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꿈과 석왕사          작성일자; 2007.11.11.일요일,맑음

 

장군 시절 태조 이성계는 부패해 가는 고려 왕조를 탄식하며 팔도강산을 돌며 무예를 익히고 명산 대찰을 찾아 가호를

빌었다.

그가 함경도 안변 땅에 머물던 어느 날 밤 이성계는 참으로 묘한 꿈을 몇 가지나 꾸었다.

이튿날 새벽 눈을 뜬 이성계는 간밤 꿈자리가 석연치 않아 꿈을 되새겨 봤지만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어 해몽을 잘한다는

노파를 찾아가 해몽을 부탁한다.

 '대장부가 받은 꿈의 계시를 어찌 미천한 아낙이 함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서쪽으로 40리쯤 들어가면 설봉산이 있고 그 산허리 토굴에 공부하신 지 10여 년 동안 한 번도 굴 밖으로 나오지

않은 도인 한 분이 살고 계십오니 그 도인 스님께 가면 잘 풀어 주실 것입니다.'

이성계는 그 길로 설봉산 도인 스님을 찾아가 삼배를 올린 이성계는 찾아온 사연을 밝혔다.

  '어느 시골 마을을 지나는데 온 고을 닭들이 일제히 울어 대더니 집집 마다에서 방아 찧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늘에서 꽃이 마치 비오듯 떨어져 내렸습니다.

다시 또 꿈은 이어져 저는 어느 집 헛간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짊어지고 나오다가 거울 깨지는 소리에

문득 꿈을 깨게 됐습니다.

무슨 불길한 징조는 아닌지요?

'참으로 그런 꿈을 꾸었다면 함부로 발설해선 안될 꿈입니다.'

스님은 은밀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그 꿈은 아주 길몽입니다.

마을의 닭들이 일제히 울어댄 것은 '꼬끼오 꼬끼오' 한 것이니 이는 반드시 고귀한 자리에 오른다는 뜻이며,

방아찧는 소리는 귀하게 될 것을 축하하는 의미입니다.

또 헌 곳간에서 서까래 세 개를 가로졌으니 그 모양은 마치 임금 '왕'자와 같지 않습니까.'

스님의 말을 들은 이성계는 흥분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으며 어느새 상기된 얼굴에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스님, 그럼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진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스님은 말없이 시 한 수를 적어 내놓았다.

"花落能成寶 鏡破豈無聲"-꽃이 떨어 졌으니 열매가 맺힐 것이요 거울이 깨졌으니 소리가 나지 않겠는가.

스님은 다시 이성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대 얼굴엔 군왕의 기상이 가득하오. 허나 아직 겁기(劫氣)가 다 벗어지지 못했소.

성현에게 기도를 올리고 공덕을 지어야 일이 성취될 것이오.

앞으로 3년은 더 기다려야 할 터이니 그 동안 이곳에 절을 세우고 오백 나한을 모셔 기도를 잘 올리도록 하시오.'

그리고 이 일은 나만 알고 비밀을 지킬 터이니 장군도 꿈 이야기를 입밖에 내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하오.'

스님께 스승의 예를 올리고 물러난 이성계는 기도 올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안변 땅에 절을 세웠다.

후일 임금 왕 자를 해석했다 하여 '석왕사'라 불렀다.

그 후 이성계는 오백 나한을 모시기 위해 석왕사 경내에 응진전을 건립했다.

때마침 함경도 길주에 있는 광적사가 병화로 폐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그 절에 방치된 대장경과 오백 나한상을 석왕사로 모셔 오기로 했다.

길주에서 원산포까지 배로 옮겼으나

원산서 석왕사까지는 이성계가 직접 무거운 돌나한님을 한 분씩 들에 업어 정성스럽게 모셨다.

이렇게 498상을 옮기고 마지막 두 분이 남게 되자 그는 조금 귀찮은 생각이 들었는지 두 분을 한꺼번에 옮겨 모셨다.

다음 날 아침 기도를 드리고 나서 살펴보니 이게 웬일인가.

간밤에 분명히 오백 나한님을 다 모셨는데 맨 나중에 모셔온 존상 한분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았다.

놀란 이성계는 사방을 두루 찾았으나 보아지 않자 단념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그 존상이 나타날 줄이야.

 '그대의 신심이 그렇게 여일치 못해서야 되겠는가?

한 분씩 업어 오시다가 나만 덧붙여 업어가다니.

나는 그렇게 정성이 부족한 푸대접을 받기가 싫네.

해서 묘향산 비로암에 와 있으니 그리 알게.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이성계와 함흥차사 석성린             작성일자; 2007.10.27.토요일,맑음

 

1395년(태조 4년) 이성계의 친구이자 한성부 판사(지금의 서울 시장)가 된 성석린이다.

함흥차사가 되면 다 죽었다고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나,많이 와전되어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1~2차 왕자의 난으로 골육상쟁을 겪게 된 태조는 함흥으로 가신들을 데리고 은둔의 길을 떠난다.

태조 이성계는 왕자의 난으로 인하여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떠나 버리자 

자식으로서 끝까지 불효하기를 원치 않았던 태종 이방원은 노심 초사하게 된다.

태조 이성계의 한양으로의  귀향을 위해서 태종 이방원은 여러 명을 함흥에 차사로 보냈지만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신하들도 없었고,태조 또한 돌아올 기약이 없었다.

조선 개국 초의 상황에서 부자의 의가 끊기는 것을 우려했던 성석린은 태조 이성계의 친구로서 부자간의 화해를 위해

함흥에 가기를 자처하였다.

태종 이방원의 허락을 받고 복색에 백마를 타고 함흥까지 가서 마치 지나가는 과객인양 위장을 하고 이성계가 기거하는

먼 거리에서 말에서 내려 휴식을 취하면서 불을 피워 밥 짓는 시늉을 했다.

이때 이성계가 멀리서 여러 사람들이 휴식을 하면서 밥짓는 모습을 바라 보다가 내시를 시켜 그 곳으로 가 보게 하였다.

내시가 다녀 와서 말하기를 "성석린이 볼 일이 있어 이 곳을 지나가다 해가 저물어 밥 짓고 있더라. "고 아뢰자

이성계는 가장 가까운 친구가 길을 지나 간다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성계는 기뻐하며 성석린을 불렀다.

이성계는 친구인 석성린과 술잔을 기우리며 자식들의 권력다툼에 탄식하고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였다.

성석린은 부자간의 인륜의 도리를 이야기하자 태조는 갑자기 노여워 얼굴빛이 변하며 성석린을 향하여,

"그대가 그대 임금 태종을 위하여 나에게 아양을 떠는 것인가?" 라고 소리를 질렀다.

성석린도 깜짝 놀랐다.

친구간에 이렇게 화를 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엉겁결에 석성린도 큰 맹세를 하게 되었다.

석성린은 "만약 임금(태종)을 위해 이렇게 한다면 저의 자손은 앞으로 반드시 눈 먼 소경이 되오리다.

"엄청난 약속과 맹세를 하자 태조 또한 마음이 풀어져,

그동안 가슴에 묻어 두었던 이야기로 밤을 보내고 성석린을 죽이지 않고 돌려 보냈다.

 

함흥에 간 신하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고,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인물이 석성린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특히 석성린의 일화가 유명한 것은 태조 이성계와 친구라는 것과 그의 목숨을 아끼지 않은 우국충정과 주군에

대한 군신의 의리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우연인지,

그 맹세의 인과응보인지 모르지만 석성린의 장남인 지도와 차남인 발도가 모두 눈이 멀었고,

장손인 구수와 증손까지 모두 백내장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거짓 맹세가 그대로 들어 맞았다고 하였다.

 

태종 이방원이 왕권을 유지하는데는 어느 누구 보다도 가장 큰 희생을 한 인물이 성석린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비록 3대의 자손들이 눈이 머는 가문의 희생은 치렀으나,

조선 초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의 부자 간의 천륜을 이어 주었으니 과연 충신이라 할 수 있다.

 

 

 

 

이성계와 사진참사검         작성일시; 2007.10.25.목요일,맑음

 

 

야사에 따르면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환조)이 조상의 묘를 옮기다 나온 것을 검인 전어도를 아들인 이성계에게 주었다.
이성계 일파가 우왕을 죽일 때 용의 후손이라 그 어떤 무기도 통하지 않자 이성계가 전어도로 우왕을 손수 베어 죽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 뒤 우왕이 가지고 있던 사진참사검이 저주를 내려 이성계의 수하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자 무학의 조언에 따라
사진참사검 옆에 전어도를 꽃아 저주를 막았고,

두 칼은 3일 밤낮으로 싸우며 울다가 전어도는 박살나고 사진참사검은 금이 갔다고 한다.

 

사진참사검은 비록 망가졌지만 이성계의 혈통에 내린 저주가 남아 있어서 그것을 막기 위해

조선 왕실에서 용의 기운을 가진 사진참사검과는 정 반대로 호랑이의 기운이 담긴 사인참사검을 신하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정기적으로 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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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와 이방원에 얽힌 살곶이 다리        작성일자; 2007.09.01.토요일,맑음

 

 

서울의 한양 대학교 캠퍼스 바로 옆으로 청계천과 중랑천이 흐른다.

이 두 개의 천이 만나는 지점에서 한강 쪽으로 200여 미터 더 내려오는 지점에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돌다리인

살곶이 다리(전곶교)가 있다.

 

화살이 꽂힌다는 뜻인 살곶이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태조 이성계는 태종 이방원이 이복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되자 이성계가 이방원을 굉장히 미워했다.

이방원이가 보기 싫어서 고향인 함흥으로 가버렸다.사신을 여러 번 보내어 한양으로 돌아오시라고 하자 명궁인 이성계는

사신이 오는 대로 다 활을 쏘아서 죽이고 말았다.

자식이 계속 조르니 어쩔 수 없이 이성계는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날 이방원이 경복궁에서 아버지 마중을 나온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이성계가 아들이 기다리는 것을 멀리서 보고 아들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이 날아오자 기둥 뒤에 숨어서 살았다.

이성계는허허 어쩔 수 없다.

이게 하늘의 뜻이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게 바로 살곶이의 유래다.

 

 

세종대왕의 분부로 이 다리가 만들어진 것.

당시 이곳에 물난리가 많이 있어 물난리가 나면 이곳에 있던 다리가 싹 없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큰 맘 먹고 폭우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다리를 놓기로 했다.

단단한 화강석을 박고 그 위에 편편한 돌을 깔았다.

살곶이 다리는 조선시대 만든 다리 중 제일 유명한 다리다.

보물 1738호인 살곶이 다리는  조선 세종 때 공사 착공해 성종 때 완공(1483) 되었다.

다리 규모는 76미터,폭 6미터.

다리는 교각석주(1열에 기둥 네 개)를 세우고 그 위에 받침돌을 올린 다음 하천 방향으로 멍에돌을 3개 연이어 걸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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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南誾)       작성일자; 2007.08.29.수요일,맑음

 

남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무신

생졸; 1354(공민왕3)~1398(태조7)  45세

본관; 의령

아버지; 검교시중 남을번

형; 영의정 남재(在),

아우; 우상 절도사 남지(贄).

 

고려 말기에 왜구 토벌과 신진 사대부 정치인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 개국공신 1등으로 의성군에 봉해졌고,

사후 의정부 영의정에 추등된 뒤 의성 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1374년, 고려 공민왕 2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때 삼척에서 왜구를 무찔렀다.

고려의 권문 세족들의 부패에 염증을 느낀 그는 그 뒤에 개혁을 주장하는 이성계,정도전,정몽주등의 신진 사대부에 가담,

그 중 정도전 등과 함께 이성계 세력의 중심 인물이 되어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체결해야 할 것을 극력 주장하였다.

1388년 ,우왕 14년 요동 정벌을 반대하였으며  조인옥등과 함께 우군도통사 이성계에게 위화도 회군을 진언했다.

   그의 진언을 받아들여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엿으며 회군 뒤에는 이성계의 왕위 추대를 계획하는 데 참여하였다.

1389년, 공양왕 추대에 참여하였고,

1391년에 이성계가 해주에 간 사이에 정몽주의 탄핵으로 조준,정도전,윤소중,조박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1392년4월,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되자 유배에서 풀려나 정계에 복귀하여 6월 요동 정벌 실패로 돌아간 뒤

   정도전,조준,조인옥 등 52인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 왕조를 개국하였다.

건국 후,신덕왕후 강씨 소생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정안대군 방원과 적을 지게 된다.

 1395년(태조 4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으나,

1396년, 형인 남재와 함께 특별히 서용되었으나 명나라로 보낸 정조사가 가져간 이성계의 친필 표문 중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비위를 거슬리는 단어가 있어 사신 정총등이 살해되고,

   초안자인 정도전을 명나라에 압송하도록 압력을 가해오자 명나라 사신들을 달래서 되돌려 보냈다.

   군량을 비축하였으며 사람을 보내 요동 주변의 정세를 파악,정탐케 하여 요동정벌을 계획하기도 하였으나 명나라에

   누설된다.

1397년, 명나라는 조선 조정에 요동 정벌을 중단하라고 경고했다. 요동 정벌을 목적으로 정도전과 대대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으나 정도전의 개혁과 명나라와의 전쟁 준비는 조준등의 반발을 일으켜 끝내 결별하게 되고 만다.

   남은과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출병을 요청하였으나 조준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남은의 첩의 집인 송현방에 모여 정사를 논하던 중 이방원에게 습격을 받고 하경과 최운이라는

   수행원을 데리고 도주에 성공했으나 그 후 순군옥에 스스로 홀로 들어가 최후를 맞이하였다.

   정안대군도 그를 정도전의 일파라고 비난하면서도 그의 가족이나 친척에게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았고,

    그의 형과 동생, 아들들은 계속 관직에 등용된다.

세종 즉위 이후에 남은은 죄가 있어도 그 공을 잊을 수 없다 하여 영의정에 추층되었고 의성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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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장군과 이성계           작성일자;2007.080.08.수요일,맑음

 

최영과 이성계는 고려 말기 신흥 무인들을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다.

고려 국경을 침범해오던 왜구와 북방 민족들을 정벌해 고려의 수호신이라고 불리기까지 한 전설적인

명장들이다.

그러나,최영은 고려의 마지막 명장이라는 무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 타이틀로 불리는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 대해서는 '조국을 배반한 변절자'라는 악평이 뒤따른다.

최영과 이성계는 전장에 함께 출전하며 우애가 깊은 전우였다.

이성계는 최영의 후배였지만 최영은 이성계를 제일 아꼈고,이성계는 최영을 제일 따랐다.


고려 말기는 국내외적으로 격동의 시대였다.

한 세기가 넘도록 고려를 지배하던 원나라가 한족들의 반란과 귀족들의 분열로 무너지고 있었고,

남쪽에는 명나라가 등장해 원나라와 대립하고 있었다.

이런 국제정세에 따라 원 간섭기 동안 원나라를 등에 업고 권세를 휘두르던 고려의 권문세족들의

위세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영향력이 약화된 시점에 반원 개혁정책을 펼쳐 신진사대부 등의 반(反) 문벌 인사들을

대거 양성해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했다.

원나라의 강력한 지배 아래 숨을 죽이던 중국과 만주의 수많은 북방민족들이 원나라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궐기하기 시작했고,

밀려난 홍건적 등의 반란군들도 합세해  고려의 국경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고려 후기 충정왕 시대부터 급증하기 시작한 왜구들도 고려 남부의 해안가에 출몰해 내륙으로 진출하기

까지 하는 등 고려는 개국이래 사상 최악의 외침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고려의 국력은 약해질 때로 약해져있었고 전국 각지에서 출몰하는 외적들은 출몰할 때마다

고려 영토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가 고려는 점차 황폐화되었다.

 

최영과 이성계는 근본부터 다른 점이 너무 많다.

최영은 고려 개국에 공을 세운 철원 최씨로 최영의 5대조 최유청이 예종 때 집현전 대학사가 되면서
유력 가문으로 성장했고 이후 그의 집안은 승승장구해 고려 말기 대표적인 문벌귀족 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최영은 우수한 집안 배경과 자신의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아,
젊은 시절부터 무관 생활을 하며 양광도 도순문사 휘하에서 왜구를 토벌하며 경력을 쌓고
1352년 공민왕1년,
공민왕이 원나라 불모 생활을 할 때,
공민왕을 보좌한 공으로 총애를 업고 왕권을 위협하며 안하무인의 권력을 휘두르다 난을 일으킨
조일신을 안우,최원 등과 함께 처단해 정사품의 호군직으로 임명돼면서 본격적인 출세 가도를
걷기 시작했다.
이후 최영은 공민왕과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고려 국경을 침범한 장사성의 난군을 막아내고,
명나라와 원나라가 대립하는 정세를 기회로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과 함께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고려의 옛 영토를 수복하였으며,
홍건적의 난으로 고려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킨 김용을 처단하는 등 안팎으로
고려의 안위를 지켜내며 명실상부한 고려의 충신으로 자리 잡았다.
신돈이 정권을 잡았을 때 모함에 빠져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공민왕의 무한한 총애를 받으며 최영은 왜구를 토벌하고 제주도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그가 처단한 외적의 숫자만큼 최영의 권세와 명성도 점점 높아져갔다.

최영의 권력도 시대가 바뀔 때마다 계속 불어나면서 우왕이 장성했을 당시에는

이성계와 함께 이인임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문하시중으로 임명된 후

우왕에게 딸을 시집 보내 왕의 장인으로써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다.

이성계는 고려의 변방 중 변방인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나 쌍성총관부 소속 여진인들을 통솔하는

직책인 천호 관직의 아버지 이자춘 밑에서 여진족과 활발히 교류하며 청년기를 보냈고

아버지 이자춘이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는데 기여해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되면서

쌍성총관부 공격 당시 아버지를 도와 활약을 펼쳤던 이성계가 고려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자춘이 병으로 죽자 이성계는 그 뒤를 이어 동북면의 세력가로 성장했다.

이후 이성계는 동북면의 친고려파 여진족까지 휘하에 둔 거대한 세력을 바탕으로 북으로는 여진족,

남으로는 왜구를 토벌하며 경력을 쌓고 '박의의 난'을 토벌해 공민왕의 신임을 받았으며

이후 원나라를 등에 업은 여진족의 거물 나하추의 여진군과 왕위찬탈을 위해 고려를 침공한 덕흥군,

최유의 군대를 괴멸시켜 북방민족들을 평정하고,

남쪽으로 내려갔을 때 경상도,전라도에서 악명을 떨치던 왜구를 토벌하며

황산에서 왜군의 거물 아기바투의 군대를 최무선의 화포와 함께 초토화시켜 고려의 명장으로 떠올라

후에 최영의 바로 밑인 수문하시중에 임명돼 권력과 지위를 거머쥐었다.


최영과 이성계 모두 당대 최고의 권력과 명성을 가진 대단한 세력가였다.

최영은 우왕과 왕실이 인정한 고려의 수호신이자 조정과 군부의 최고 실세였고,

이성계는 동북명의 지배자로 북방 여진족의 추장들까지도 그의 사병 군단에 소속돼 있을

정도의 거대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권세로는 양대 산맥을 이루는 두 무장을 바라보는 당대 사람들의 시선은 상극이었다.

최영은 유력한 문벌귀족가문 출신이자 왕실과 여러 번 인연을 맺어 집안과 인맥,개인 능력까지

남부러울 것 없는 귀족 군인이었고 최영 개인의 청렴하고 원리원칙을 고수하는 강직한 성격으로

백성들은 물론이고 고려 상류층 인사들에게도 존경과 신임을 받는 완벽한 권위자 였던 반면에

이성계는 고려인과 여진족이 섞여사는 함경남도 변방의 천호 집안 출신으로

여진족 계열의 '자수성가'무장이었다.

여진족은 오랑캐라 부르며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던 고려의 귀족들이기에

이성계는 당연히 고려의 다른 상류층 인사들에게 멸시당했다.

청년 시절부터 고려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며 고려 귀족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 이성계였지만

고려의 문벌귀족들은 언제나 그의 출생 성분을 거들먹거리며 여진족의 피가 섞였다며 무시하고

거리를 두었다.

이성계 본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고려 사회에 뿌리 깊게 박힌 귀족들의 혈통 차별을 극복해낼 수는 없었고

이는 곧 이성계가 귀족 중심사회인 고려에 대해서 은연중에 염증을 느끼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고려의 귀족 중심사회와 혈통 차별 문화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인물들은 이성계,정도전,
정몽주와 같은

신진사대부 세력들은 고려 문벌귀족들의 폐단과 출생 성분에 대한 차별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들이고 이들도 이성계와 같이 지방의 이름 없는 중소 지주들과 향리 집안 출신으로

오로지 본인의 능력만으로 정계에 진출한 실력파들이었다.

이들은 이미 진작에 기존 고려의 사회체제로는 본인들이 원하는 능력중심의 사회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권문세족들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고려의 내부 사정이 악화되고 있는 현시점을 기회로 혁명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진사대부들은 평생 붓만 잡아온 문인들 뿐이였기에 그들에겐 본인들의 책략과 설계를

실행시켜 줄 무력을 가진 인물이 절실히 필요했다.

특히 정도전은 혁명에 필요한 무력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처럼 혈연 중심의 고려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실력파 무인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런 정도전에 눈에 적격자로 들어온게 정몽주의 소개로 관계를 가지게 된 이성계였다.

그는 정도전과 여러 신진사대부들과 교류하면서 젊은 시절부터 겪어왔던 고려사회의 혈연
중심적인

풍토에 대한 반감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고,신진사대부들의 개혁적인 사상에 빠르게 동화되어 갔다.

이 시점에 최영은 우왕과 함께 중원에서 원나라를 몰아내고 빠른 속도로 세력권을 넓혀가는명나라와

대립하며 파탄 직전의 민생과 고려 내부의 분열의 조짐을 무시하고 명나라와 전면전을 계획했는데

고려 조정에서 당파를 가리지 않고 믿고 따르던 최영이 저지른 초유의 무리수에

백성들과 신진사대부들이 최영과 국왕에게서 하나둘씩 등을 돌리기 시작한 이때부터

이성계의 역성혁명의 조짐이 잉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최영(생졸;1316,충숙왕 3년~1388,우왕14년)은 고려 말기의 무신으로 아버지는 사헌규정  최 원직이다.

최영은 북방의 원나라와 맞서 영토를 회복했으며,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쳤고,

왕권을 위협하는 내란도 막아내면서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다.

명나라에 맞서 요동 정벌을 주장하다가,위화도에서 회군해 개경을 함락하며 축출되었다.

1352년(공민왕 1)  안우·최원 등과 조일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호군이 되었다.

1354년 대호군이 되었는데, 그해 원나라에서 남정군을 요청하자,유탁·염제신 등 40여 명의장수 및 군사

   2,000여 명이 함께 파견되어 원나라의 고우·사주 등지에서 장사성의 난군을 토평하고 이듬해 귀국했다.

1356년, 공민왕이 반원개혁을 단행하여 영토수복을 꾀할 때

서북면병마사 인당, 부사 신순·유홍·최부개와    더불어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공략하여 원을 내몰고

고려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

1357년,서해·평양·이성·강계 체복사를 거쳐 이듬해 오장포에 침입한 왜구의 배 400여 척을 격파했다.

1359년,홍건적 4만 명이 서경(평양)을 함락시키자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물리치고

1361년,홍건적이 재침입하여 개경까지 점령하자 이방실·안우 등과 이를 격퇴하고 

1363년,김용이 사주한 흥왕사의 변이 일어나자 우선·안우경·김장수와 함께 이를 진압하였고

1364년,원나라에 있던 최유가 덕흥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군사 1만 명과 함께 쳐들어어자 

   이성계 등 과 함께 정주 달천에서 섬멸했다.

1365년, 강화와 교동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동강(東江)을 변경하였다.

   이때  신돈이 집권하여 새로운 개혁정치가 시도되면서 계림윤으로 좌천되었으며 

   훈작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

1371년, 신돈이 처형되고 6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복귀했다.

1374년, 원을 몰아낸 명나라가 고려에게 제주도의 말2000필을 요구하자

   제주도에 있던 원의 목장 호목들은 300필만 보내왔다.

   결국 고려는 탐라를 정벌할 것을 결정했다.

   최영은 염흥방·변안렬·임견미·나세 등과 함께 전함 314척, 군사 2만 5,100명을 거느리고 제주도에 가서

   평정했다.

   이후 제주는 고려에 귀속되었다.

1376년, 외구가 삼남지방을 침입해 원수 박인계가 연산에서 참패하자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출정을

   자원하여 운봉의 홍산 전투에서 적을 섬멸했다. 

1377년, 서강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고, 왜구 방비에 힘썼다.

1378년, 다시 왜구가 승천부에 쳐들어오자 이성계 등과 출정하여 이를 무찌르고 

1380년, 왜구의 침입 때문에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일자 천도가 백성들과 농사에 해로우며,

   또 내성을 쌓아서 대비하면 될 것이라 하여 이를 철회시켰다.

   또한 승도를 모집하여 전함 130여 척을 만들어 수군의 전력 강화에 노력했는데,

   이는 이후 수군의 해상 활동에 튼튼한 기초가 되었다. 

 

우왕의 밀명으로 정권을 천단한 염흥방·임견미를 숙청했으며,

자신의 딸을 우왕에게 납비했다.

이때 명나라가 철령위의 설치를 통고하여 북변 일대를 요동에 귀속시키려 하자 요동정을 계획하고

군사를 일으켜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했으나,

이성계 등이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정벌이 좌절되었다.

이성계군이 개경에 난입하자 소수의 군사로 이에 맞서 싸우다 체포되어 고봉(고양)에 유배되었다

다시 합포에 옮겨졌다가 공료죄로 개경에 압송되어 참형을 당했다.

 

최영은 고려 말기의 혼란한 내외 정세 속에서 고려를 지탱하려 했으나,

이성계에 의해 제거되었고 이로써 조선 건국을 위한 이성계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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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       작성일자; 2007.08.05.일요일,맑음

 

 

조준; 고려말 개혁파 신진 사대부의 대표적인 인물

생졸; 1346(충목왕2)-1405(태종5),59세

본관; 평양

아버지; 판도 판서 덕유(德裕)

 

고려말 개혁파 신진 사대부의 대표적인 인물로써 조선 왕조의 개창과 문물제도의 정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에게 중용되어 철저한 제도 개혁과 체제 정비를 통해

고려 말기의 사회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전제 개혁의 필요성을 상소하고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을 주장했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참여했다.

 

1390년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 시키고 조선 왕조 개창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 후 개국공신에 봉해졌다.

저서인 '경제육전'을 편찬하여 신왕조의 체제 정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세자 책봉과 요동 정벌 등을 둘러싸고

정도전과 대립하게 되었고 이방원과 정치적 입장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왔고 이방원을 왕으로 옹립했다.

 

우왕 즉위 해인 1374년 문과에 급제 하였고,

1382년 도통사 최영의 천거로 경상도에 내려가 왜구 토벌에 소극적인 도순문사를 징벌했다.

1383년 강원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물리쳐고,

   이후 두문불출하며 경사를 익히고, 윤소종 등과 함께 우왕의 폐위를 도모했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에게 중용되어 정도전 등과 전제개혁을 협의,

   그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여 찬성을 얻고,

   전제개혁에 반대하는 조민수 등을 탄핵하여 유배시켰으며,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참여했다.

1390년(공양왕 2)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키고

조선왕조 개창의 토대를 마련 1392년 정몽주의 탄핵을 받아 체포 되었다가 정몽주가 살해되자 풀려나와

1392년 7월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 후 개국공신 1등으로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졌다.

   세자책봉,요동정벌 등을 둘러싸고 정도전과 대립하게 되어 이방원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왔으며

1400년(정종 2) 투옥되었으나 이방원에 의해 석방되었으며,

1400년11월 이방원을 왕으로 옹립

 

조준의 전제 개혁안은 문란해진 토지 제도의 재편을 통한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서,

녹과전,구분전,군전,투화전,외역전,위전,백정대전,사사전,역전,외록전,공해전 등의 제전을 분급하여

관리와 군인,국역 담당자의 생계를 안정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는 요순 이래의 하,은,주 3대를 이상적인 사회로 설정하고 이를 통해 고려 말기의 사회혼란을 해결하고자 했다.

의 정치이념은 인정과 법치였다.

즉,궁극적인 목표를 유교의 왕도와 인정에 두되 그 방법에 있어서는 법치를 강조했으며,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경계를 바르게 하고,기강을 세우는 문제를 강조했다.

또한 유교 질서의 확립을 강조하여 가묘(家廟)를 세우고 기제(忌祭)를 지내도록 했으며,

효자와 절부를 뽑아 조세를 감면하고 정표를 세워 사회 교화를 이루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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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牧隱) 이색 (李穡 )         작성일자; 2007.08.05.일요일.맑음

 

이색;

   고려후기 대사성,정당문학,판삼사사 등을 역임한 관리.문신,학자로써 

   포은 정몽주,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중 한사람.

생졸; 1328-1396.69세

호; 목은

본관; 한산(韓山,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

 

아버지는 찬성사 이곡이며,이제현의 문인이다.

과거에 급제한 후 원나라에 가서 성리학을 연구하다가 귀국해서 고려의 대신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1388년) 때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아들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이성계에 의해 유배되었다.

조선 개국 후 인재를 아낀 태조가 1395년 그를 한산백에 책봉했으나

이를 사양하고 이듬해 중국 여강으로 가던 중 한산백 이색이 여흥에 있는 신륵사에서 죽었다. 

 

그의 문하에 권근,김종직,변계량 등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하여 학문과 정치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서 고려의 멸망과 함께 은둔하였다.

저서로'목은문고','목은시고' 등이 있다.

 

부음이 들리자 임금이 조회를 정지하고 치제하였으며 부의를 내려 주고 시호를 문정(文靖)이라 하였다.

이색은 이곡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과 슬기로움이 보통 사람과 달랐고, 나이 14세에 성균시에 합격하였다.

1348년,아버지 이곡의 중서사 전부가 되었는데 이색은 조관의 아들이라 하여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 생원이 되었다.

1351년1월,아버지 이곡이 본국에 돌아와 죽으니 부친상으로 귀국하여 상제를 마치고,

   공민왕이 처음으로 과거를 설치할 때는 이제현 등이 색을 장원으로 뽑았다.

1354년, 회시에 합격하였으며, 전정(殿庭)에서의 대책(對策)에서 제2갑(甲) 제2명으로 합격하였다. 독권관(讀券官) 참지정사(參知政事) 두병이(杜秉彝)와 한림 승지(翰林承旨) 구양현(歐陽玄) 등 제공(諸公)이 크게 칭찬하여 칙지로 응봉 한림문자·동지 제고 겸 국사원 편수관(應奉翰林文字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제수받고 귀국하자, 공민왕이 전리 정랑(典理正郞)·예문 응교 겸 춘추 편수(藝文應敎兼春秋編修)를 더하였다. 이듬해 내사 사인(內史舍人)에 오르고, 여름에 원나라 서울에 가서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다. 병신년(1356)에 모친이 늙었다 하여 벼슬을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와 가을에 이부 시랑(吏部侍郞)에 임명되고, 다시 옮겨서 우부승선(右副承宣)에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후설(喉舌)015) 로 임금을 가까이 한 지가 7년이나 되었다.

1361년, 홍건적이 경성을 함락시켜 공민왕이 남행할 때,

색은 왕의 행행에 호종하여 도움을 이루어 적을 물리친 뒤에는 훈 1등에 책정되고 철권을 하사받았다.

계묘년에 정동행중서성 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를 원나라에서 임명받고, 본국에서는 밀직 제학(密直提學)을 임명받고 단성 보리 공신(端誠保理功臣)의 호(號)를 하사받았다.

정미년에 원나라 정동성 낭중(征東省郞中)으로 제수되고, 본국에서는 판개성 겸 성균 대사성(判開城兼成均大司成)으로 임명되었는데, 한때의 경술(經術)을 통하는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 6, 7인을 천거하여 모두 학관(學官)을 겸했다. 경전을 나누어 수업을 하매 서로 어려운 것을 논란해서 각각 있는 지식을 다했다. 색은 변론하고 분석하며 절충하는 데 저물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기억하고 외우기만 하는 습관과 공리의 학설이 점점 없어지고, 성리의 학문이 다시 일어났다.

기유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知貢擧) 이인복(李仁復)으로 더불어 임금에게 청하여 처음으로 중국의 과거법을

쓰자고 했는데, 색이 무릇 공거(貢擧)를 주장한 지 네 번이나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 공정함을 탄복했다.

공민왕이 노국 공주의 영전을 짓는데 말할 수 없으리만큼 사치하고 호화롭기가 지극하여,

시중 유탁이 상서하여 정지하기를 청하니,임금이 노여워하여 유탁을 죽이려 하고,

이색을 시켜서 여러 신하들에게 알리는 교유문을 지으라 했다.

이색이 죄명을 임금에게 물으니, 임금이 탁의 네 가지 죄목을 들었다.

색이 대답하였다.

"이것은 죽일 만한 죄가 아닙니다. 원컨대, 깊이 생각하옵소서." 임금이 더욱 노하며 독촉하기를 급히 하였다.

색이 아뢰었다.

"신이 차라리 죄를 받을지언정 어찌 글로써 죄를 만들겠습니까?" 임금이 감동되어 깨우쳐 탁이 죽기를 면했다.

신해년에 모친의 상을 만났으나,

이듬해 임금이 기복시켜 정당 문학을 삼았는데, 병이 있다고 사면하였다.

갑인년에 공민왕이 돌아갔다.

색이 병이 중해서 문을 닫고 7, 8년을 지내다가 우왕 8년 임술년에 판삼사사로 임명되고,

무진년에 최영이 요동위를 공격하자고 청하여, 우왕이 기로와 양부로 하여금 모여서 가부를 논의하라고 하니,

모두 임금의 비위를 맞추어서 반대하는 자가 적고 좋다고 하는 자가 많았다.

색도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랐으나, 물러 나와서 자제들에게 하는 말이,

"오늘날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의리에 거스리는 논의를 했다." 고 하였다.

이 태조가 회군하자 최영을 물리치고 색으로 문하 시중을 삼았다.

공민왕이 돌아간 뒤로 부터 원자라 천자가 번번이 집정 대신을 들어오라고 해서 모두 겁을 내고 감히 가지 못했는데,

이색이 시중이 되어 폐왕 창(昌)을 친히 조회하도록 하고,

또 창왕으로 감국을 시키도록 하려고 원나라에 들어가기를 자청하여 드디어 색으로 하여금 하정사를 삼았다.

그리고 태조가 칭찬하여 말하였다. "이 노인은 의기가 있다."

이색이 생각하기를 태조의 위엄과 덕이 날로 성해지고, 중외가 마음이 돌려져서 자기가 돌아오기 전에 혹 변란이라도 생길까 염려하여 한 아들을 따라가게 하였다. 태조는 전하(殿下)017) 로 서장관(書狀官)을 시켰다. 천자가 원래에 색의 명망을 들었으므로, 인견하고 종용(從容)하게 하는 말이, "그대가 원나라 조정에서 벼슬해 한림 학사를 했으니 응당 한어(漢語)를 알리라." 하니, 색이 당황하여 한어(漢語)로 대답하기를, "왕이 친히 조회하려 합니다." 하였다. 황제가 그 뜻을 깨닫지 못학고 묻기를, "무슨 말이냐?" 하매, 예부의 관원에게 전하여 주달하게 하였다. 색이 오래도록 조회하지 않았으므로 말씨가 대단히 간삽(艱澁)하니, 천자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대의 한어는 정히 나하추(納哈出)와 같다." 하였다. 색이 돌아와서 사람에게 말하기를, "지금의 황제는 마음에 주장하는 바가 없는 사람이다. 내 마음으로 이것을 물으려니 하면 황제는 묻지 않고, 묻는 바는 모두 내 뜻과는 같지 않더라." 하니, 당시의 논의로 기롱(譏弄)하기를, "큰 성인의 도량을 속유(俗儒)가 어떻게 요량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겨울에 공양왕이 즉위하였는데, 이색은 시론(時論)에 참예하지 않았다고 해서 다섯 차례나 폄척(貶斥)당하였다. 태조가 즉위하자 옛날의 벗이라 하여 용서하니, 태조에게 나아가서 보고 올 때마다 자제들에게 하는 말이, "참으로 천명을 받은 거룩한 임금님이시다." 하였다. 또 일찍이 영선(營繕)을 정지하기를 청하고는 물러 나와서 사람들이 묻는 일이 있으면, "창업하는 임금은 종묘·사직과 궁궐이며 성곽 같은 것을 늦출 수 없는 것이다." 고 했다. 을해년 가을에 관동(關東)에 관광하기를 청하여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그 곳에서 거주하려 하니,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불러 와서 한산백(韓山伯)을 봉했다. 색이 진현(進見)하고 하는 말이, "개국하던 날 어찌 저에게 알리지 않았습니까? 저에게 만일 알렸다면 읍양(揖讓)하는 예를 베풀어서 더욱 빛났을 것인데, 어찌 마고(馬賈)018) 로 하여금 〈추대하는〉 수석이 되게 하셨습니까?" 하였다. 이것은 배극렴(裵克廉)을 가리킨 것이었다. 남은(南誾)이 〈옆에 있다가〉 하는 말이, "어찌 그대 같은 썩은 선비에게 알리겠는가?" 하니, 임금이 은(誾)을 꾸짖어 다시 말을 못하게 하고, 옛날 친구의 예로 대접하여 중문까지 나가서 전별하였다. 뒤에 〈이것을〉 논의하는 자가 있으므로, 남재(南在)가 색의 아들 이종선(李種善)을 불러서 하는 말이, "존공(尊公)이 광언(狂言)을 하여 이를 논의하는 자가 있으니, 떠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화를 입을 것이오." 하였다. 병자년 5월에 신륵사(神勒寺)로 피서하기를 청하였는데, 갈 때에 병이 생겼다. 절에 가자 병이 더하니 중이 옆에 와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색이 손을 내 흔들면서 하는 말이, "죽고 사는 이치는 내가 의심하지 않으오." 하고, 말을 마치자 돌아갔다. 색은 타고난 자질이 밝고 슬기로왔으며, 학문이 정박(精博)하고 마음가짐이 관대하였다. 사리를 처리하는 데 자상하고 밝아서, 재상이 되어 기성의 법을 따르는 데 힘을 쓰고 복잡하게 고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후학을 가르치는 데에도 애를 쓰고 부지런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문장을 짓는 데는 붓만 잡으면 즉시 쓰되 사연이 정밀하고 간절했었다. 문집 55권이 세상에 나왔다. 집을 위해서는 재산의 유무(有無)를 묻지 않았으며, 평시에 경솔한 말과 갑자기 노여워하는 얼굴빛을 보지 못했다. 연회나 접대를 받는 자리에서도 여유있고 침착하여서 처사하는 데 난번되지 않았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었으며 언동은 자연스러웠다. 오랫동안 임금의 은총과 좋은 자리에 있었어도 기뻐하지 않았고, 두 번이나 변란과 불행을 만났으되 슬퍼하지도 않았다. 늙어서 왕지(王旨)를 받들어 지공 대사(指空大師)019) 와 나옹 대사(懶翁大師)020) 의 부도(浮圖)에 명(銘)을 지었기로, 그 중들이 문하에 내왕해서 불교를 좋아한다는 비평을 받았다. 색이 듣고 하는 말이, "저들이 임금과 어버이를 위해서 복을 기원해 주는데, 내가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 하였다.

이색의 아들은 세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 이종덕과 둘째 아들 이종학은 모두 벼슬이 밀직사에 이르렀으나 먼저 죽었고,셋째 아들 이종선은 병조 참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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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圃隱) 정몽주            작성일자; 2007.08.02.목요일,맑음

 

 

 

생졸; 1337년(충숙왕6년)-1392년(공양왕4년), 56세

본관; 영일(迎日).

출생지;영천(永川).

아버지; 정운관(鄭云瓘)

어머니; 이씨(李氏)    

 

                                                                   

부모가 난초 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 뜨리는 꿈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몽란이라 하였으나

후일 몽룡으로 개명하였고 성인이 되자 다시 몽주라 고쳤다.

1357년 (공민왕 6))에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급제해,

1362년 예문관의 수찬이 되었다.

   이때 김득배가 홍건적을 격파해 서울을 수복하고서도 김용의 음모로 상주에서 효수되자,

   그의 문생으로서 왕에게 시체를 거둘 수 있도록 청해 장사지냈다.

1363년,이성계와 함께 여진 토벌에 참가하였다.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해져서 사대부들이 모두 백일 단상(短喪)을 입었는데,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廬墓)를 살고 슬픔과 예절을 극진히 하므로써

1366년, 나라에서 정려(旌閭: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를 내렸다.

1372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어 일행 12인이 익사하였으나,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구조선에 구조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1376년(우왕 2), 이인임,지 윤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 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당시 왜구의 침략이 심해 나흥유를 일본에 보내어 화친을 도모했으나  그 주장(主將)에게 붙잡혔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으나 그에게 앙심을 품었던 권신들의 추천으로 구주의 패가대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건너가 설명해 맡은 임무를 수행했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80년,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를 토벌하였다.

 1382년, 청시사(전왕의 시호를 요청하기 위해 보내는 사신)로 두 차례 명나라에 갔으나 모두 입국을 거부당해 요동에서

   되돌아왔다.

1384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명나라는 고려에 출병하려고 세공을 증액하고 있었고  5년간의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 하여

   고려 사신을 유배시키는 등 고려와의 국교관계를 악화시키고 있었다,

   이에 모두 명나라에 봉사하기를 꺼려했으나 사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외교관계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5년,우홍명 등 33인을 뽑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가서 증액된 세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의 면제를 요청해

   결국 관철시켰다.

1389년(공양왕1년),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웠다.

   '이초의 옥사'가 일어 났을 때 당시 조정에서 물러난 구파 정객들에 대한 대간의 논죄가 끊임없이 계속됨을 보고

   이를 부당하다고 말했으나 오히려 탄핵을 받고 사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391년,이성계의 위망이 날로 높아지자 조준,남은,정도전이 그를 추책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런 와중에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奭)을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 떨어져

   벽란도에 드러눕게 되자 조준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위급함을 고해 그날 밤으로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역으로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정몽주도 이를 알고 정세를 엿보려 이성계를 문병하였으나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등에게

   살해되었다.

1401년(태종 1),권근의 요청에 의해 추증되었다.

1517년(중종 12),문묘에 배향 될 때 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고려의 벼슬만을 쓰고 시호를 적지 않음으로써 

두 왕조를 섬기지    않았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개성의 숭양서원 등 13개의 서원에 제향되었고 묘 아래에 있는 영모재,영천의 임고 서원 등

몇 곳의 서원에는 그의 초상을 봉안하고 있다.

 

시조 '단심가'는 그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후세에까지 많이 회자되고 있다.

문집으로 '포은집'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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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의의 난과 함흥차사          작성일자; 2007.07.20.금요일,맑음

 

조사의의 난은 1402년 안변부사 조사의가 동북면(함경도)에서 일으킨 반란을 말한다.

조사의는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 방석이 희생 되자 벼르고 있다가

3대왕인 태종 1402년.태상왕 태조 이성계의 위세를 등에 업고 봉기한 사건이다.

 

명분은 죽어서도 학대 받은 계비 신덕왕후 강씨(방번,방석의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이었다.

이때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 강현도 참여하였다.

조사의는 신덕 왕후 강씨의 친척으로1393년 형조에서 의랑(정사품 벼슬)을 지냈고,

1397년 첨절제사(각 진영에 속했던 무관직) 등을 지냈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 나면서 직위 해제 되었고,

서인으로 전락하여 전라도 수군에 배치되어 노역에 종사하였다.

 

이성계의 영향으로 이후 풀려나 1402년 안변 부사로 복권 되었다.

이성계는 조사의가 신덕왕후의 친척이라고 아꼈는데,

태종 이방원은 이점을 알고 그를 풀어주고 안변부사로 보냈으나,

부임지인 안변(함경남도 안변군에 있는 면)에서 호족세력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도모하였고

이성계는 조사의를 지지하였다.

 

조정에서는 태조 이성계를 설득하기 위해 박순,송류 등을 파견하여 반군을 회유 하였으나,

도리어 죽음을 당하였다.

초기에는 반군이 우세하여 관군의 선봉 이천우가 격파되었고,

조사의의 반란군은 평안도 덕천·안주로 이동시켰으며 군사는 1만 명으로 늘어났다.

1402년11월17일.청천강에서 진압군과 싸움이 벌어 졌으나 조사의가 이끄는 반란군이 대패하고 말았다.

사기가 저하된 부하들이 뿔뿔이 이산하자 안변에 돌아 왔으나 아들 조홍과 함께 관군에 잡혀

12월07일. 도성으로 압송 되었다가 12월18일 참형되었다.

함흥차사의 고사(古事)가 바로 이 사건에서 연유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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