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의 다섯번째 아들인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남은,심효생 등 반대파 세력을 불의에 습격하여 살해하고, 세자 방석과 방번(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두 아들)을 죽인 사건이다. 이 사건을 '제1차 왕자의 난' '방원의 난' 혹은 '무인정사' '정도전의 난'이라고도 한다.진법 훈련 강화를 내세우며 병권 집중 운동을 벌여오던 정도전은 왕족 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해체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속이고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 들인 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밀모설이다. 방원은 방간(4째) 등 형제들과 함께 사병을 동원해 정도전 일파를 습격해 살해하고, 세자 방석은 폐위하여 귀양 보냈다가 방석의 방번과 함께 죽여버렸다. 이방원은 정도전에게 병권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제거했지만, 자신이 권력을 잡자 세력 강화를 위해서 왕족 들의 사병을 혁파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훗날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 두번째가 1400년 정종 2년에 일어난 제2차 왕자의 난이다. 1398년에 일어난 1차 왕자의 난은 정도전 일파 타파와 왕자를 살해하는 왕권 다툼의 사건이라고 본다면, 2차 또한 왕권 다툼의 난이다.제2차 왕자의 난을 '방간의 난,'박포의 난'이라고도 한다.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실권을 잡은 이 방원은사병을 거느린 형제가 여럿 있고 그들의 세력 또한 적지 않았으므로 이방원으로서도 이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어 항상 그들을 견제하여왔다.자신이 권력을 잡자 세력 강화를 위해서 왕족 들의 사병을 없앨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운 형제인 이방간(이성계 4째) 역시 세력은 이방원에는 못미치지만 항상 왕위를 계승하려는 야심과 호기가 있었으므로 시기심과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때 마침 지중추부사인 박포의 밀고가 있었다.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등이 이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는 등 난의 성공에 공이 많았다. 그러나 일등공신에 오르지 못해 불평하다가 죽주(지금의 영동)로 귀양갔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이방간이 이방원에 대해 불평하자 박포는 이방원이 장차 이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밀고하여 이방간의 거병을 선동했다.
이방간의 사병과 이방원의 사병이 개성 시내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으나 두 사람은 체포되어,
1342년,고려 시대 형부상서를 지낸 아버지 정윤경과 영주 우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맏아들로
충북 단양에서 출생하여,1347년에서 1348년까지 경북 영주에서 1년간 잠시 유년기를 보낸 뒤
양주 삼각산에서 성장하였다고 전해진다.
유년기 시절 풍기 진중길의 사위 최림을 통해 기초 학문을 배우고,
정도전 아버지 정운경이 중앙으로 관직을 옮김에 따라 개경으로 이주 한 후 이제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아버지 정운경과 이색의 아버지 이곡과는 두터운 친교가 있었기 때문에 이곡의 아들 이색을 만나
가깝게 지낼 수 있었으며,
1360년, 진사시에 급제한 후 성균관 입학하여 대사성인 성균박사 이색을 만나 성리학에 대해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성리학적 이념과 사상을 심층 이해하게 되었고 그 외에도 맹자의 성선설과 역성 혁명론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부패한 사회의 현실을 보면서 맹자의 성선설에는 다소 회의적인 견해를 품게 되었다.
이때 그와 함께 공부했던 이들로는 포은 정몽주,박의중,윤소중,이존오,김구용,김제안,박의중,설장수,
박상충,및 5년 연하의 이숭인과 하륜,10년 연하의 권근 등이 있었는데 모두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었다.
정도전은 성균관에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는데 특히 문장과 성리학에 능하였다.
대사성인 이색은 백이정,이제현,권보,안향 등의 학통을 계승했는데,
이제현은 백이정의 문인이자 권보의 사위로 28살 때 원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성리학을 이루었다.
그의 학문은 이색으로 이어졌다.
정몽주,이숭인,권근 등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이다.
당시 그는 권문세족들의 전횡 못지않게 불교는 국가 경제를 저해하고 민생을 황폐하게 하는 해악으로
보게 되었다.
이는 사원경제의 팽창과 타락, 백성이 불교에 귀의함으로 인한 조세수입의 궁핍과 부역의 징발 부재로 나타난
국가 경영 존립의 위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삶조차 기약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사후 세계를 논한다는 것은 공허한 생각이라는
공자의 의견에 강하게 동조하게 된다.
이후 불교가 국가에 미치는 해악에 대한 비판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만년에 '불씨잡변'으로 집성하게 되었다.
특히 정도전은 동문수학한 동료들 중 정몽주와 마음이 맞아 그가 말한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권문세족으로
부터 농민들을 해방시켜야 된다는 사상에 정몽주는 깊이 감격하고 공조하였다.
이후 정몽주와는 오랜 친구로 청소년기때부터 권문세족과 외척의 발호로 부패한 고려 사회를 성리학적
이상향으로 개혁해야 된다는 사상을 품고 사상적,정치적 동지로서 협력하였으나 뒤에 조선 개국과 관련하여
정적으로 정몽주와는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아버지인 정운경 슬하에서 성장한 정도전은 외가와 관련된 신분에 얽힌 문제 때문에 세인의 따가운 눈총이
항상 따라 다니고 있었다.
고려 공양왕 때 부터 정도전의 출신을 부정하고,파계가 밝지 못하다면서 김진양,이확,이래,이감,권홍,유기
등이 정도전의처벌을 주장하였다.
정도전 뿐만 아니라,조준,남은,윤소종,남재,조박 등 이성계 일파를 한꺼번에 공격했는데,
정도전에 대해서만 집안을 문제 삼았다.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도 정도전의 외가 쪽에 대해서는 계속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정도전의 외할아버지인 우연의 장인 김전은 일찍이 중이 되었다.
김전은 수이라는 종의 아내와 딸 하나를 낳았는데,이 여자가 정도전의 외할머니다.
우현보의 자손은 김전과 인척으로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도전이 처음에 벼슬길에 오를 때 대간에서 신분증을 지연시키자, 정도전은 우현보의 자손이 소문을
퍼뜨려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원한을 품었다.
그러다가 뜻을 이루게 되자 우현보에게 죄를 만들어 황거정 등으로 하여금 세 아들을 죽이게 하였다.
정도전의 외할아버지는 우연 이라는 사람이고,외할머니는 김전이라는 승려가 자신의 종의 아내와
관계를 맺어 낳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단양 출신의 유학자인 우현보의 세 아들(홍수,홍득,홍명으로써 고려말에 모두 관리의
고신을 취급하는 대간의 직책을 맡고 있던 인물) 이 세상에 퍼뜨리고 정도전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를 때 고신을 선뜻 내주지 않았으므로 정도전이 원한을 품고 있다가 개국 뒤에 우현보의 세 아들에게
보복을 했다는 것이다.
정도전이 벼슬길에 나아갈 당시에 이들은 나이가 어려 직접 정도전의 고신을 취급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간들에게 소문을 퍼뜨릴 수 있는 나이에 있었던 것이다.
정도전의 출생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우현보의 족인(族人)에 김전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중이 되었는데,자기의 종인 수이의 아내와 몰래 정을 통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김전의 족인들은 모두 수이의 딸이라고 말하였으나,김전은 홀로 자기의 딸이라고 주장하면서 은밀히
그 딸을 사랑하였다.
뒤에 김전은 환속하여 수이를 내쫓고 수이의 처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로 삼았다.
그리고 그 딸을 우연에게 시집보내고 노비와 전택을 모두 주었다.
우연은 딸 하나를 낳아서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에게 시집보냈다.
정운경은 벼슬을 하여 관직이 형부상서에까지 올랐으며 아들 셋을 두었는데 정도전이 바로 그 맏아들이다.
정도전은 처음에 벼슬길에 오를 때 우현보의 아들들이 모두 정도전을 경멸하였고,
정도전의 벼슬이 승진할 때마다 대성(臺省, 사헌부)에서 고신에 서경(署經,사인)을 하지 않았다.
정도전은 우현보의 자제들이 그렇게 하였다고 생각하고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공양왕이 등극하여 우흥수의 아들 우성범이 왕의 사위가 되자 정도전은 우성범 등이 세를 타고
자신의 근원을 밝힐까 두려워 우현보 집안을 모함하는 일을 꾀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우연이 두 아내를 가졌다고 해석하면 의문은 간단히 풀린다.
아마도 차씨는 첫째 부인이고, 김씨는 둘째 부인인 것으로 보인다.
차원부는 조선개국을 반대한 인물인 까닭에 정도전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갖지 않았고,
따라서 정도전의 출생과 관련한 약점을 세상에 폭로하기 위해서 그의 출생에 관한 기록을 족보에 남긴
것으로 보인다.
한편 충청북도 단양지방에는 예로부터 정도전의 출생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정운경이 젊었을 때 어느 관상가를 만났는데, 관상가는 정운경이 10년 뒤에 결혼하면 재상이 될 아이를
얻을 수 있다고 예언하였다.
이 말을 믿은 정운경은 10년간 금강산에 들어가 수양하고 고향인 봉화로 돌아오던 길에 단양 삼봉에
이르러 어느 초가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정운경은 이곳에서 우씨 여자를 만나 정을 나누게 되었고,그렇게 낳은 아이가 곧 정도전이라는 것이다.
그는 과연 관상가의 예언대로 훗날 재상이 되었다.
정도전이 자신의 호를 삼봉(三峰)이라고 한 것도 단양 삼봉을 가리키는 것이고,도전(道傳)이라는 이름은
길에서 얻었다는 뜻이다.
단양 지방에 내려오는 위 전설은 아마도 정도전에게 보복을 당한 단양 우씨 집안이나 후세인들이 사실을
과장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에는 진실과 거짓이 함께 섞여 있다.
정운경이 금강산을 갔다는 이야기는 사실에 맞는 것 같다.
그는 젊은 시절에 이곡과 함께 동방(관동지방)을 여행했다는 기록이 정도전이 쓴 '정운경행장'에 수록되어 있다.
교우 관계가 인연이 되어,이곡의 아들 이 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정몽주·박상충·박의중.이숭인·이존오·
김구용·김제안·윤소종 등과 교유했으며,
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동 진사시에 합격하여 충주사록·전교 주부·통례문지후를 역임하였다.
문인이면서 무(武)를 겸비한 정도전은 성격이 호방해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으며,총민해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군서를 읽어 의론이 정연했다 한다.개국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한나라 장량에 비유하면서, 한고조(유방)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했다고 하면서 실질적인 개국의 주역은 자신이라고 믿었다.아버지로부터 노약 노비 약간 명을 상속받았을 뿐, 오랫동안 유배·유랑 생활을 보내면서 곤궁에 시달렸다.더욱이, 부계 혈통은 향리의 후예로서 아버지 때에 이르러 비로소 중앙 관료의 벼슬다운 벼슬을 했으며,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연안 차씨 였다.특히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이러한 혈통 때문에 구가세족이나 명분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자들로 부터 백안시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조선시대에도 3노가의 하나라는 세인의 평을 받았다. 그와 건국 사업을 함께 한 조영규·함부림 등 개국공신과 태종 때의 중신 하륜 역시 연안 차씨의 외척으로서, 조선 개국에는 신분적 하자가 큰 인물들이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그가 청·장년의 시기인 고려 말기는 왜구·홍건적의 침공으로 국내가 어수선했고, 안으로는 구가 세족의 횡포로 정치 기강이 무너지고 민생이 곤핍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9년간의 시련에 찬 유배·유랑 생활은 그로 하여금 애국적이며 애민적인 의식을 깊게 만들었으며 그의 역성 혁명 운동은 이러한 개혁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의 개혁 운동이나 그에 수반된 왕조 건국 사업은 단순한 정치적 실천 운동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제도로서 정착시켜 사상·제도상으로 조선의 기초를 놓았다는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발견된다. 1370년, 성균관 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으며, 5년간 전선(인사 행정)을 관장하였다. 1375년(우왕 1) ,권신 이인임·경복흥 등의 친원 배명 정책에 반대해 북원 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권신 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 관하의 거평부곡에 유배되었다.377년에 풀려나서 4년간 고향에 있다가 삼각산 밑에 초려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으나,부평으로,김포로 이사하였다. 1383년 ,9년간에 걸친 간고한 유배·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동북면도 지휘사로 있던 이성계를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그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 와서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1388년6월에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해 조준 등과 함께
전제 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조민수 등 구세력을 제거해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1389년, 이성계·심덕부·지용기·정몽주·설장수·성석린·조준·박위 등과 모의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해 좌명공신에 봉해지고, 삼사우사·지경연사를 지냈다.
그 뒤 명나라에 가서 윤이·이초의 무고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왔다.
1391년, 삼군도 총제부 우군총제사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구세력의 탄핵으로 봉화에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봄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중에 낙마한 사건을
계기로 고려 왕조를 옹호하던 정몽주·김진양·서견 등의 탄핵을 받아
보주(지금의 예천)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특히 신분적 약점이 많이 거론되었다.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격살되자 유배에서 풀려 나와, 같은 해 7월에 조준·남은 등 50여 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개창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조선 개국 후 개국1등공신으로 요직을 겸임해 정권과 병권을 한 몸에 안았다.
같은 해 겨울에 두 번째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4년 6월, 조선경국전과 심기리 3편을 저술했으며,
한양 천도를 계획, 실천해 수도 경영에 주동적으로 참획하였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 문제로 명나라에서 이를 트집잡아 내정을 간섭하자,
전부터 추진해오던 요동 수복 운동에 박차를 가해 군량미확보, 진법훈련, 사병혁파를 적극 추진하였다.
1396년9월에 진법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수복 계획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희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