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3대왕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      작성일자; 2008.04.25.토요일.맑음

 

원경왕후 민씨는 고려 공민왕14년인 1365년 여흥 부원군 민제의 딸로 태어났으며

우왕8년인 1382년 18세 때 두 살 어린 이방원과 혼인했다.

남편 이방원은 혼인한 이듬해 당시 여덟 명의 아들 가운에 유일한 문과 과거에 급제하자 이성계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임명장을 두세 번 읽게 했다고 한다.

 

조선 건국 초기

신의왕후 한씨(이성계) 소생 왕자들의 소외와 이방석의 세자 책봉,정도전의 사병 혁파를 빌미로 발생한 제1차 왕자의 난의

배후에는 원경왕후가 있었다.

정치적 식견이 뛰어났던 그녀는 정도전의 음모를 사전에 감지하여 이방원에게 위급한 상황을 알리고 친정인 민씨 가문을 통해

병사와 무기를 조달해 주었다.

제2차 왕자의 난에서도 그녀는 재차 친정의 힘을 동원하여 이방원의 승리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태종의 아내이자 세종대왕의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는

두 차례 왕자의 난에 친정 민씨를 동원하여 승리하게 함으로써 남편을 권좌에 올린 여걸이다.

하지만 ,강력한 왕권 국가를 추구하던 태종이 외척의 권력을 방지하기 위해 원경왕후의 네 명의 동생을 죽이고,

이에 상심한 아버지 민제까지 홧병으로 숨지면서 고려 이래 명문가였던 친정이 몰락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로 인해 울분에 찬 말년을 보내야 했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서 중전이 된 원경왕후는 태종의 지독한 여성 편력으로 인해 모진 속병을 앓았다.

원경왕후 민씨는 태조 이성계의 즉위와 함께 정안대군의 부인으로서 정녕옹주에 봉해졌다.

당시에는 태종과의 금슬도 원만해서 4남 4녀를 얻었는데,

태조3년인 1394년에 양녕대군 이제,태조5년인 1396년에 효령대군 이보,태조6년인 1397년에 충녕대군 이도를 낳았다.

막내 아들인 성녕대군 이종은 태종 1412년에 얻었다.

양녕대군 이전에 그녀는 아들을 세 명 낳았지만 유아기에 사망했다.

 

태조 이성계가 병석에 눕고 공신들의 압박이 심해지자 ,

이방원은 심복인 하륜,박은 등과 형제들의 중지를 모아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심복인 이숙번, 조영규 등과

처남 민무구,민무질 등과 함께 은밀히 병력을 모았다.

당시 정도전은 태조의 거처를 옮기는 일을 논의하자며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를 궁궐로 끌어들여

척살하려 했다.

이방원은 전 참찬 이무로부터 정도전 일파의 흉계를 전해 들었지만 아버지에게 불효를 저지를 수 없다며 형들과 함께 입궐했다.

그러자, 원경왕후 민씨는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종 김소근을 급히 대궐로 보내 남편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태종이 집에 돌아오자 그녀는 동생인 민무질, 민무구 형제가 마련한 병사와 무기를 전해주고 거사를 종용했다.

이방원은 안산 군수 이숙번 등 측근들과 함께 거사를 감행했다.

그때 정도전은 소동에 있던 남은의 첩의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기습을 당하자 전 판사 민부의 집으로 피했지만

그의 밀고로 사로잡힌 뒤 참살 당했다.

이방원은 이어서 남은과 심효생,박위 등을 죽이고 대궐로 들어가 세자 이방석과 이방번을 끌어낸 다음

이방석은 궁성 서문 밖에서,이방번은 양화도 부근에서 죽였다.

한밤의 살육전이 종료되자 이튿날 아침 ,

변중량,노석주 등이 태조에게 나아가 영안군 이방과를 세자로 책봉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뜻밖의 변란에 상심한 태조는 9월 이방과에게 미련 없이 보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애당초 하륜,이거이 등은 이방원을 옹립하려 했지만 주위의 이목을 의식해 잠시 옥좌를 이방과에게 맡긴 것이었다.

 

정종이 즉위하자 이방원은 정안군으로 봉해지고 의흥삼군부 우군절제사와 판상서사사 겸 정사공신 1등으로 논정되었으며

개국공신 1등으로 추록되면서 권력을 움켜쥐었다.

 

1400년(정종 2년)1월28일,회안대군 이방간이 박포와 함께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태조의 넷째 아들 이방간은 왕위에 미련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우 이방원의 기세에 눌려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포가 그를 찾아와 정변을 부추겼던 것이다.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정도전이 이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여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런데, 논공행상에서 밀려나 불평을 늘어 놓다가 죽주로 귀양 간 상태에서 유배지를 벗어나 이방간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박포는 이방간에게 장차 이방원이 보위에 오르기 위해 걸림돌이 되는 당신을 죽일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 말에 속아넘어간 이방간은 민원공,이성기 등과 함께 사냥을 핑계로 개경 외곽에 사병들을 개경으로 진군했다.

우현보의 아들 우홍부로부터 사전에 그들의 계획을 전해들은 이방원은 개경 요소요소에 군대를 배치하고 대응했다.

이때, 이지란,이화,한규,김우 등이 호응했고 승지 이숙번과 처남 민무구,민무질 형제가 가세했다.

이윽고 양군은 선죽교와 남산,묘련사 고개 근처에서 접전을 벌였다.

하지만 이방간이 동원한 사병이 잘 훈련된 이방원의 정규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게다가 반란군으로 낙인찍힌 이방간의 사병들은 백성들에게도 외면당했다.

결국 이방간은 대패한 끝에 홀몸으로 성균관 골짜기를 넘어 도주하다 이방원의 군사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방원은 동복형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다는 이유로 그를 살려주고 토산으로 귀양 보낸 다음

그를 부추긴 박포를 참수형에 처했다.

 

그날 아침 민씨는 무녀 추비방,유방 등을 불러 승부를 물었는데 모두가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래도 불안했던 민씨는 이웃에 살던 정사파란 할미 무당을 불러 간밤에 꾼 꿈의 해몽을 청했다.

“어젯밤 새벽녘 꿈에 신교리 옛집에 있었는데 우리 막둥이가 중천에 뜬 해바퀴 가운데 앉아있었네.

이것이 대체 무슨 징조인가?”

그러자 정사파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정안공께서 마땅히 왕이 되어 이 아기를 안아줄 징조입니다.”

그때는 셋째 이도가 이방원의 막내 아들이었으므로 ‘막둥이’란 아명으로 불렸는데,

어머니 민씨의 꿈에 나타나 장차 아버지가 보위에 오를 것이라는 징조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당장의 전투 결과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애타게 승전보를 기다리던 정오 무렵 군사 목인해가 타고 출전했던 말이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을 본 민씨는 싸움에 패했다고 여기고 남편과 함께 죽겠다며 전장으로 뛰쳐 나가려 했다.

이때 시녀 김씨 등 다섯 사람이 말렸지만 듣지 않았는데 노비 한기가 길을 가로막아 그녀를 가지 못하게 했다.

잠시 후 정사파가 찾아와 이방원이 싸움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전해주자 비로소 집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강인한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 사건은 여흥 민씨 가문의 두 대군 부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이방간의 부인은 민선의 딸이었는데 남편이 패하면서 토산으로 함께 귀양을 떠났다.

반대로 원경왕후 민씨는 남편이 세자에 책봉되면서 세자빈으로서 정빈에 봉해졌고,

그 해 11월, 태종이 즉위하면서 정비가 되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보위에 오른 태종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원경왕후 민씨가 세운 공로를 잊지 않았다.

훗날 그는 왕건의 부인 유씨의 일화를 읽고는 원경왕후가 민무구,민무질 형제와 함께 갑옷과 병기를 준비하여 거사를 치르게

한 일이 더욱 의미 깊었다고 상찬했다.

 

1402년(태종 2년),

   태종은 장인 민제의 집에 거동하여 잔치를 벌이고 춤추며 즐거워했다.

   도중에 태종이 먼저 잠저 때와 같이 서로 대하자고 하자 민제가 선달(先達)이라고 부르자 태종은 사부(師傅)라고 화답하며

   이전의 스승과 제자 사이로 돌아가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태종 등극 초기에 벌어진 정겨운 광경이었다.

 

태종은 보위에 오른 뒤 왕권 확립이라는 대의를 추구하면서 원경왕후 민씨와 마찰을 빚었다.

원경왕후가 친정인 여흥 민씨 일문에 일정한 권력 지분을 요구했지만 조선을 강력한 왕권 국가로 만들고자 했던 태종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녀의 여종 출신이었던 효빈 김씨의 처소만 들락거려 갈등을 고조시켰다.

이런 상황에 태종의 심한 여성 편력이 기름을 부었다.

어느 날 태종은 원경왕후가 자신과 관계한 궁인을 꾸짖자 대노하여 시녀, 환관 20여 명을 내쳤다.

그러더니 제후는 9명의 부인을 둔다는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가례색을 설치한 다음 9명의 후궁까지 들이도록 법제화하여

원경왕후의 화를 부추겼다.

 

당시 태종의 여성 편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궐내에 직첩을 받은 후궁이 6명, 직첩을 받지 못한 후궁이 5명이었는데 이 중에 한 명은 성씨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 결과 태종은 수많은 자식들을 얻었다.

효빈 김씨는 경녕군을 낳았고, 신빈 신씨는 성녕군을 포함하여 3남 6녀를 낳았다.

의빈 김씨는 정혜옹주를, 소빈 노씨는 숙혜옹주를, 숙의 최씨는 희령군을 낳았다.

직첩을 받지 못한 후궁들 가운데 안씨는 해녕군과 옹주 2명을, 김씨는 숙안옹주, 이씨는 숙순옹주, 최씨는 후령군,

성씨를 알 수 없는 사람이 소선옹주를 낳았다.

11명의 후궁을 통해 8남 13녀를 낳은 것이다.

이는 역대 어떤 국왕들보다 많은 숫자였다.

그런 태종의 바람기 때문에 한때 살가운 동지였던 부부의 갈등은 깊어졌고 급기야 외척에 대한 경계심으로까지 이어졌다.

태종은 외척이 궁중에 들어와 일하는 것은 궁중에서 소소한 일을 담당하는 궁인들 때문이라 하여 궁궐 내의 청소를 담당하는

남자인 파자(巴只)를 환관으로 대체하고 궂은일을 도맡은 무수리를 궐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함으로써 궁중의 일이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 무렵 태종은 자신의 등극 과정에 크게 기여했던 처남 민무구,민무질 형제와 세자 이제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세자는 어린 시절 외가에서 자랐으므로 외삼촌들과의 관계가 각별했다.

1406년(태종 6년) ,태종은 돌연 양위를 선언했다.

과연 그 과정에서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몹시 기뻐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대노한 태종은 두 사람을 제주도에 귀양 보낸 다음 1408년(태종 8년)에 이르러 그들을 사사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장인 민제는 자식들을 걱정하다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렇듯 졸지에 집안이 쑥대밭이 되자 원경왕후 민씨는 피눈물을 흘리며 무정한 남편을 원망했다.

 

1415년(태종 15년) 4월, 민씨의 남아있던 동생 민무휼과 민무회가 또 다시 태종의 그물에 걸려 들었다.

 당시 민무회는 다른 사람의 노비 소송에 관여한 죄로 하옥되었다.

그 일로 조정이 시끄러웠는데 때마침 부왕의 눈총을 받고 있던 세자 이제가

엉겁결에 ‘두 외숙이 자신에게 외가를 잘 부탁한다.’라는 말을 했다고 토로했던 것이다.

이는 세자가 장차 보위에 오르면 앞서 억울하게 죽은 두 형을 신원시켜 달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가뜩이나 날이 서있던 태종은 대간의 고발이 들어오자마자 그들의 직첩을 거두고 유배형에 처했다.

그해 12월 15일, 태종은 갑자기 의정부 참찬 황희, 이조판서 박은, 지신사 유사눌을 대전으로 불러들이더니

중전과 그녀의 동생들이 과거 자신의 핏줄을 잉태한 효빈 김씨를 죽이려 했다면서 분개했다.

그는 교하에서 온 경녕군 이비의 유모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면서,

경녕군이 아무리 비천한 몸에서 태어났어도 임금의 피를 이어받은 왕자인데 민씨 일가에서 여러 가지 잔꾀를 써서 죽이려

했으니 참으로 극악하고 음흉한 일이므로 마땅히 그 처분을 역사에 남겨 외척들에게 경고하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틀 뒤인 12월 17일부터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앞 다투어 민씨 일문을 척결하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12월 21일 태종은 의정부참찬 최이, 우부대언 서선을 위관으로 삼아 민무휼과 민무회가 원윤 이비 모자를 죽이고자 한 죄와

세자에게 불경한 죄를 밝히라고 명했다.

“신하가 임금을 죽이면 관에 있는 자가 죽여서 용서하지 않고, 자식이 아비를 죽이면 관에 있는 자가 죽여서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민무회 등의 죄는 비록 이것과 같지는 않으나 그 꾀에 참여한 민씨 집안의 노비를 잡아들여 국문하라.”

추상같은 어명이 떨어지자 위관들은 민씨 집안의 노비 삼덕과 화상, 상좌 세 사람을 체포하여 심문한 다음 의금부에 가두었다.

이어서 유배지에 있던 민씨 형제를 재차 압송하여 국문했다.

한데 국문 과정에서 그들은 앞서 죽은 민무질, 민무구가 무고하다고 항변함으로써 태종의 심사를 더욱 사납게 만들었다.

결국 그들은 혹형으로 만신창이가 된 채 원주와 청주로 재차 유배되었다.

그렇듯 자신의 과거 행적 때문에 남은 두 동생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원경왕후는 식음을 전폐하고 태종의 폭거에 저항했다.

본가의 어머니 송씨도 충격을 받고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태종은 요지부동이었다.

1416년(태종 16년) 1월 12일, 의정부·공신·육조·대간이 연명으로 두 사람을 극형에 처하고 아울러 그들 형제의 처자까지

벌하여 앞으로의 후환을 없애자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자 태종은 의금부도사 이맹진을 원주로, 송인산을 청주로 보내 두 사람의 처결을 명했다.

이튿날 도성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민무휼과 민무회가 자결했다고 보고했다.

그 충격으로 병석에 누운 어머니 송씨까지 세상을 떠나자 여흥 민씨는 완전히 패가망신한 꼴이 되었다.

태종은 그 참에 자신을 원망하고 비난하는 원경왕후 민씨까지 폐출하려 했다.

하지만 세자와 왕자들의 생모인지라 중신들이 격렬하게 반대했으므로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1418년(태종18년) ,세자 이제가 폐위되어 양녕대군에 책봉되고 충녕대군 이도가 세자에 책봉되자 원경왕후는 이를 형제간의

분란으로 보고 끝까지 반대했다.

그 해에 태종이 세자 이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자,

민씨도 왕대비가 되어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로 존호가 올려졌다.

 

세종은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에게 효성을 다했다.

충녕대군 시절 자신이 책을 너무 많이 읽다가 건강을 해칠까봐 몇 권만 남겨두고 중궁전에 가져다놓을 정도로 사랑을 베풀었던

어머니, 동생 성녕대군이 죽은 뒤 눈물이 마를 날이 없던 분, 젊은 날에는 태종을 위해 군사를 기르고 갑주와 보검을 챙겨주던

여장부였건만 나이 들어 남편과의 불화로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숱하게 마음고생을 했던 그 어머니였다.

 

1420년(세종 2년) 5월, 세종은 어머니가 학질에 걸리자 ‘학질은 여러 곳을 자주 옮겨 다녀야 병이 떨어진다.’는 속설에 따라

   5월 27일부터 43일간 무려 12곳을 전전했다.

   그 동안 끼니를 잇는 둥 마는 둥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기도했다.

   당시 세종은 말 한 필에 내시 두 사람만을 대동한 채 이리저리 옮겨 다녔는데, 한밤중에 길을 잃어 엉뚱한 곳으로 가기도 했다.

   또 탕약과 음식은 반드시 먼저 맛을 보고 드시게 했다.

   이런 아들의 정성에 냉혈한 태종도 감명을 받았는지 위독한 민씨의 손을 꼭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1420년(세종 2년)7월10일, 한 많은 세월을 보냈던 원경왕후 민씨는 수강궁 별전에서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해 나이 56세였다.

 

세종은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풀어 헤친 다음 맨발로 거적 위에 엎드려 통곡했는데

주위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가슴을 저몄다.

당시 날씨가 무더워 바닥에서 습기가 올라오자 신하들이 몰래 기름먹인 종이를 거적 밑에 깔았다.

세종이 이를 알고 몹시 노여워했다.

세종은 1422년(세종 4년) 5월, 태종이 깊은 병에 걸리자 탕약과 음식을 손수 받들어 드렸다.

   하지만 병환이 심해 새로 지은 궁궐로 옮겨야 했는데 세종은 걸어서 그 뒤를 따라가 간병에 정성을 다했다.

   결국 숨을 거둔 태종은 원경왕후가 먼저 묻힌 헌릉에 합장되었다.

   평생 뜨겁고 곡절 많은 세월을 보냈던 원경왕후 민씨와 태종 이방원은 죽어서야 그렇듯

   한 자리에 누워 고단한 몸을 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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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     작성일자; 2008.04.15.화요일,맑음

 

하륜

생졸; 1347(충목왕3)~1416(태종16년)

하륜은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의 문신으로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데 기여했고,

즉위 후에는 태종을 보좌하여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공헌했다.

그는 이색, 정몽주 등과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했으나 곧 정치적 변신을 했다.

정도전 등에 의해 세자책봉에서 밀려나고 병력마저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이방원과 급속히 가까워져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적극 지지했다.

태종의 즉위 직전에 정승 반열에 올랐고,

태종 즉위 후에는 공신으로 책록되고 신왕조 초기의 문물제도 정비와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에 능했다.

관은 진주.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아버지는 순흥부사 윤린(允潾)이다.

 

1360년(공민왕 9)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1365년 문과에 급제했다.

1367년 춘추관검열 등을 거쳐 감찰규정으로 있을 때 신돈의 비행을 공박하다가 지영주사로 좌천되었다.

1371년 안렴사 김주가 그의 치적을 제일로 보고하여 고공좌랑에 승진되었으며,

   그뒤 지평·보문각직제학·대사성 등을 지냈다.

1382년(우왕 8),모친상을 치른 후 부터 우부대언·우대언·밀직제학 등 밀직사 소속의 관직을 역임했다.

1388년 최영의 요동 정벌 계획을 극력 반대하다가 양주에 유배 당했으나,

   그해 여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최영이 제거되자 관직을 회복했다.

1389년(공양왕 1), 봄에는 영흥군 왕환의 진위 사건으로 광주 등지로 추방되었으나

1390년 윤이·이초의 옥사가 일어나자 풀려났다.

1391년에는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었다.

  그는 이색·정몽주·이숭인·권근 등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함으로써 초기에는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했다.

1393년(태조 2), 권근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변신을 하여 경기좌도 도관찰 출척사가 되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정도전과의 불화로 그다지 비중 있는 직책을 맡지 못했다.

1394년, 첨서중추원사가 되었으나 부친상으로 사직했다.

1396년, 예문춘추관학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명나라와의 표전시비로 정도전과 정면으로 대립했다.

   이 사건의 발단은 조선에서 명에 보낸 외교 문서에 명나라를 모욕하는 언사가 있다고 하여

   문서 작성자인 정도전을 압송하라는 명나라측의 강경한 요구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때 그는 정도전을 보낼 것을 주장했으며

1396년에는 계품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왔다.

1397년, 이에 정도전의 미움을 사게 되어 계림부윤으로 좌천되었다.

    계림부윤 재직시에도 박자안 사건에 연루됨으로써 수원에 안치되는 등 정치적 수난을 겪었다.

   이에 당시 정도전 등에 의해 세자책봉에서 밀려나고 자신의 병력마저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이방원과 급속히 가까워져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적극 지지했다.

   그 공으로 정종이 즉위한 후 정사공신 1등으로 진산군에 봉해졌다.

   그해 대대적인 관직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정당문학이 되었으며, 이방원의 세자책봉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하여 태종의 즉위 직전에는 정승 반열에 올라 서서히 정국을 주도해가기 시작했다.

1400년(정종 2), 문하시랑찬성사로서 관제개편을 주도하고 판의흥삼군부사·우정승 등의 요직을 거쳤다.

   그해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이어 영삼사사로서 지공거가 되고 관제를 개혁했으며, 영사평부사 겸 판호조사로서 저화를 유통시키게 했다.

1402년(태종 2) ,좌정승이 되었으며, 명나라 영락제의 등극을 축하하는 등극사로서 명나라에 가

   조선 왕조를 승인하는 고명인장을 받아왔다.

1405년 ,좌정승 세자사가 되고,

1406년에는 중시독권관이 되어 변계량 등 10명을 뽑았다.

   그뒤 영의정부사·좌정승·좌의정을 등을 역임하고

1416년, 70세로 치사하여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치사 후 왕명으로 함길도 선왕의 능침을 순심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죽었다.

 

시문에 능하고 음양·의술·성경·지리 등에 조예가 깊었으며, 문한에 주관하여 '동국사략','태조실록'의 편수에도 참여했다.

신왕조 초기의 한양천도, 문물제도의 정비에 크게 기여했으며 외교정책에 능해 조선 초기 명나라와의 여러 문제를 해결했다.

특히 태종을 보좌하여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문집으로 '호정집'이 있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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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색을 멀리한 송반          작성일시; 2008.04.10.목요일,맑음

 

태종 때 송반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여색을 멀리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는 건장한 데다 미남이었다.

그가 굳이 여색을 밝히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인네들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많은 사람임에도

여자들을 멀리해 오히려 그의 인품을 높이 샀다.

그런데 충청도 진천 출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바 있는 유정현 대감은 송반을 자식처럼 아끼면서 자신의 집에 기거토록 했다.

유대감에게는 송반 또래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가간 지 얼마되지 않아 요절을 하였다.

유대감에게는 이제 일곱 살 난 둘째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을 가르칠 사범이 필요하던 차였다.

마침 송반에 대한 얘기를 전해들은 유정승은 특별 과외 선생격으로 송반을 집으로 들였던 것이다.

송반은 정승의 둘째 아들을 친동생처럼 보살펴 주며 글을 가르쳤고 정승께도 마치 친부모처럼 섬기며 생활하였다.

유정승은 그를 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마치 죽었던 큰 아들이 살아온 것 같은 착각을 할 때도 있을 정도였다.송반은 아주 사랑스럽고 소중한 사람이었다.

세월은 빨라 송반이 대감의 집에 온 지도 일 년이 다 지날 무렵이었다.

때는 꽃피는 춘삼월 파릇한 새싹이 돋고 온갖 꽃들이 앞 다투어 꽃망울을 터뜨렸다.

이 파릇한 봄날에 아무리 여색을 멀리한다는 송반인들 심중을 굳게 한다는 것은 의지일 뿐이지 목석이 아닌 바에야

송반인들 무얼할 수가있을까?

그도 인간인 것을.....어느 날 저녁 송반은 마음도 달랠 겸 집 뒷산인 낙산에 올랐다.

십만 인구가 산다는 장안을 둘러도 보았다. 집집마다 살구꽃이 활짝 피었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지 송반이 서 있는 맞은편 멀리 한 여인이 서 있는데 꽃인지 사람인지 분간을 할 수 없이 화사하였다.

그 여인은 몸도 움직이지 않고 곳곳하게 서서 송반만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감히 어느 집 여인이 저리 무례하게 낯 선 남정네를 눈 한 번 깜짝 않고 바라보고 있단 말인가?

미인임에는 틀림없지만 참으로 괴이한 일이로다.

자세히 보니 그 여인이 서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자신이 기거하고 있는 유정현 대감의 집이었다.

바로 유대감의 며느리 였던 것이다.

그 여인도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남편의 요절 이후 자식 없이 청상과부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비록 한 집에 머물러 있었지만 송반은 그녀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남녀가 유별하고 수절을 하고 있는 여인이니 감히 서로 얼굴을 마주볼 수 조차 없는 일이었고 가까이에도 접근하지 않았다.

송반은 재빨리 눈길을 돌려 버렸다.

그리고 낙산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대감집 며느리는 그게 아니었었던가 보았다.

송반에게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송반은 피곤하기도 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소리가 나서 눈을 떠보니 며느리의 여종인 옥란이 문을 열고는 무언가를 내미는 게 아닌가

"이 밤중에 무슨 일이오?"

여종은 마님이 갖다 드리라고 했다면서 똘똘 말은 한지를 내밀고 총총히 뒤돌아섰다 열린 문으로 새는 달빛을 등 삼아

한지를 풀어보니 7언 절구의 시(詩)가 가슴 떨리게 하였다.

                 '봄바람에 비 내려 활짝 핀 꽃 젖는 밤에 이 어찌 마음을 누를 것이오.
                  오늘 밤 당신을 맞아드릴 테니, 마음 편히 오소서'


송반은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다.

주인집 과부 며느리의 이 같은 마음이 부도덕해 나무라거나 기꺼이 받아들이기 보다는

'젊은 여인이 혼자 살다보니 괴롭고 힘든 것은 당연한 일 얼마나 외로웠으면 이렇게 시를 적어 보냈을까'

이해하려 애썼다.

하지만 결코 여자를 찾아가지는 않았다.

예기치 않았던 사건으로 인해 불편해진 마음을 달래며 어느날 밤 잠을 청하려는데

옥란이가 또 송반을 찾아와 편지를 또 전해주었다.

"여인의 마음을 그리도 헤아리지 못하시는지요? 제 청을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면 내 오늘밤 자결을 할 것이옵니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송반은 의복을 갖추고 여인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야기하였다.

유정승께서 자기에게 베푼 정과 사랑을 생각하면 절대 그럴 수 없으며 도의에 벗어나는 일은 할 수 없으니 마음을 진정하고

노여움을 풀라며 달랬다.

그때였다.

밖에서는 새벽잠 없는 노인 유정승이 마당을 거닐다가 며느리의 방에서 흘러 나오는 소릴 듣고 며느리 방문 앞으로 가

귀를 기울였다.

밖에서 보아 하니 방 안에 두 남녀가 분명히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 기울여 들어보니 송반과 며느리가 아닌가 유정승은 급히 단도를 들고 와 문을 열고 내리칠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젊은 남자가 하는 말이 들려왔다.

오히려 여인의 마음을 갈아 앉히려고 예의를 지켜 말하는 소리가 역력했다.

역시 자신이 생각하는 송반은 여자를 함부로 탐하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는 사람임에 틀림 없었다.

유정승은 감탄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대감은 두 사람을 불렀다.

먼저 송반에게 간곡히 부탁을 하였다.

죽은 아들 대신 자신의 아들이 되어 달라고 한 것이다.

청상 과부인 자기 며느리를 아내로 받아들여 함께 살자는 얘기였다.

송반은 그의 간곡한 마음을 받아들여 그 여인과 혼인하였다.

유정승은 세상에 다시없는 시아버지요 부형이었다.

자칫 당장 쫓겨날 만한 일을 저지른 셈인데도 그 며느리를 감싸고 여색을 멀리했던 송반을

다시 그의 아들로 태어나게 한 셈이었다.

훗날 송반은 대도호 부사를 거쳐 병조 판서에 올랐다.

그 후에도 그가 지닌 인품 만큼이나 빛나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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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작성일자; 2008.03.18.화요일,맑음

 

황희

생졸; 1363(공민왕 12)∼1452(문종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 구부(懼夫),

호; 방촌(厖村).

가계도;

황석부(黃石富)의 증손

조부; 황균비(黃均庇)

부;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황군서(黃君瑞)

모; 김우(金祐)의 딸

출생; 개성 가조리(可助里).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

1383년, 사마시,

1385년 진사시에 각각 합격하였다.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1390년(공양왕 2),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일정 기간 은둔생활(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는 설화)

1394년(태조 3), 태조의 적극적인 출사(出仕) 요청을 수용하여 성균관학관에 제수되면서 세자우정자를 겸임하였다.

   이 후 직예문춘추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398년, 문하부우습유 재직 중 언관으로서 사사로이 국사를 논의했다고 문책되어 경원 교수로 편출되었다가,

1398년(정종 즉위년), 우습유로 소환되었다.

이듬 해 언사로 파직되었다가 그 해 2월경 문하부우보궐에 복직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언사로 파직되었으며, 곧 경기도 도사를 거쳐 형조·예조·이조·병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1401년(태종 1)경 ,지신사 박석명이 태종에게 천거해 도평의사사경력에 발탁되었다.

   그 뒤 병조의랑에 체직되었다가

1402년, 아버지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그 해 겨울 군기를 관장하는 승추부의 인물난으로 기복되어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제수되었다.

1404년,우사간대부를 거쳐 승정원좌부대인에 오르고, 이듬 해박석명의 후임으로 승정원지신사에 발탁되었다.

1409년,참지의정부사가 되고,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대사헌 등을 지냈다.

1411년, 병조판서,

1413년,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 해, 질병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1415년, 이조판서 재직중 송사 처리와 관련해 육조에 문책이 내려지면서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 해 행랑도감제조에 복위된 데 이어, 참찬·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16년에는 세자인 양녕대군의 실행을 옹호하다가 다시금 파직되었다.

   그 뒤 조정으로 복귀해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윤, 판한성부사를 역임하였다.

1418년, 세자 폐출의 불가함을 극간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교하로 유배되고, 곧 남원부에 이치(移置)되었다.

   세종의 치세가 시작되고 아울러 태종의 노여움이 풀리면서,

1422년(세종 4) ,남원에서 소환, 직첩과 과전을 환급받고 참찬으로 복직되었다.

1423년, 예조판서에 이어 기근이 만연된 강원도에 관찰사로 파견되어 구휼하였다.

   그리고 판우군도총제에 제수되면서 강원도관찰사를 계속 겸대하였다.

1424년, 찬성,

이듬해에는 대사헌을 겸대하였다.

또한 1426년에는 이조판서와 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발탁되면서 판병조사를 겸대하였다.

1427년, 좌의정 겸 판이조사가 되었고, 그 해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기복되어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이어 평안도도체찰사로 파견되어 약산성기(藥山城基)를 답사하였다.

   이 때 약산이 요충지라 해서 영변대도호부를 설치한 뒤 평안도도절제사의 본영으로 삼게 하였다.

1430년, 좌의정으로서, 감목을 잘못해 국마 1,000여 필을 죽인 일로 해서 사헌부에 구금된 태석균의 일에 개입해

   선처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일국의 대신이 치죄에 개입함은 부당할 뿐더러, 사헌부에 개입하는 관례를 남기게 되므로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래서 한때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하였다.

1431년, 다시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449년,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하기까지 18년 동안 국정을 통리(統理)하였다.

   그리고 치사한 뒤에도 중대사의 경우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처럼 그는 왕을 보좌해 세종성세를 이룩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를 통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다.

1452년(문종 2),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리고 1455년(세조1) ,아들 수신(守身)이 좌익공신에 책록되면서 순충보조공신 남원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상주의 옥동서원과 장수의 창계서원에 제향되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방촌집'이 있으며,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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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孝寧大君)        작성일자; 2007.03.18.목요일,맑음

 

효령대군

생졸;, 1396.01.06(음력1395.12.11)~1486.06.12(음력05.11)

이름; 초명은 호(祜)였는데 19세에 보(補)로 개명

호; 연강(蓮江)

가계도;

아버지; 태종의 둘째 아들

모; 원경왕후 민씨의 소생

세종대왕의 둘째 형 세조의 형이자 세조의 백부로 실의 원로였으며,

조선의 숭유 억불 정책으로부터 불교를 옹호,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세종대왕 즉위 후에도 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 등 6대에 걸쳐서 장수를 누렸다.

임사홍은 그의 손녀 사위였고, 이량은 그의 5대손이며, 명종의 부인인 인순왕후와 심의겸,심충겸은 그의 외6대손이다.

 

1405년, 그는 10세 시절이던효령군에 책봉되었으며 

1407년, 12세에 해주 정씨 부인(정역의 딸)과를 가례를 치렀고 

1412년,17세에 효령대군에 진책되었다.

1417년, 자신의 아호이기도 한 연강(蓮江)이라는 법명으로 수계를 받았다.

 

그는 어릴적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30세 전에 이미 학문과 덕성을 이룩하였고 붓글씨에도 능해 명필이었다고 전해진다.

활쏘기에 능숙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왕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는 일찍부터 좌찬성 정역(鄭易)의 딸과 혼인하여 6남 1녀를 낳았으며, 서자녀로 1남 1녀를 두었다.

불교를 좋아하여 승도를 모아 불경을 강의하였다.

불교를 심오하게 믿어 조정의 숭유억불 정책하에서 불교 보호의 방패 역할을 감당하였다.

원각사 창건 때에는 조성도감 도제조를 맡았다.

이 때 주조되어 1985년까지 보신각에 달려 있던 큰종과 탑골공원의 10층 석탑은

그 제조기법이나 예술성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10층 석탑은 국보 제2호로, 원각사지 대종은 보물 제2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법화경','금강경,'원각경','반야심경','능엄경','선종영가집' 등 불경의 번역과 교정에도 힘썼고,

많은 사찰을 순회하면서 신도들을 온후하게 계도하였다.

그리고 향촌의 자치규약인 향헌 56조를 지어 백성들의 윤리 도덕심을 함양하였으며 ,

유불심법동일원(儒佛心法同一原)의 이념을 추구하였다.

 

1395년,음력12월1일에 태어나 91세의 천수를 다하고

1486년(성종 17, 丙午年)음력5월11일에 세상을 떠났다.

현재의 서울시 방배동에 예장되었다.

 

묘소는 1972년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현 사당은 1786년(영조 12)에 왕명으로 효령대군 묘 앞에 처음 세우면서 '청권사'라고 하였다.

슬하에 7남을 두었으며

1459년(세조 4) 정월, 여섯째 아들 원천군을 병사한 아우 성녕대군에게 출계시켜 대를 이어 제사를 봉향할 수

있도록 하였다.

생전에 손자 33인, 증손자 109인으로 후손이 번성하였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파종회 중에 자손이 가장 번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 특별시는 1984년11월7일 청권사 앞길을 '효령로'로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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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             작성일자; 2008.03.18.화요일,맑음

 

생졸, 1394년~1462.9.7

휘; 제(禔) 세종,효령대군,성녕대군  친형 

가계도;

아버지; 태종의 장자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  

처; 김한로의 딸인 수성군부인 김씨

자; 수성군부인 김씨 소생 3남 5녀를 두었으며, 첩에게서 7남 12녀를 낳았다.

 

1394년 정안군과 군부인 민씨(뒤의 원경왕후)의 장남으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402년(태종 2년) 3월 8일 제(禔)란 이름을 받았고 4월18일에 원자(元子)로 책봉되었다.

 

어려서 학자인 계성군 이래(李來)의 문하에서 효령대군,충녕대군 등과 함께 수학하였으나

수업은 뒷전이고 참새나 바깥 풍경을 보며 다른 생각을 하였다 한다.

 

1404년(태종 4년) 왕세자에 책봉되고

1406년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왔다

1407(태종 7년) 입조하라는 명나라 성조(成祖) 영락제의  명을 받고

1407년9월25일,하진표사(賀進表使)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다.

   완산부원군 이천우,단산부원군 이무,계성군 이래,제학 맹사성,총재 이현,서장관 집의 허주 등 백여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중국에 다녀왔다.

   영락제는 그에게 특별히 시를 지어서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1409년 부터 부왕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와 강무시솔행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부왕 태종과 마찰을 빚다가 유정현 등의 상소로 폐위되었다.

   그 뒤 셋째 아들 충녕대군이 왕세자가 되었다.

   세자 폐위 이후에도 자유분방한 활동이 문제시 되어 여러 번 탄핵을 당하였으나

   세종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을 받은 적은 없었다.

 

평소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으나 작품들은 대부분 인멸되거나 실전되었다.

일설에는 왕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은 그의 본심이었다는 설과 본심이 아니었다는 설이 양립하고 있다.

 

1407년(태종 7년) 14세에 김한로 딸과 혼인하였다.

   김한로는 권세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사위인 그가 폐위된 것을 전후하여 한때 유배당하기도 했다.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사망하고 태종은 외척 제거 목적으로 민무구 형제의 옥사를 계획한다.

   양녕은 이들 두 외삼촌이 억울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도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을까 겁을 먹고 외숙인 민무구

   형제가 태종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도 외면하였다.

1409년 부터 부왕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와 강무시솔행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410년 민무구,민무질의 옥사가 발생했다.

   이 일로 원경왕후는 병석에 누웠고, 친정에서 동생 민무휼과 민무회가 문병 차 대궐을 출입했다.

   이때 민무휼과 민무회 형제가 양녕대군을 찾아가 두 형의 억울함을 하소연을 했다.

   양녕대군은 어릴 때 외가에서 자라난 터라 이들과 가까이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양녕은 두 외삼촌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했다.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품성이 잘못되었다며 도리어

   외가를 비난했다.

양녕이 세자로 책봉된 뒤 대군 시절 스승이던 계성군 이래가 빈객 겸 세자의 스승으로 결정되어 왕자들을 가르쳤다.

이래는 고려말 신돈에게 저항하던 선비인 이존오의 아들로서, 그 아버지를 닮아 그만큼 강직한 선비였다.

양녕대군이 한참 거짓 미치광이 노릇을 궁리할 때 별감으로부터 계성군의 출입을 보고 받자 일부러 방석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서,개 짖는 시늉을 하였다.

이래는 들어서자 이 괴상한 세자의 행동에 놀라 제지하고 양녕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양녕은 개의 소리를 짖어대며, 마치 물어뜯을 것처럼 뛰어다니다가 이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기도 했다.

이래가 다시 양녕의 어깨를 잡아 흔들자, 비로소 양녕은 처음 맞이하는 것처럼 대하였다.

이래는 밤 동안에 무척 초췌해 보이는 세자의 안색을 보고 개처럼 짖는 소리를 병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양녕은 부인하였고 이래는 이후 태종에게 그 날에 있었던 일을 보고하였다.

그 뒤로도 이래는 세자의 언행을 낱낱이 임금 태종에게 아뢰었다.

세자는 이래 등 사부들이 와도 글을 배우려 하지 않고 다른 짓을 하였다.

동궁의 뜰 앞에 새덫을 해 놓고는 글을 배우다가도 새가 치이기만 하면 쏜살같이 달려나가곤 하였다.

또한 조정의 하례 때에는 머리가 아프니 배탈이 났느니 하고는,

동궁에서 혼자 새덫을 놓고 참새사냥을 즐기거나 드러누워 뒹굴면서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는 품행이 자유분방하고 색을 밝혀 잦은 문제를 일으켰다.

유교적 교육과 엄격한 궁중생활, 특히 왕세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법도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부왕인 태종은 물론 엄격한 규범적 생활을 강조하는 유학자들의 우려 대상이 되었고,

부왕은 세자로서 모범을 보이도록 타이르고 심지어 벌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가 궁으로 데려온 한 기생 출신 첩의 존재를 알게 되자 태종은 그 기녀를 사형에 처했다.

양녕대군은 부왕 태종 역시 여러 여인을 첩으로 거느리는 것을 언급하며 항의하다가 끌려나가기도 했다.

이후에도 양녕의 품행은 자제되지 않았고 이에 유정현 등이 상소를 하여, 세자에서 폐위시킬 것을 상주하였다.

이때 유일하게 그의 세자 폐위를 반대한 것은 이조판서 황희 등 소수였다.

 

1418년 그는 세자에서 폐위되고 양녕대군에 봉해졌으며 그 대신에 아우인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태종은 수차례에 걸쳐 여색을 금하고 인군으로서의 자질과 덕망을 쌓으라 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부왕 태종이 여색을 밝히고 후궁을 들이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가 들인 후궁을 태종이 내침으로서 부왕 태종과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1417년,태종이 아무도 모르게 보관하라고 준 왕친록(王親錄)을 열어 봤다가 발각,

   이것이 소문으로 퍼지면서 부왕 불신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

   또한 전중추 곽선(郭旋)의 첩을 취한 사실도 밝혀졌다.

 

당시 조선에서 붓을 잘 만든다고 소문이 난 김호생이란 이가 있었다.

그는 사족 출신으로 붓을 만들었는데 호기심에 양녕은 김호생을 찾아가 그가 붓을 만드는 것을 보았고,

몰래 대궐에 들어와 세자에게 붓을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비밀리에 출입하던 중 내시에게 발각되어 도주하다 붙잡혀 어전에서 태종에게 심문을 받았다.

태종은 양녕이 몰래 시중의 잡것들을 불러들여 장난을 치는 등 체통없는 짓을 한다 하여 잡는 대로

혹 귀양 보내기도 하고 혹 죽이기도 했다는데, 김호생에게 붓을 만들게 한 뒤 그의 재능을 본 뒤 오히려 기특히 여기고

그에게 특별이 공조(工曹)로 보내 필장(筆匠)직을 내렸다.

어느날 밤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의 대화를 비밀리에 엿듣던 중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의 재질이 뛰어나나 셋째 아들이라 아쉽다고 대화하는 내용을 엿듣게 되었다.

원경왕후 역시 태종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부왕과 모후의 뜻이 양녕대군에게서 떠나 있다는 것을 간파한 효령대군은 열심히 공부하였다.

하루는 양녕대군이 술을 잔뜩 마시고 효령대군을 찾아갔다.

그는 효령에게 '공부해야 소용이 없다' 고 말했다. 부왕의 뜻이 충녕대군에게 있으니 다른 마음을 먹지 말라고

하였다는 야사가 전해 온다.

이에 크게 낙심한 효령대군은 매일 북을 치는데,

여느 스님과 달리 팔에 힘이 들어가 북 가죽이 늘어질 정도로 세게 쳤다.

그래서 속담에 늙은이의 늘어진 뱃가죽을 효령 북이라 부르기도 한다. 결국 충격을 견디지 못한 효령대군은

모든 공부를 중단하고 출가, 합천 해인사로 들어갔다.

1418년(태종 18년),유정현 등이 세자 양녕을 탄핵하였다.

   이때 이미 사람들에게 신망을 잃은 양녕을 비호한 이는 황희 등 소수였다.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될 것을 예상하자 그의 동생 효령대군은 독서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생을 찾아가 세자 자리는 충녕에게 넘길것 같으니 헛된 꿈을 꾸지 말라고 충고하였다는 야사가 있다.

   부왕 태종이나 모후 원경왕후의 뜻이 모두 충녕에게 있음을 안 효령대군은 이후 불교에 전념하게 된다.

   김시양(金時讓)은 저서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양녕대군의 폐세자 원인에 세가지 추론을 하였다.

 첫 번째로는,

     양녕과 아버지 태종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양녕대군이 세자로 있을 때

     태종의 뜻이 세종(충녕대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척하고 자리를 사양하니 태종이 곧 폐하여

     세종을 세웠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양녕대군과 동생 충녕대군의 관계에 대해서,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폐위된 뒤 한성에서 외지로 쫓겨나 경기도 이천군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세종대왕이 몰래 양녕대군을 불러 위로했다고 한다.

 

그가 부왕의 뜻이 충녕대군에게 있음을 알게 된 것이 세자 책봉 직후라는 설과

세자 책봉 후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부왕의 침전으로 문안차 들어가던 중 그는 문 밖에서 부왕 태종과 모후 민씨의 대화를 비밀리에 엿듣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부왕 태종은 '충녕과 양녕이 바뀌어 태어났더라면,

장차 백성들이 요순의 다스림을 받아 태평성대에서 살게 될 것'이라며 한탄하였고

모후 민씨 역시 '충녕이 맏이었어야 할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조선실록에서는 이와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세자(양녕대군)의 계속된 비행으로 아버지 태종이 몇번 질책하자,

불만을 품고 태종에게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아버지(태종)은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시면서 왜 저만 못하게 하시느냐”하는 상소를 올려 태종을 비난했다.

이에 분노한 태종은 세자를 폐하여 천군으로 귀양보내고 동생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해 5월 결국 세자에서 폐위되고 만다.

다른 전승에 의하면

지난 날 부왕 태종과 방석, 방번, 그리고 방간 등 숙부들과의 골육상쟁을 떠올리며

최종적으로 충녕에게 양보하기로 결심했다는 전승도 전한다.

이후 출궁을 청하는 상소가 거듭되어 태종은 하는 수 없이 출궁을 명하였고, 경기도 광주의 사저로 내려갔다.

떠나는 양녕대군에게 여자 종 13인과 남자 종 10여 인을 데리고 가게 하였다.

또한 특별히 배려하여 그가 평소에 아끼고 사랑하였던 여인도 데려가게 하였고,

그 외에 일상 쓰던 여러 가지 가재도구도 다 가지고 가게 하였다.

그런데 다만 매와 활은 두고 가게 하였다고 한다.

태종은 모든 것을 양녕 대군이 살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도록 명령하였다.

대궐을 떠나던 날 양녕대군은 광나루 포구에서 "앞으로는 이 땅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겠구나!" 하며 한탄하고

눈물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광주의 사저로 나온 양녕대군에게 책이라고는 다만 논어와 대학 이외의 책은 금지시켰다.

그 뒤 그는 팔도 각지를 유랑하며 사대부, 풍류객, 기녀들과 사귀면서 일생을 마쳤다.

1418년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동생 세종대왕은 이천군에 유배된 형 양녕대군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동생의 즉위 이후에도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세종의 즉위 뒤에도 여러 번 비행을 저질렀는데,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의 사후 비행의 강도가 더해졌다.

과거의 왕세자였고 현재 왕이 동생이라는 점 때문에, 일거일동이 세밀한 관찰과 감시의 대상이 되어 번번이 그것도

수십 차례에 걸쳐 언관들로부터 탄핵되었다.

특히 자신의 며느리까지 범하는등 인간 이하의 행위까지 서슴치 않았고 이에 충격을 받아 아들이 목을 매 자결할 정도였다.

이러한 그의 비행에 대해 신하들은 여러 번 탄핵하였으나 세종은 그를 배려해 벌하지 않았다.

그러다가,1453년에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수양대군의 편을 들어 그를 독려했고,

심지어는 안평대군을 사사시키라고 간청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계유정난이 끝나자 단종을 죽이라고 간청까지 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동생 세종에 대한 보복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이에 대한 이유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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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 제3대  태종

 

이방원(芳遠)

생졸; 1335.10.11(고려 충숙왕)~ 1408.5.24(조선 태종) (74세)

재위기간; 1400년~1418년(18년)

능;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릉(獻陵)

 

가계도;

부;태조 이성계

모; 신의왕후 한씨

왕후; 원경왕후 민씨(민제(閔齊)의 딸)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이도 제4대 세종대왕

   성령대군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정선공주

효빈 김씨; 경년군

신빈 신씨;함녕군,온녕군,군녕군,정신옹주,정정옹주,숙정옹주,소신옹주,숙영옹주,숙경옹주,숙근옹주(10명)

선빈 안씨;의녕군,조숙옹주,경신옹주

의빈 권씨; 정혜옹주

명빈 김씨;

소빈 노씨; 숙회옹주

숙의 최씨; 희령군

덕수옹주 이씨; 후령군,숙순옹주

후궁 고씨; 혜령군

후궁 김씨; 숙안옹주

 

태조 이성계의 아들들이 무인으로 성장했지만 이방원은 무예나 격구보다는 학문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1383년(우왕 9)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388년(창왕 즉위) 이색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2년(공양왕 4) 3월 이성계의 낙마 사건을 계기로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고려의 중신들은 이성계파의

    인물들을 유배시키고,그간의 개혁 법령을 폐지하는 등 반격을 시도했다.

    이때 수하를 동원하여 정몽주를 살해함으로써 대세를 만회했으며,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는 데에도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정도전,조준 일파의 견제로 조선 건국 후 개국공신에도 들지 못했다.

    정도전과 조준은 신진 사류 중에서도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한 인물로 이들의 정책은 이전의 권문세가나

    이색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의 불만을 야기했다.

    이러한 때에 강비 소생의 어린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고,

    자신의 세력기반인 사병마저 혁파될 상황에 처하자,

    정변을 일으켜 정도전,남은 등을 제거하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방원은 이 후 정종을 즉위 시키고 정사공신 1등이 되었으며 개국공신에도 추록되었다.

 

1400년(정종 2),방간이 주동이 된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1월에 정종이 양위의 형식으로 물러나자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정종대와 즉위 초반에는 구세력과 공신, 온건개혁파를 등용하고,안렴사제 복구 등 복고적인 정책을 집행하기도 했으나,

곧이어 하륜과 함께 이색 계열의 인물을 중용하여 계속 개혁을 추진했다.

태종의 치세에 국가 체제 전반에 걸쳐 남아 있던 고려의 유제들은 대부분 새로운 체제로 대체되었다.

중앙 행정기구의 개혁에 착수하여 1401년(태종 1) 문하부를 철폐하고,사평부,승추부,3사(三司),상서사와

같은 별도의 재정·인사 기구를 폐지하거나 축소하였고,

인사는 이조와 병조,재정은 호조,군정은 병조로 귀속시키는 등

서무를 의정부와 그 아래의 6조로 통합했으며,

속아문 제도를 실시하여 각종 관아를 모두 6조 휘하에 소속시켰다.

또,재상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6조직계제를 시행하고 사간원을 독립시켰다.

관리의 인사 제도는 태조대에 이어 계속 정비했으며,

특히,서리출신의 관리 등용을 더욱 억제했다.

지방 제도 정비에서는 군현 통폐합과 특수 촌락,임내의 혁파를 계속하고,

경기 좌우도를 통합하여 경기도로 했으며,양계 지역의 장관도 도순문사에서 도관찰사로 바꾸어 도의 장관을 통일시켰다.

또한 행정체제의 혼돈을 방지하기 위해 지명에 붙은 주(州)자를 모두 유사한 글자로 바꾸었으며,

감무도 현감으로 바꾸어 수령의 명칭에 일관성을 기하는 한편 수령의 임무와 고과규정을 정비했다.

태종은 군사 제도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 사병을 완전히 혁파하고 군정 체제를 정비하여 왕을 발령자로 하고

병조를 군정 기관으로 하는 조선 군제의 전통을 수립했다.

지방군도 강화하여 전국의 영진군과 수성군을 정비했으며, 수군을 증설하고 죽은 자에 대한 복호,완휼규정을 마련했다.

병선 건조와 개조에도 힘을 기울여 거북선을 만들어 실험하기도 했다.

또 양천불명자를 사재감의 수군으로 소속시키고 나중에 이들을 보충군으로 재편했으며,

양반,유생,노비 등을 망라하는 잡색군을 조직하여 총동원체제를 이루었다.

이렇게 정비된 군제를 바탕으로 1418년에는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대마도)원정을 단행했다.

1405년부터 전국의 토지를 다시 양전(量田)하여 토지를 확보했다.

또 사전에 대한 국가의 지배를 강화하여 공신전에도 1/10의 세를 내게 했으며,

공신전의 전수를 제한하고 수신전,휼양전의 액수를 감했다.

그밖에 사전의 하삼도 이급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전을 군자전으로 이속시켜 사전액수의 감소를 꾀했다.

한편,재정절감을 위해 불필요한 관원을 도태시키고 검교직을 폐지했으며 저화 통용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여러 가지 진흥책을 시행했다.

서울의 시전제도도 정비하고 상공세,공랑세 등 세제를 마련했다.

또한 곡식의 보존을 위해 전국의 창고 제도와 보관 규정을 마련하고,

조운(漕運)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한때 육운을 장려하기도 했다.

 사회정책으로는 호적과 군적을 정비하고 호패법과 인보법을 제정했으며 양천불명자,양천교혼 소생 등을 보충군으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적서의 구분은 더욱 엄격히 하여 서열 차대와 한품 서용 규정을 마련했다.

노비 문제는 태종조에 가장 심각한 사회 문제였다.

태종은 한때 1인당 소유 노비수를 제한하는 시책까지 고려했으나 이는 시행하지 못하고,

1413년에 노비중분법을 시행하여 오랜 노비 소송을 종결시켰다.

한편 유교적 사회 질서의 정착을 위해 '가례'를 보급하고,

군현의 음사(淫祀) 등 비유교적 풍습을 이사(里社)로 대체했으며 문묘를 중건하고 '홍무예제'를 준용하여

예제와 조관복제를 정비했다.

반면 억불책을 강화하여 1406년 사원 혁파를 단행하고 이로써 얻어진 노비와 전토를 국고에 환속시켰다.

1417년에는 서운관에 소장된 각종 비기도 참서를 소각했다.

교육·문화 방면에서는 우선 권근을 책임자로 임명하여 성균관과 5부학당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세자도 성균관에 입학하게 함으로써 성균관의 위상을 높였다.

또한 과거 고강법을 사장을 중시하는 제술로 바꾸고,

고려 이래 폐단이던 좌주문생제를 혁파했다.

1403년 주자소를 설치하여 계미자를 주조했으며

1413년 즉위 이후의 개혁사업을 총괄하여 '경제육전,을 재편찬,원집상절과 속집상절 2권을 완성했다.

1414년에는 정도전이 편찬한 '고려사'를 하륜을 시켜 개찬하게 했으며,

    권근,하륜에게 '삼국사를 편찬하게 했다.

 

태종은 통찰력이 뛰어나고 예리한 인물이었다.

정사를 의논할 때 대신들이 형식적인 답변을 하거나

다른 뜻을 품은 우회적인 발언을 하면 바로 정곡을 찔러 무안을 주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탁월한 것은 정치력과 결단력이었다.

그는 여러 정치 세력과 신하들의 입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활용했다.

문제를 판단하는 데는 명분이나 인연,과거의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적으로 생각하며

신속하게 결단을 내리는 능력이 있었다.

태조의 배향 공신을 책정할 때 그때까지 역적으로 규정되어 있던 정도전과 남은을 선발하게 했으며,

자신에게 항거한 죄로 유배시켰던 황희를 세종에게 추천하여 중용하게 했다.

또한 장인 민제의 가문이 외척으로 성장하면서 이들이 양녕대군을 지지하고

그 주위에 수구파가 결집하자 장인과 처남들을 과감하게 제거했으며,

세종에게 양위한 후에도 세종의 장인 심온을 병권 남용의 죄를 들어 전격적으로 처형했다.

1418년 왕세자 제()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2개월 후 선위했다.

그러나 선위한 후에도 군정과 중요한 정사는 직접 처리하면서 세종의 치세를 위한 토대를 닦았다.

세종대의 흥륭도 실은 태종의 업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묘호는 태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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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2대왕 정종의 묘 후릉(厚陵)        작성일자; 2008.10.26.수요일,맑음

 

 

 

후릉(厚陵)은 조선의 제2대 왕 정종(定宗 1357~1419)과 정종의 비() 정안왕후(1355~1412)

쌍릉으로 태종 12년인 1412년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 1357~1423)의 감독 하에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고려 공민왕릉을 모방하여 만든 능으로 태종과 원경왕후 능인 헌능과 아주 유사하다고 한다

 

조선의 왕릉 중에는 태조의 비인 신의왕후의 제릉과 더불어 북한에 있에 ,

안타깝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지 못했다.

조선 왕릉 가운데 최초로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난간석으로 연결한 쌍릉의 형식을 취한 능이다.

태종 12년인 1412625일 정안왕후가 58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이곳에 안장되었으나 능호는 없었는데

그로부터, 7년 뒤 정종이 승하하자 묻히기 한달 전에 비로서 능호를 후릉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이후 후릉은 개성부에서 관리나 수리를 맡았으며 개경에 있는 흥교사를 원찰로 삼고 땅을 하사하고

능을 보호하도록 지시를 하였다고 하는데 ,

의궤에 의하면,

흥교사는 현종 때까지 있었으나 후릉지에 원찰이 백룡사로 바뀐 것으로 보면 조선후기나 구한말 흥교사가 없어진 듯하다는

견해이다.

 

정종(1357년-1419,재위:1398년-1400)은 조선의 제2대 임금으로 방과(芳果).

재위하는 동안 아우인 4대 왕인 태종(이방원)이 왕세제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선양한 뒤에는 아우 태종이 인문공예 상왕으로 호를 올렸고,

사후 조선 중후기까지 시호인 공정대왕으로 불리다가 숙종 때 정식으로 묘호와 시호를 올려 정종이다.

태조 6년인(1398,42),음력 8월에 동생 방원이 32세 나이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본래 왕위에

뜻이 없었던 영안대군은 왕세자가 되기를 극구 사양하였으나,태조의 장자 방우가 이미 사망하였기 때문에 왕세자에

올랐다가 1개월 뒤인 1398년 음력 9월에 태조의 양위로 조선 제2대 국왕으로 등극하였다.

정종은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전정터를 누빈 군인 출신으로 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에도 열정적

이었으며 또한 직접적으로 방원이 왕위에 오를 것을 추천하는 등 왕위에 관한 관심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정안왕후 김씨는 정종의 비다.

월성 부원군 김천서의 딸로 본관은 경주이다.

조선 최초의 세자빈,정비,왕비,왕대비이기도 하다.

1398년 남편 방과가 세자가 되자 조선 최초로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며,

같은 해 방과가 왕위에 등극하면서 조선 최초의 왕비가 되었고 ,

2년 뒤인 1400년에 남편 정종이 세제로 있던 동생 방원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자 조선 최초의 왕대비가 되었으니

순덕 왕대비라는 존호를 받았다.

141258세로 사망하였으며 후에 남편 정종도 이곳에 묻혀 쌍릉으로 조성되었다. 

후릉은 조선 제2대 왕인 정종과 정안왕후가 안장된 쌍릉으로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 백마산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왕 제2대 정종  이야기        작성일자; 2008.01.16.수요일,맑음

 

 

제2대 정종(방과;芳果);

    정종은 1357년(고려 공민왕 6년)에 함흥 사저 시절에 태조 이성계와 첫째 부인 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377년(고려 우왕 3년)에 아버지를 도와 왜구 토벌에 나섰으며,

    1389년(고려 창왕 1년)에는 절제사 유만수와 함께 해주에 침입한 왜적을 방어했다.

    1390년(고려 공양왕 2년)에도 지밀직사사 윤사덕과 함께 양광도에 침입한 왜적을 영주 도고산 아래에서 격파하는 등

       전공을 많이 세웠다.

      특히 아버지 이성계가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적극 가담해 그 공로로 공신에 책록되기도 했다.

      또한 장남 방우가 역성혁명에 반대해 아버지와 척을 진 이후로는 실질적인 장남 역할을 했다.

 

     이성계는 조선 개국 후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소생의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정종은 정도전 등의 견제를 받아 다섯째 아들인 방원과 함께 개국공신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이것이 원인이 되어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이후 방원의 비호로 세자에 책봉된 후 왕위에 올랐다.

     정종은 김천서의 딸인 정안왕후와 7명의 후궁을 두었다.

     정비인 정안왕후와의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고 후궁들로부터 15명의 아들과 8명의 딸을 얻었다.

     이 밖에 정식 후궁이 아닌 애첩들로부터 2명의 아들을 더 낳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졸; 1657년(공민왕6년)~1419년(세종1년) (63세)

재위기간; 1398.9~1400.11(2년 2개월)

능; 능은 풍덕에 있는 후릉(厚陵)이며 살았어도 죽어서도 후대 260 여년간 조선의 군주로써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묘호가 없는 왕으로 종묘에 봉안되어 있다.

가계도;

   부; 태조 이성계

   모;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

    왕후; 정안왕후(定安王后) 김씨

    성빈 지씨; 덕천군,도평군

    숙의 지씨; 의평군,선성군,임성군,함양옹주

    숙의 기씨;순평군,금평군

    숙의 문씨;종의군

    숙의 윤씨; 수도군,임언군,석보군,장천군,인천옹주

    숙의 이씨; 진남군

    가의궁주 유씨;불노

    시비 기씨; 지은군

    신원미상; 덕천옹주,고성옹주,전산옹주,함안옹주

 

소개;

1377년(우왕 3)에 아버지 이성계를 따라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했고,

1389년(창왕 1) 절제사 유만수 밑에서 해주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으며 조선이 개국되자 영안군에 봉해지고,

    

태조 이성계는 젊고 총명하며 친정이 권문세가며 태조에게 힘이 되어 준 둘째 부인 강씨를 총애하였으며 많은 부분을

의존했으며 태조의 집권 거사에 직접 참여하여 막후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392년7월,

   태조가 조선을 개국하고 한 달 뒤에 소년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을 때 장남 방우의 나이는 39세였고,

   방석의 세자 책봉에 대해 가장 불만이 많았던 정안대군 이방원의 나이는 26세였다.

   태조 이성계와 강비,정도전의 이방원에 대한 지나친 경계와 냉대 등 이것이 화근이 되어 조선왕조는 개국 초장부터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감내해야 했다.

   그간 꾸준히 병권 집중 운동을 벌여오던 정도전 일파는 이른바 진법 훈련 강화를 내세우며 왕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방원은 이방의와 이방간 등 형제들과 함께 도전 일파를 살해하기로 결정하고 정도전 일파의 밀모설을 만든다.

   즉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밀모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속이고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후 일거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398년8월25일,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 왕자들이 이것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남은,심효생 등 반대파 세력을 불의에 습격하여 살해하고 세자 방석을 폐위하여 귀양보내고

   후일 방번과 함께 죽인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1398년(태조7년),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동생인 이방원의 영향력 아래에서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1399년(정종1년) 3월에 개경으로 천도했고 집현전을 설치했다.

   

이방원은 정도전 제거했지만 자신이 권력을 잡자 세력 강화를 위해서 왕족들의 사병을 혁파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훗날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왕자의 난'으로 방석과 방번 형제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는

그 다음달인 1398년 9월,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났고  방과는 동생 방원의  뜻에 따라 조선 제2대 왕으로 등극했다.

 

태조가 물러난 것은 자의 보다는 타의에 의한 면이 짙다.

이미 조정은 방원의 세력이 포진해 있었고 태조는 와병중 이어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이방원의  양보로 즉위한 정종이 비록 왕좌에 있긴 했으나 정종때의 정치는 거의 정안대군 이방원의 뜻에 따라 진행되었다.

정종은 재위시에 정무보다는 격구 등의 오락에 탐닉했는데 이런 보신책 덕분에 정종은 방원과의 우애를 유지할 수 있었다.

 

1400년2월 ,

   제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하여 아우 이방원을 세제로 책봉한 뒤 사병을 혁파하고 병권을 의흥삼군부에 집중시켰다.

   또한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치면서 군,정 분리 체제를 이룩했다.

1400년11월,

   세제 이방원에게 선위한 뒤 상왕으로 인덕궁에 거주하면서 격구·사냥·연희를 즐기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

   상왕으로 물러나는 것은 그와 그의 정비 정안왕후의 목숨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왕위에서 물러난 19년 후인 1419년(세종1년)에  63세로 생애를 마쳤다.

 

      

 

이성계의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               작성일자; 2007.10.07.토요일,맑음

 

신의왕후 한씨;이성계의 첫째 부인

생졸; 1337~1391(55세)

본관; 안변(安邊)

아버지;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

어머니; 평산 신씨

능; 황해도 개풍군 대련리에 위치한 제릉(齊陵) 

고려말 동북 지방에서 밀직사부사증영문하부사(왕명의 출납과 궁궐의 경호 및 군사 기밀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였던 아버지 한경과 평산 신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1337년 출생하였다.

안변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풍류산(청학산)이 위치하고 있던 지역에서 태어났다.

한씨 나이 15세때 당시 신분이 비슷한 17세의 이성계와 가례를 올리고 함흥 운전리에 살았으며

이때 방우, 방과(정종),방의,방간,방원(태종),방연과 경신,경선의 6남 2녀를 낳았다.

고려말 우왕 14년인 1388년 요동 일대와 철령 이북땅을 정벌하기 위해 동원된 10만 대군을 이끌고 우군도통사로 원정에

참여하게 된 이성계는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우왕과 최영(우왕의 장인)의 무리한 행군 어명으로 10만 대군이 몰살 당할

뻔하는 위기에 처하자 위화도에서 5월 회군하였다.

이때 이성계의 5남 방원은 포천 재벽동에 살던 어머니와 철현에 살던 둘째 부인 강씨를 동북면으로 피난시키던 중 조정에서

이성계의 가족을 체포하려 한다는 전갈을 듣고 숲속으로 피신하여 한동안 노숙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한씨는 위장병이 악화되어 조선 개국 1년 전인 1391년 55세에 사망하였다.


한씨는 처음에는 해풍군 치속촌에 묻혔다가 1392년 7월 17일 조선 개국 다음날 절비로 추존되고

능호를 제릉(齊陵)이라 칭하였다.

이후 개풍군 상도면 풍천리에 봉릉하였다.

1398년11월, 한씨 소생 2남 방과 정종에 의해 신의태왕후로 추존되었고

1408년(태종8)에는 태종에 의해 승인순성(承仁順聖) 신의왕태후로 시호를 높였으나

1683년 숙종9년에 신의왕후(神懿王后)로 다시 격하되었으나,

1899년(광무3년) 12.09  고종에 의하여 황후로 격상되어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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