 클럽 버닝썬과 관련된 여러 의혹에 대해 언론의 제보가 이뤄지면서 드러나게 되었다. 

'버닝썬 게이트'는

나이트 클럽 버닝썬에서 벌어진 폭행,경찰유착,마약,섬범죄.조세회피,불법 촬영물 공유 혐의 등을

아우르는 대형 법죄 사건이다.

 

버닝썬 게이트에 관련하여

가수 정준영(생졸;1989년2월21일~)은 버닝썬 게이트의 공범으로 연루되어,

집단 성폭행에 가담하고 불법 촬영한 성관계 영상물을 단체 채팅방에서 유포한 혐의로

2019년11월29일,재판부 1심은 성범죄로 징역 6년이 선고되어 구속 수감중이며,

이로인해 모든 연애인의 활동이 중단되었다.

또한 이로인해 정준영을 시작으로 용준형 등 연예계 다수가 이 사건에 연루되며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가수 승리(이승현,생졸;1990년12월12일~)는 빅뱅의 멤버로

2017년 버닝썬이라는 클럽을 만들고 사업을 시작한 승리는 버닝썬 게이트의 공범으로 

불법 촬영물 유포,성범죄 알선및 성접대에 연루되어

2019년2월26일,보도를 통해 2015년12월6일,

승리가 버닝썬 직원 김씨에게 대만에서 온 외국인 투자자 일행에게 성접대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밝혀졌다.

2020년1월30일,

횡령,성매매 알선,상습도박,식품위생법 위반,외환거래법 위반,성폭력처벌법위반 등

7개의 혐의를 받는 승리는 2019년5월과 2020년1월30일,

두 차례 걸친 구속영장은 사법부에의해 모두 기각되고 불구속 기소로 마무리 되었고

2020년3월6일,군대에 입대 할 예정이며,

입대 후,군인 신분이 되면 사건도 군사법원으로 이관되는 현행법에 따라 군사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2019년3월11일,연예계 은퇴를 선언했다.

 

양현석(생졸;1970년1월9일~)은 그룹 서내지와 아이돌의 멤버로 연예기획자며,

YG엔터테인먼트의 대주주로

2019년6월14일,

마약,성접대 및 버닝썬 사건으로 인하여 YG엔터테인먼트의 대표자 자리에서 내려왔다.

양혁석은 가수 비아이에게 마약 혐의를 했다고 말하라고 협박 한것으로 구속되었다.

 

검찰총장 윤총경은 버닝썬 게이트 공범자로써 가수 승리 측과 유착했다는 의혹으로,

승리 등이 있던 단체 대화방에서 `경찰총장`으로 불린 인물이다.

 

2019년10월7일,

중앙지검은 윤 총경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특가법)상 알선수재,자본시장법 위반,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증거인멸 교사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승리와 사업 파트너인 유인석 유리홀딩스 대표가

지난 2016년 강남에 문을 연 주점의 식품 위생법 위반 신고가 들어오자

강남 경찰서를 통해 단속 내용을 확인하고 유 대표에게 알려준 혐의를 받아 지난 2019년6월에 검찰에 송치됐다.

또한,검찰은 윤 총경이 특수 잉크 제조업체인 큐브스의 정 대표로부터 뇌물을 수수한 정황을 새로 포착했다.

큐부스 정 전 대표는 승리 측에 윤 총경을 소개해준 인물이다.

검찰은 정 전 대표가 지난 2016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및 횡령, 배임 혐의로 고소돼

수서 경찰서의 수사를 받는 과정에 윤 총경이 개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경찰은 정 전 대표의 혐의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정 전 대표는 검찰 조사에서 수사 무매 대가로 윤 총경에게 자신이 운영하는 비상장업체

큐브스 주식을 무상으로 줬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 총경이 조국 법무부 장관과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에서 1년간 함께 근무한 점도 이목을 끌었다.

 

버닝썬 공동대표가 혐의를 부인 해 왔던  미성년자 출입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전직 경찰관에게 돈을 건냈다고 인정하였다.

2019년3월12일,

조모가 버닝썬 클럽 직원으로 일하면서 마약에 손을 댄 혐의를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다.

 

 

 

 

 

 

 

 

 

충남지사 안희정 구속         작성일자; 2020.02.29.토요일,맑음

 

2019년2월1일,

대법원은 충남지사 안희정에게 징역 3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에서 구속했다.

죄명은 수행비서를 업무상 위력으로 간음한 혐의로 현재 복역중이다.

 

충남지사 안희정(생졸;1965년5월1일~)은 충북 논산 출신으로 2남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1977년,논산의 구자곡초등학교,1980년,연무중학교를 졸업 후 

1980년,대전 남대전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대전 제일서점이 준 민주화 잡지 "평천하"를 읽었다는 이유로 입학 한 지 7개월 만에 제적 되고 말았다.

이후 서울의 성남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자퇴하고,

대학생들과 같이 국풍81(문화축제) 반대 운동에 참여하던 중 

학생 운동을 하기 위해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여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 후

1983년,고려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4학년 때 주동으로 고대 내의 운동권 서클 14개 통합하여 '애국 학생회'를 조직하고,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초석을 놓는데 참여하였다.

1988년,노태우 정부시절 12명으로 조직한 '반미 청년회 사건'으로 10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1989년,

김영춘의 소개로 통일 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측근인 김덕룡 의원실 비서로 일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1989년1월,

부산 출신 국회의원인 김영춘의 소개로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측근인 김덕룡 국회의원비서로 일하게 됐다.

1990년1월22일,

당시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과 제2야당 통일민주당(민주당),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공화당)이 합당하고 민주자유당을 출범 시킨 3당합당이 일어 났을 때

이기택,김정길,장석화,박찬종,홍사덕,이철,노무현 7인이 3당 합당을 거부하며 새 민주당을 결성했다.

통일 민주당의에 있던 당직자 중 안희정을 포함한 18명만이 잔류하게 되었고,

1991년1월부터 1992년4월까지,이철 사무총장의 비서로 일하게 됐다.

 

1992년3월24일,

제14대 총선에서 이철이 당선을 끝으로 4월에 비서직을 사임하고 출판사 영업을 했다.

제적 되었던 고려대에 복학하여 졸업 후

1994년6월부터,

이광재의 권유로 제14대 총선에서 낙선한 노무현이 만든 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했고,

2002년12월19일에 실시한 제16대 대선에서 당선한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대통령 후보 캠프에서

정무팀장을 지내며 당선시키는 데 일조했다.

2003년12월,

검찰은 태광 실업 박연차 회장으로 부터의 금품 수수,삼성으로 부터 대선 자금 불법 수수 혐의로

기소되어 2004년9월 염동연과 함께 징역1년을 선고 받아 서울 구치소에서 복역했다.

그 후 노무현의 참여 정부 임기 동안 공직을 맡지 않았다.

2007년4월27일,

노무현 대통령의 이병환 전 비서실장이 최측근 인사들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우며 조직한 '참여 정부 평가 포럼'을 출범 시키고

상임 집행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 후 '참여정부평가포럼'은 같은 해 12월28일에 활동을 종료하였다

2008년7월6일,

민주 통합당의 최고 위원으로 선출된 후

지방 자치 실무 연구소의 맥을 잇는 '더좋은 민주주의 연구소'의 설립을 주도했다.

2010년6월2일,민선으로 실시한 제5회 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의 박상돈 후보를 누르고 제36대 충남 도지사에 당선되었고,

2014년6월4일,민선으로 실시한 제6회 지방선거에서도

새누리당의 정진석 후보를 누르고 제37대 충남 도지사에 재선되었다.

2018년3월5일,

안희정 비서로 근무한 김지은이 2017년 6월말부터 8개월 동안

안희정 충남 도지사로 부터 4차례 강제적인 성관계와 수시로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하고 고소 했으며,

'더좋은 민주주의의 연구소'의 여성 직원도 고소장을 제출했으나,

2018년4월11일,

재판부는 불구속 기소 했으며,결심 공판에서 징역4년을 구형했고,

2018년8월14일,

재판부 1심은 안희정 충남 도지사의 모든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2019년2월1일,

재판부 2심은 안희정 충남 도지사에게 징역3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되어 현재 수감 중이다.

 

 

 

 

 

 

경남 도지사 김경수 구속          작성일자; 2020.02.29.토요일,맑음

 

2019년1월30일,경남 도지사 김경수는

'더불어 민주당원 댓글조작 사건(드루킹 사건)'으로

공직선거법 위반 및 컴퓨터업무방해죄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2019년4월17일에 보석을 신청하여 출소하였다.

 

김경수(생졸;1966년12월1일~ )는 경남 고성에서 4남1녀 중 장남이자 장손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진주로 이사하여

진주시에서 진주천전초등학교,진주남중학교,진주동명 고등학교를 다녔다.

재수하여 서울대 인류학과에 입학하여 재학 중 학생 운동에 참여해,

국가 보안법 혐의로 징역 2년 선고를 받아 구속되었으나,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특별 복권되고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되었다.

 

1996년,대학에서 만난 전남 신안 출신의 후배인 김정순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이 있다. 

노무현의 정부의 '마지막 비서관'으로 문재인 대통령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2016년4월13일,제20대 총선에 더불어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018년4월14일,

2018년3월,경찰이 압수 수색 당시 더불어 민주당원 김동원(필명: 드루킹) 등 3명은

이동식 저장 장치인 USB를 변기에 빠트리는 등 디지털 기록들을 황급히 지우려는 증거 인멸 시도 때문에

긴급 체포했다.

경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디지털 증거 자료 분석 과정에서 김경수 의원을 포착했다.

범인의 스마트폰에서 더불어 민주당 김경수 의원과 수백건의 메시지를 주고받은 사실이

확인되자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 회견을 열어 자신에 관한 보도를 해명했다.

김경수는 총선이 열린 2016년부터

인터넷 댓글 조작범 김동원(필명: 드루킹)을 만나

범인이 운영하는 파주의 느릅나무 출판사 사무실을 방문하였다고 주장했다.

김경수는 댓글조작 사건의 범인 김동원(드루킹)이 일본 오사카 총영사로 청탁받아

청와대에 추천한 것은 사실이지만,청와대에서 적합지 않다고 연락을 받아 이를 전해 줬다고 해명했다.

2018년4월19일,

서울지방경찰청은 2016년11월부터 2018년3월 사이에

김경수 의원이 김동원(드루킹)에게 메시지가 보내진것이 확인이되었고,

내용은 '문재인 인터뷰', '반기문 봉하行에 친노 불편한 시선', '문재인이 여성 표심에 올인

한다' 등 모두 직·간접적으로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지지에 관련된 것이었다.

2017년4월26일부터 5월8일까지,

대선 직전에 김경수의원이 댓글을 조작한 김동원(드루킹)에게 보낸 네이버 댓글 내용은

대부분 문재인 지지 내용이었다.

2018년6월13일,지방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경남 도지사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8년8월2일, 특검은 김경수 경남도지사의 집무실을 압수 수색하였다.

2018년8월6일, 특검의 조사에 출석하게되어

김경수 경남 도지사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마찬가지로 피고인 신분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2018년12월12일,

김경수 경남 도지사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에 이어 '모든 당직을 내려놓고 백의종군 하겠다'고 선언했다.

2018년12월28일,특검은 '더불어 민주당원댓글조작사건'으로 김경수에 대해 징역 5년형을 구형하였다.

2019년1월30일,재판부 1심 공판에서 김경수가 드루킹 일당의 댓글 조작에 가담하였다고

판단하여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함에 따라 구속되어 직무 정지 상태가 되었으며,

박성호 경남 행정 부지사가 도지사직을 대행하게 되었다.

2019년4월17일, 보석으로 출소하게 되었다.

 

 

 

 

 

 

경기도지사 이재명             작성일자;  2020.02.29.토요일,맑음

 

경기도지사 이재명(생졸;1964년12월22일~)은 변호사 출신으로

민선 5·6기 경기도 성남 시장과 민선 7기 경기도지사다.

 

 

경기도지사 이재명은 경북 안동에서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 후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중·고등학교는 다니지 못했다.

1976년부터 1981년까지,

경기도 성남시로 이주하여 6년 동안 상대원공단에서 노동자로 일했는데

산업재해로 장애인 판정을 받아서 병역이 면제되었다.

1978년부터 고입 검정고시와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1982년,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후

1986년 졸업과 동시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89년,사법연수원 18기 수료 후 변호사가 되었다.

성남시에서 변호사 개업한 후 경기도 이천시,광주시에서 노동상담소장으로 활동하고,

시국사건·노동사건 변론 등을 맡았다.

2000년, '분당 백궁·정자지구 용도 변경' 특혜 의혹을 제기했다.

2002년, 김병량 전 성남 시장의 '파크뷰 특혜 분양' 사건을 추적60분에 폭로하는 과정에서

구속 처벌 받았다.

2004년 성남 시립병원 설립 추진위원회 공동 대표를 역임했다.

2005년8 23일,열린 우리당에 입당함과 동시에 성남 시장 출마 의사를 밝혔다.

2006년,지방 선거에서 성남 시장에 출마했으나 노무현 정권 심판론이 불거지면서 낙선했다. 

2007년,대통령 선거에서는 정동영 캠프 대통령 후보 비서실 수석 부실장으로 활동했고

2008년,총선에서는 낙선했다.

2010년,지방 선거에서 출마하여 성남 시장에 당선되었다.

2014년,제6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에서는 새정치 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연임하게 되었다.

성남 FC의 구단주를 겸임하며 수원FC와의 깃발 더비를 탄생 시키기도 하였다.

2016년 말,박근혜-게이트가 터지며 전국에서 일어난 촛불 집회에서

일명 '사이다 발언'으로 국민적 관심을 모으며 각종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선 후보 2위로 등극하였다.

2017년 3월~4월에 실시된 더불어민주앙 제19대 대선 경선에서

문재인,안희정 후보에 이은  3위로 고배를 마셨다.

2018년3월15일,경기도지사 예비 후보로 등록하기 위해 성남 시장직을 사임하여,

제7대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남경필 자유 한국당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었다.

2003년7월1일,무고, 공무원 자격 사칭 혐의로 벌금 150만원을 선고받았다.

2011년 4월 28일 대법원 3부(주심 박시환 대법관)는 공직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이재명에게

벌금 5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공직 선거법은 예비 후보자의 경우 지하철역 구내 그밖의 중앙 선거 관리위원회규 칙으로 정하는

다수인이 왕래하는 공개된 장소에서 명함을 주거나 지지를 호소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으나, 

이재명은 2010년 4월 성남시 수정구에 있는 지하철 8호선 산성역 구내에서

예비 후보자 신분으로 명함 300장을 배포했다.[

2018년7월4일, 성남 중원 경찰서는 이재명을 정보 통신망 이용 촉진및 정보 보호등에 관한

법률위반(명예훼손), 모욕 혐의로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하였다.

2017년9월, 성남시장으로 재직하던 이재명은

성남시 의회 임시회 본회의에 상정한 29억여원의 고교 무상교복 예산안이 부결되자,

다음 날 페이스북에 ‘무상 교복 네 번째 부결한 성남시 의원들 이십니다’라는 제목의 글과

함께 상임 위원회에서 반대한 의원 8명의 이름과 지역구를 공개했다.

2012년, 이재명 시장 셋째형인 이재선 공인 회계사는

이재명이 이재선의 부인인 형수 박아무개와 집안 문제로 말다툼하는 과정에서 욕설을 했다며

전화 녹음파일을 언론 등에 공개했다.

수원 지방법원은 8월 이재명 시장과 어머니 구호명이 이재선을 상대로 제기한 사생활에 관한

사적 대화 공개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위반 행위시 1회당 50만 원을 지급 하라고 결정했다.

하지만 이재명 시장이 재선에 도전한 2014년 지방 선거에 이어,

2017년 유력 대선주자로 떠오르면서 당시 편집된 대화 녹음 파일이 다시 인터넷으로 퍼졌다.

이재명 시장은 지난해 페이스북 등을 통해 형수에게 욕설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당시 친모에게 폭행과 폭언을 한 친형과 이를 편드는 형수에게 항의하는 과정이었다고 해명했다.

아울러 이 시장은 자신의 가족사까지 구체적으로 공개하면서,

이재선이 성남시장인 동생의 공적 권한을 이용해 사적 이익을 취하려 해

이를 막으려다 형제 간 갈등이 커졌다고 말했다.

2016년11월22일, 이재선은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의 피의 사건 중

존속상해 및 존속협박 혐의가 무혐의처리되었음을 공개하였고

형수 측은 이 시장이 욕을 하게 된 계기라고 하는 친모 폭행 관련 사건이 발생한 시점은

2012년 7월 중순경이고,

이 시장이 형수에게 욕설을 한 문제의 녹취는 2012년 6월 초중순경이므로

욕설을 하게 된 경위에 대한 이 시장의 설명은 사실과 다르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지사는 형인 이재선 씨를 정신 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는 데 관여한 의혹을 받고 있다.

바른미래당은 2018년6월10일,

방송토론 등에서 형을 정신 병원에 강제 입원 시키려 한 사실과

배우 심부선 씨를 농락한 사실을 부인한 공직 선거법상 허위 사실 공표죄로 고발하였고,

경기 분당경찰서는7월11일,분당보건소를 압수 수색하였다.

이후 7월27일, 추가 압수수색을 시행하였다.

 2018년10월12일, 경찰은 공직 선거법 위반 고발 사건과 관련해 주거지와 사무실 압수수색을 진행하였다.

2018년 12월 11일, 수원 지검 남부지청은 친형 강제 입원 관련 직권 남용 권리 행사 방해 혐의로 기소했다. 

2019년 4월 25일, 검찰은 직권 남용 권리 행사 방해 혐의에 대해 징역 1년 6월을 구형했다.

2019년 5월 16일, 수원지법 성남지원 제1형사부는 직권 남용 권리 행사 방해 혐의에 대해 1심 무죄를 선고했다.

 

 

일본 신일철주금 강제징용 소송 사건      작성일자; 2020.02.29.토요일,맑음

 

2018년10월30일,

한국의 대법원은 여운택,신천수,이춘식,김규수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에게 1인당 1억원씩 배상하라고 최종 판결했다.

 

이번 판결은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한 지 13년 8개월 만이자,

재상고심이 시작된 지 5년2개월만의 판결이다.

원고 4명 중에서 3명은 사망했다.

휠체어를 타고 온 유일한 생존자 이춘식 할아버지는 98세였다.

 

1997년12월24일,

강제징용 피해자 여운택,신천수 씨가 오사카 지방재판소에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2003년10월9일,

일본 최고재판소 상고 기각 판결

2005년2월28일,강

제징용 피해자 여운택,신천수,이춘식,김규식 씨는 서울지법에 신일철주금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2013년7월10일,

서울고법은 신일철주금이 1명당 1억원씩 손해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

2013년8월,

신일철주금이 불복해서 대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양승태 대법원장과 박근혜 대통령과 상고심 재판이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다.

2013년12월, 원고 여운택씨 사망

2014년10월, 원고 신천수씨 사망

2018년6월, 원고 김규수씨 사망

2018년10 30일,

한국의 대법원은 신일본제철(신일철주금)이 강제징용 피해자 4명에게 1인당 1억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인력 확보를 위해 많은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1938년4월1일,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고 5월5일부터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인의 반발을 우려하여 지원을 가장한 노동력 징발을 추진하였다.

1941년12월6일,

필요한 노무를 확보하고 통제하기 위한 노무조정령을 제정하여 직접 지배 시책을 시행하여

징용제도로서 전쟁 수행에 필요한 노동력의 부족을 보충하였다.

조선총독은 강제 동원을 위해 마을 단위까지 총동원연맹을 만들었는데 총재는 조선 총독이었다.

1943년,당시 조선의 가구수는 487만 8,901호였고,총동원연맹에 소속된 사람은 457만9,162명이었다.

환산해 보면 약1가구당 1명이다.

총동원연맹 통해 물자와 인적자원을 강제로 통제,동원하였다.

1942년,근로보국대를 창설하여 한국인 강제 동원의 초석을 다졌고,

1944년9월,국민 징용령을 한국인에게도 확대 적용하여 강제적 징용을 실시하였다.

전쟁을 위한 노동자로 강제 징용된 이들은 사할린 등

일본의 탄광에서 강제 노역을 당하거나 군속으로 차출되어

일본이 침략한 동남아와 남여군도(미크로네시아) 지역의 군사 기지 건설이나 철도 공사에 동원되었다.

이중 상당수가 임금 없이 과중한 강제 노역에 시달렸으며 결국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전쟁 중 또는 전후 전범으로 희생되었고,

사할린의 징용된 조선인들은 냉전의 시작으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조선인 학생을 대상으로 징병을 실시하여 학도병이란 이름으로 전쟁에 동원하였다.

1965년,한일 국교 정상화 당시 정부에 따르면

노동자·군인·군속으로 강제 동원되었던 한국인 피해자는 103만 2,684명이라고 하였다.

이 통계에는 후에 알려지게 된 종군 위안부 등이 포함 되지 않아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은 800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도 징용보상책임문제가 한일 양국간 현안 중 하나이며,

일본에서는 당시 일본제국 정부에서 그러한 일을 지시 했다는 문서가 없음을 이유로

그러한 사실 자체를 부인해왔다.

일본의 일부 연구자들은 실질적으로 강제가 있었던 1944년9월부터 1945년3월까지이며,

그 이전의 채용은 강제가 아니었다고 주장하고있다.

일본 정부의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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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통령 이명박 1심 선고      작성일자; 2020.02.29.토요일,맑음 

 

2018년10월5일,

2018년3월22에 구속된 전 대통령 이명박에게 1심 재판부는,

뇌물수수,횡령,배임,조세포탈 등 혐의로

16가지 공소사실 중 7가지를 유죄로 인정하여 징역 15년,벌금 130억 원을 선고하였다.

 

 

 

 

제3차 남북 정상회담   작성일자; 2020.02.29.일요일,맑음

 

 

2018년 제3차 남북 정상회담이 9월18일부터 9월20일까지,

제3차 남북 정상 회담이 북한의 평양 직할시에서 남한 대통령 문재인과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 간에 열렸다.

 

남한과 북한 간의 정상회담은

김대중 대통령,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문재인 대통령간에 3번째로 다섯 번째의 정상회담이다.

정상 회담의 합의 사항은

비핵화 분야는 동창리의 엔진 시험장과

대륙간 탄도 미사일 발사대를 유관 기관 참관 아래 영구적으로 폐기하며,

미국의 상응 조치에 따라 영변의 핵 시설역시도 영구적 폐기를 약속하였다.

군사 분야는 판문점 선언 이행 합의서에서 채택한 군사 공동 위원회를 가동한다.

남북 간에 한국전쟁 유해 공동 발굴을 합의 하였다.

또한,남북 공동 경비구역(JSA) 내의 완전한 비무장화로,

기존에 탄창을 갈아 끼우다가 사격하는 등의 우발적인 무력 충돌 가능성을 제거하며,

향후 북측지역에 민간인도 출입 가능하도록 하는 등이 평양 공동 선언문에 합의되었다.

경제 분야는 비핵화 관련된 조건으로 올해안 서해 및 동해선 철도와 도로 착공식 하며,

서해 경제 특구 와 동해 관광 특구를 개설하며 개성 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정상화 한다.

이산가족 분야는 이산 가족 상시 면회소 설치하며 향후 화상 상봉을 추진한다.

문화 체육 분야는 2032년 하계 올림픽 남북 공동개최,

2018년,10월중 평양 예술단 서울 공연등이 합의 되었다.

비핵화를 포함하여,

군사,경제,이산가족 등 다양한 분야의 합의가 '9.19'평양 공동선언'에서 양국 정상간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제18회 아시안 게임 개막  작성일자; 2020.02.29.토요일,맑음

2018년8월18일부터 9월2일까지 15일간 열린제18회 아시안 게임은

아시아 올림픽 평의회의 주관으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팔렘방 두 도시에서 

45개국,12.000명이 40개 종목에서 462개의 메달을 놓고 벌인다.

자카르타의 아시안 게임 개최는

1962년8월24일부터 9월4일까지 16일간 열렸던 제4차 아시아 게임에 이어 두번째다.

동남아시아에서 열리는 아시안 게임은

1998년12월6일부터 12월20일까지 15일간 열렸던 제13회 태국 방콕 아시안게임 이후이후 20년 만이다.

이번 대회는 역사상 처음으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팔렘방 두 도시에서 열린다.

시범 종목으로 e스포츠 게임(온라인상)과 ,카누플로(카약) 경기가 열리며,

2022년에 열리는 제19회 아시안 게임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할 예정이다.

 

대회결과우승국 중국은 금  개,은  개,동 개,총  개로 종합우승하였고,준우승국은 일본으로 금개,은 개,동 개,총 개로 준우승하엿으며한국은 금 49개,은 58개,동 70개,총 177개로 종합 3위를 하였다.


 

 

정의당 원내대표 노회찬 투신 자살      작성일자; 2020.02.29.토요일,맑음

2018년7월23일,

정의당 원내 대표인 노회찬은 노동운동가 출신 진보 정치인으로

정의당 원내대표 등을 지내며 진보 진영의 대표 주자로 활동했으나

드루킹 사건에 연류되어 불법 정치 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특검 수사 중에 신당동 한 아파트의 17층과 18층 사이에서 투신 자살하여 사망했다.


노회찬(생졸; 1956년8월31일~2018년7월23일)은
아버지 노인모와 어머니 원태순 사이에서 1956년 부산에서 2남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69년,초량 초등 학교,1972년,부산 중학교 졸업 후 부산고 등학교 시험에 낙방하고 재수를 하여

1973년에 경기고등학교에 입학 했다.

고1 때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제작.배포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다.

이시기에 함석헌,백기완,선우휘 등 저항적 지식인들을 만나게 된다.

당시 경기고에서 함께 운동을 했던 동기들이 정광필,이종걸 등이다.

1976년,경기고등학교를 졸업 한후 대학입시에 떨어지자 군대를 지원했다.

1979년,군복무를 마친 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1980년5월18일,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큰 영향을 받고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1982년,노동운동을 하기위해 용접 자격을 취득하여 기아 자동차에 입사 하였으나

위장 취업신분인 것이 탄로나 해고 당한다.

1982년부터 각종 시위를 주도하고 불온 문서를 배포한 혐의로 수배되어 긴 수배 생활이 시작 되었다.

1983년, 고려대를 졸업 후 노동생활을 하던 중

1987년6월10일부터 6월29일까지 일어난 6월 항쟁을 맞이하게된다.                         

1987년6월10일,뒤이어 일어난 노동자 대투쟁은

인민 민주주의 노동자연맹(인민노련)을 출범케하는 계기가 되어 인천,부평에서 창립을 했다.

인민노련은 노동자 중심의 진보 정당을 조직의 목표로 삼았다.

1987년12월19일,제17대  대선에서 백기완을 대선 후보로 추대했으나 야권 단일화를 위해 후보를 사퇴하게 된다. 이후 인민노련은 '노동계급','삼민동맹','안산노련'등을 규합하여 전국적인 조직화되었다.

1988년12월, 노회찬은 인민노련 중앙위원 활동을 주도하던 중 김지선(현 가정폭력상담소 소장)과 결혼했다.

노회찬과 함께 '인민노련' 활동을 했던 사람으로는 송영길 민주당 국회의원,신지호 한나라당 국회의원,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조승수진보신당 국회의원 등이 있다.

1989년12월24일,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사건으로 구속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 되었다가

3년만인 1992년에 만기 출소했다.

1991년7월,노회찬의 복역 도중

인민노련은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고

'창준위' 대표로 사회민주주의연대의 주대환이 되었다.

'한사노당 창준위'는 기존의 지하 정당 노선을 탈피하고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진보정당 결성을 추진하게 된다.

 

1992년4월13일,'한사노당 창준위'는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로 이름을 바꾼 뒤

'민중당'과 통합한 '통합민중당'은 제20대 총선 참패하고 해산 당한다.

민중당 소속인 김문오.이재오는 진보정당 운동을 포기하고

김영삼의 영입을 받아들여 '민주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1992년4월15일,진보정당 운동을 지속 해나가야 한다는 사람들이 모여

'진보정당 추진위원회(진정추)'를 결성하였으나 진보정당을 당장 건설하기에 역량이 부족하여

1992년12월19일에 실시되는 제14대 대선에 대응하기로 한다.

1992에 출소한 노회찬은 '진정추''백기완 선거대책 본부' 조직 위원장으로

1992년12월19일제14대 대선에서 활동하다 백기완이 1%의 지지를 얻고 패배 하자

많은 사람들이 떠났지만 진보정당 건설을 계속하기로 하고 사무총장을 거쳐

1993년3월부터 1995년9월까지 임기의대표를 역임했다

.1995년9월25일, 진정추는 민중정치연합과 통합하여 '진보정치연합(진정련)'으로 거듭났다.

진정련의 창립이후 '국민승리 21'과 통합되기까지 대표를 역임했다.

1992년부터 2003년까지 진정추 활동을 하면서 '매일 노동 뉴스' 발행인을 역임하다

부채로  IMF 외환위기때 신용 불량자가 되기도 했다.

 

1996년, 노회찬 진정련 대표는 보수야당 소수파였던 '개혁신당'과의 제휴를 추진한다.

1992년의 민중당과 백기완 선거 운동의 후유증이 남아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섣부르게 창당했다가 조직적으로 큰 손실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1996년4월11일의 제15대 총선을 앞두고 '진보련'은 구성원의 대부분이 민중당을 경험했던 터라

'개혁신당'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개혁신당'은 총선을 앞두고 이기택의 '꼬마 민주당'과 통합하여 '통합민주당'이 되었다.

진정련의 대표로 '통합민주당'의 당무위원을 잠시 맡기도 했으나 보수 야당과의 제휴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96년-1997 총파업 이후,'민주노총'은 보수 야당에 의존적인 기존의 노동 운동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했고.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역시 진보정당이라는 문제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진정련'은 1997년12월18일에 실시되는 제15대 대선에 참여하고,

이를 기반으로,진보 정당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고 '민주노총'과 '전국연합'이 이에 동의했다.

1997년 대선 기구로서 민주노총의 주도로 '국민승리21'이 출범하게 되어정 책기획위원장으로 활동한다.

'국민승리21'은 이후 2000년1월30일 창당하여 2011년까지 진보주의 정당인 '민주노동당'으로 재창당했다.

1997년12월18일,'국민승리21'은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을 후보로 내세우고

제15대 대선에 참여하여기대 이하의 결과였으나 '국민승리21'은 포기 하지 않고 진보정당 건설을 추진하기로 했다. '민주노총'은 대선 패배 이후 '국민승리21'에 대한 지원을 할 수 없었고,

'전국연합'은 공식적으로 '국민승리21'에서 철수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1987년,1992년과 달리 '국민승리21'은 포기 하지 않고 진보정당을 건설을 계속하기로 다짐했다.

1998년6월4일,제2회 지방선거에서'국민승리21'은 23명의 당선자를 내어 기사회생하게 된다.

'국민승리21'은 충분히 준비가 되지않은 상태에서 대선에 응 했기 때문에 문제를 드러냈다.

'국민승리21'은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정당을 탄생시키는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조직이다.

1999년8월29일,국민승리21은 '(가칭)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창당준비위원회는 권영길,양연수,이갑용을 공동대표로 추대하고,본격적인 창당 작업을 시작했고

노회찬은 정치개혁추진위원장을 맡았다.

2000년1월30일,'민주노동당'이 창당되고 노회찬은 민주노동당의 초대 부대표를 맡았다.

노회찬은 2000년4월13일 제16대 총선,2002년6월13일 제3회 지방선거,2004년4월15일 제17대 총선에서

선대본부장을 맡아 '민주노동당'의 대부분의 선거를 지휘했다.

2000년4월13일, 제16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저조한 득표를 기록했지만,

울산 등 노동자 밀집 지역에서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2002년6월13일, 제3회 지방선거에서는 기초단체장 2,광역의원 11명 (비례 9명 포함) 당선,

정당 득표에서 8.13% 득표를 올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2002년3월,노회찬은 민주노동당 정기당대회에서 사무총장에 선출되었다.

2004년4월15일,제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후보가 되어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은 10선의 국회위원에 출마했지만 정당 득표율이 못미처 낙선하여3김 시대의 막을 내렸다.

 

2005년7월22일, MBC 이상호 기자가  1997년1997년12월18일의 제15대 대선 과정에서,

안기부가 삼성그룹 이학수 부회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의 대화를 도청한 녹음 테잎과

이를 분석한 안기부의 보고서인 삼성 X파일을 공개하자 전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X파일에는 삼성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게 뇌물을 건냈으며,

검찰 간부들에게 명절때마다 1천만원에서 5백만원의 떡값을 뿌리며

검찰 인맥을 관리했다는 내용등이 포함되어있었다.

2005년8월18일, 노회찬은 국회 법사위에서 안기부 X파일과 관련된 전·현직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했다.

검찰은 고위 검사들을 처벌하지 않고

노회찬 의원과 MBC 이상호 기자를 '명예훼손'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1심 재판부는 노회찬에게 징역 6개월 자격 정지 1년을 선고 했다.

2009년12월4일, 2심 재판부는  2심 선고공판에서 원심을 깨고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07년12월19일에 치뤄지는 제17대 대선 후보 민주노동당 경선에서 

노회찬은 권영길,심상정에게 패배 후 심상정 후보를 지지했고 권영길 후보가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민주노동당은 정파간의 갈등은 대선 후보 경선을 거치며 더욱 드러났다.

결국 권영길 후보가 대선에서 참패하자 대선 실패에 대한 책임 공방이 시작되었다.

당 지도부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심상정 비대위를 출범 시켰다.

그러나 2008년2월3일에 열린 민주노동당 대의원 대회에서 심상정 비대위가 제시한 혁신안이 부결되면서

자주파와 평등파의 동거는 사실상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노회찬은 심상정과 함께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을 창당을 준비했다.

2008년3월16일, '진보신당'이 창당되었다. 노회찬은 심상정,이덕우,김영희,김석준과 함께 공동 대표에 취임했다. 2008년4월9일,창당 직 후 제18대 총선에서 출마했으나 노회찬은 석패하고 만다.

정당 지지율 2%를 넘겨 겨우 정당 등록 취소를 면할 수 있었으며,

정부의 정당 보조금도 일부분 받을 수 있었다.

총선 후 진보신당은 총선용으로 만들어진 정당을 재창당하는 논의는 잠시 중단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미국 소고기 수입 재개 협상 내용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시하기 위하여

학생과 시민들의 모임으로 출발한 2018년 촛불시위는

2008년5월2일 첫 집회 이후 2개월간 연일 수백에서 수십만 명이 참가하였으며,

6월 10일을 정점으로 하여 7월 이후에는 주말 집회가 계속되었고,

100일 이상 집회가 계속되면서 쟁점이 교육 문제,대운하·공기업 민영화 반대 및 정권퇴진 등으로

점차 정치적으로 확대되었다.

노회찬은 촛불시위 초기부터 활발하게 참여했다.

'진보신당'의 촛불시위는 총선 이후 당원수의 증가로 이어졌다.

촛불시위가 사그라 들며 당 내부에서는 미뤄둔 '제2 창당'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자는 의견이 나타났다.

2009년3월1일,용산 구민회관에서 열린 첫 정기당대회 1차 대회에서는

현행 공동대표 체제를 임기 2년의 단독대표 체제로 전환하는 조직 개편과

당명변경,재보궐선거 예비 후보 선출 등이 결의 되었다.

정기당대회 1차 대회의 결의에 따라 2009년3월23일부터 3월27일까지 닷새간 당원 직접 투표를 실시했고,

2009년3월29일, 송파 구민회관에서 열린 정기당대회 2차 대회에서 당원 직접투표 결과가 발표 되었다.

노회찬은 심상정의 불출마로 단독 출마해서  전 당원을 대상으로 한 직접투표에서 당 대표로 선출되었으며,

노회찬은 '진보신당' 대표로 취임했다.

2009년4월29일, 국회의원 재보선 선거에서 울산 북구의 조승수 후보가 당선되면서 진보신당은

원외정당에서 원내정당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2009년년11월29일, 노회찬은 '진보신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할 것을 선언했고.

2010년6월2일,제5회 지방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노회찬이 민주당 한명숙 후보와 단일화 하였다면 당선되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조승수 의원이 진보신당의 3대 대표로 선출되면서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통합이 논의되었으나.

종복주의 문제로 인하여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논의가 결렬이 되었다.

'진보신당 대의원 대회'에서 통합에 대한 안건이 상정되었으나 부결되었다.


노회찬은 심상정, 조승수 등과 함께 당을 탈당해 '새진보정치연대' 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새진보연대','국민참여당','민주노동당이  3당 합당을 함으로써

2011년12월6일,'통합진보당'이 창당되어 당 대변인으로 선임되었다.

2012년4월11일,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2013년 독수독과 이론에 의거해 의원직을 퇴직 당했다 .

2013년3월4일,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는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가 2013. 4·24 보궐선거에서

자신의 지역구였던 노원병에 출마하기로 한 데 대해 반대 의사를 밝혔다.
2014년7월30일,노회찬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정의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선거과정에서 새정치 민주연합의 기동민 후보와 단일화하여 출마하였으나 패배하였다.

1위는 나경원이었다.

2016년4월13일에 치뤄진 제20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3선의원이 되었다

.20대 국회에서 노 의원은 특수활동비 폐지를 주장했다. 

2016년부터 계속 원내대표를 하였다.

2018년 6월 재선출되어 3연임을 하게 되었다.

원외에 있을 때에는 유시민,진중권과 함께 팟캐스트 방송 '노유진의 정치카페' 진행자로 활동하였다.

2018년7월부터는 JTBC '썰전'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게 되었다.

2018년 드루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특검 수사가 진행되던 중

2018년7월23일,
오전 9시38분,노회찬 의원은 동생 부부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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