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지(鄭麟趾)               작성일자; 2010.04.13.화요일,맑음

 

생졸;1396.12.28-1478.11.26 조선 초기의 문신·성리학자,한글학자, 역사가, 정치인

본관; 하동

호; 학역재(學易齋)이다.

시호는 문성(文成)

 

정인지는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고려사,고려사절요 등을 정리, 편찬하였고

용비어천가의 작곡자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포은 정몽주의 학통을 사사하고,

1414(태종 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 대제학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1424년 집현전관(集賢殿官)에 선발된 뒤 집현전에서 근무하며 훈민정음 연구에 참여하였고

1448년 이조판서가 되어 삼남 지방에 토지 등급을 정했다.

1452년부터 1454년까지 《세종실록》의 편찬과 감수를 맡았으며,

세조를 지지하여 계유정난,세조반정 등에 적극 동조하였다.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주도한 계유정난에 협력한 공로로 특별승진하여 좌의정에 발탁되고,

정난공신 1등에 책록 되면서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군되었다.

1455년(세조 1) 영의정 부사에 승진하고 세조반정을 지지한 공로로 좌익공신左翼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38년 예종때  한명회,신숙주 등과 함께 남이 .강순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3등관이 되고,

  예종 사후 원상으로 서정을 주관하다 의경세자의 차남 자을산군을 지지한 공로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그의 장남 정현조는 세조의 사위였고,

손자 정승충은 세조의 서자  덕원군의 사위가 되어 이중으로 사돈 관계를  형성하였다.

  증손녀 하동 부대 부인은 선조의 생모가 된다. 또한  중종의 후궁 희빈 홍씨의 외증조부가 되기도 하다.

  권우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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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과 혼천의      작성일자; 2010.04.12.월요일,맑음

 

세종 14년부터 시작된 대규모의 천문의상(天文儀象)의 제작사업과 함께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높이 약 6.3m, 세로 약 9.1m, 가로 약 6.6m의 석축간의대가 세종 16년에 준공되었다.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渾天儀)·혼상(渾象)·규표(圭表)와 방위(方位) 지정표(指定表)인 정방안(正方案) 등이 설치되었다.

세종 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의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하였다.

이러한 간의대와 그 중요한 시설물들은 중국과 이슬람의 영향과 전통적인 요소들이 함께 들어 있었다.

혼천의는 천체관측기계로서 문헌상으로는 세종 15년 6월에 만들어진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 또 하나가 만들어졌는데,

정초(鄭招)·정인지(鄭麟趾) 등에게 고전(古典)을 조사하게 하는

한편,장영실(蔣英實) 등 기술자들에게 실제 제작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 혼천의는 천구의(天球儀)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해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되어 천체의 운행과 맞게

돌아가도록 되어서 일종의 천문시계의 성격도 가졌다.

또한,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와 물시계도 제작되었다.

해시계로는 앙부일구(仰釜日晷)·현주일구(懸珠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 등이 있다.

그리고 물시계로는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가 있다.

앙부일구는 우매한 백성들을 위해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남쪽의 거리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였다.

또한,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휴대용 시계였으며,

정남일구는 매우 정밀한 해시계로 이것으로 관측하면 자연히 남쪽이 정해지면서 시각을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시계는 갠 날과 낮에만 쓸 수 있는 것이므로, 공적인 표준시계로는 물시계가 더 유용했는데 자격루가 그것이다.

자동시보장치가 붙은 물시계인 자격루는 세종이 크게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장영실을 특별히 등용해 이의 제작에 전념하게 해 세종 16년에 완성하였다.

그것은 경복궁 남쪽의 보루각(報漏閣)에 설치되어 조선시대의 표준시계로 이용하였다.

세종 20년에는 장영실에 의해 또 다른 자동물시계이며 천상시계인 옥루가 완성되었다.

세종은 천문·역서의 정리와 편찬에도 큰 관심을 가져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등이 편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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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과 훈민정음    작성일자; 2010.04.12.월요일,맑음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이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유산임에 분명하다.

세종은 집현전을 통해 길러 낸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이선로(李善老)·이개(李塏) 등

소장 학자들의 협력을 받아 우리 민족의 문자를 창제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이 시대의 문화 의식과 수준이 어떠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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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왕후 민씨         작성일자 ;2010.01.12.화요일,맑음

 

생졸; 1365(공민왕14)~1420(세종2년)

본관은 여흥.

원경왕후 민씨는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이다.

1382년(우왕 8),이방원에게 출가하였으며,1392년(태조 1년)에 정녕옹주에 봉해졌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 때 남편 이방원을 도왔다.

1400년(정종 2) 2월에 이방원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세자빈이 되어 정빈(貞嬪)에 봉해졌다.

  이 해 11월에 이방원이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1398년8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 등이 주살될 때 미리 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때마침 태조가 몸이 불편해 여러 왕자와 숙직하고 있던 이방원을 몰래 불러내어 주의를 환기시켰다.

  10여 일 전에 여러 왕자가 거느린 시위군를 혁파하고 영중의 군기를 모두 불태울 때 무기를 몰래 숨겨 두었다.

  일이 발생하던 그 날 이방원의 군사에게 내어주며 선수를 쓰도록 하였다.

 

그러나 태종 초부터 궁녀의 상종 문제로 태종과 불화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태종과의 불화는 성품의 문제로 인한 갈등에 그치지 않았다.

1407년(태종7년) 7월에 발발한 민무구 형제의 옥사를 계기로 더욱 심각해졌다.

  민무구 형제는 이미 1402년(태종 2)에 왕이 창종으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시녀를 끼고 왕의 병세를 염탐하며

  은근히 집권 기회를 노렸다는 의심을 받았다.

  정비가 이에 관여한 것 같지는 않으며, 이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민무구 형제가 불충죄로 몰리는 한 원인이 된 것은 틀림없다.

1406년(태종 6) 8월에 난데없이 일어난 선위 파동은 민무구의 투옥을 유발하였다.

  이는 태종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외척 세력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정비의 정도에 지나친 투기와 불평은 태종의 비위에 거슬려 곧 그들 사이를 더욱 벌려 놓았다.

  또 민무구 형제들의 방자한 행동을 부추겼다.

 민무구 형제가 옥에 갇힌 지 4개월 후,정비가 금령을 범하고 친정과 내통한 사실이 드러나 더욱 악화시키고 만다.

  친정과 내통한 일이 있던 직후, 민무구 형제의 직첩을 거두어 서인을 만들 정도로 태종은 격분하였다.

  그 뒤 민무구 형제는 정비의 면목과 장인 민제와 빙모 송씨의 생존으로 인하여 겨우 생명을 보전해 나갔다.

1408년9월,민제가 죽자 같은 해 10월에 태종은 그들의 열 가지 죄를 열거한 교서를 반포하였다.

1409년 10월에 그들의 투옥에 관련된 이무를 죽였다.

1년 뒤에 제주도로 귀양가 있던 민무구 형제는 자진하는 비운을 당하였다.

그 동안 정비는 민무구 등의 일로 태종에게 불손한 말을 자주 하여 왕의 분노를 여러 번 샀다.

그리하여 민무구 형제가 죽은 지 1년 남짓 된 11월 9일에는 폐비의 위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태종은 내사를 대신 섭주할 만한 여자를 간택하려고 일빈이잉(정실 왕비 대신에 1명의 빈과 2명의 애첩을 두는 것)의

빈어제도를 정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10월 27일에 판통례문사 김구덕의 딸을 빈으로 삼아 명빈에 봉하였다.

또한 전 제학 노구산의 딸과 전 지함주사 김점의 딸을 잉실(媵室: 첩 혹은 후궁을 이르는 말)로 삼아 각각 소혜궁주와

숙공궁주로 봉하였다.

민씨 형제의 투옥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5년 뒤에 민무휼,민무회 두 형제에게 비화하였다.

1415년(태종15) 4월,염치용 등의 노비소송사건에 두 형제가 연루된 것이 복잡하게 얽혀 확대되어 갔다.

그러다 두 형제는 민씨 몸종 궁녀의 소생 원윤 비의 참고가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외방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불충으로 몰려 자진하는 불행을 당하였다.

이와 같이 정비는 태종의 무자비한 외척 숙청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한때 누렸던 영화의 꿈도 일장춘몽이 된 채 친정 4형제를 참혹하게 잃는 비운의 여인이 되었다.

1418년,세종이 즉위 해 후덕왕대비로 봉하였으며,

1420년 7월 56세로 사망하였다.

소생은 세종과 양녕,효령,성녕의 3대군과 정순,경정,경안,정선의 4공주가 있다.

시호는 창덕소열원경왕후(彰德昭烈元敬王后)이다.

능호는 헌릉(獻陵)으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산13번지 1호에 있다.

 

학자에게 수달피 웃옷을 벗어 덮어준 세종 대왕과 야사     작성일자;2009.12.21.월요일,맑음

 

밤이 으쓱한 어느날,

세종은 내시를 집현전으로 보내 오늘 학자중 누가 숙직하며 글을 읽고 있나 보고 오라는 명을 내렸다.

내시가 어명을 받고 집현전에 이르러 살펴보니 신숙주가 독서를 하고 있었다.

"신숙주 대감이 홀로 독서하고 있는 줄 아룁니다."

내시가 달려와 세종에게 아뢴다.

세종은 신숙주가 신당의 아들임을 알고

"신장도 글을 잘하더니 아들도 역시  공부를 열심히 하는구나!.부전자전이로구나"!

세종은 감탄하였다.

그리고 세종은 또 다시 내시에게 집현전을 보고 오라고 일렀다.

신숙주는 밤이 으쓱 하도록 글을 읽고 있었다.

밤이 깊자 세종이 직접 집현전을 찾아갔다.

그러던 중 신숙주가 고단하여서인지 꾸벅꾸벅 졸다가 책상에 엎드린 채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그 모습을 지켜 본 세종은 살그머니 들어가 자기가 입고온 수달피 웃옷을 벗어 신숙중의 등 위에 덮어 주고 나왔다.

글공부를 열심히 하는 선비를 아끼는 일이었다.

신숙주는 아무것도 모른체 잠에 깊이 빠져들었다.

아침에 수달피 웃옷을 보고 깜짝 놀란 신숙주는 간밤에 세종이 왔다  갔다는 소문을 듣게되었다.

신숙주는 감격하였다.

이러한 소문은 궁주에 널리 퍼지게되었고 다른 선비들도 감겨아여 독서에 더욱 분발하여 열중하게 되었다.

 

세종때 집현전에서 좋은책이 많이 나온것과 훈민정음 창제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세종은 젊고 재질이 있는 인재를 뽑아 집현전에 배치하고,

문과에 급제한 재능 있는 관리 중 휼륭한 학자를 모아 왕실 연구 기관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집현전이 설치되었던 36년동안 총90명의 관리들이 그 곳에서 일하였는데,

서거정,성상문.신숙주.양성지,정인지 같은 유명한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집현전은 임금의 자문기관이자 국가 제도및 정책을 연구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그들은 세종의 명을 받아 사상,역사,천문,지리.의약 등을 연구하였다.

한글 창제에 주도한 학자들은 정인지,최항,박팽년,신숙주,강희안,이개,이현로,성상문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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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과 정의공주          작성일자; 2010.10.18.일요일.맑음

 

1443년 12월 30일, 세종대왕은 역사에 길이 빛날 걸작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세종이 어떻게 한글을 만들었으며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이 단독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쓰여 있고,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의 일들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집현전 학사들이 훈민정음을 번역하고 해설서를 만드는 등의 작업에 참여한 것도 모두 훈민정음 창제 후의 일이다.

그렇다면 세종은 정말 혼자만의 힘으로 한글을 만든 것일까?

베일에 감춰진 한글 창제의 비밀과 관련해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 있는데 바로 죽산 안씨 일가의 족보인 '죽산안씨대동보'다.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 공주는 관찰사 안망지의 아들 안맹담과 혼인했는데,

공주의 시댁인 안씨 족보에 정의 공주와 훈민정음 창제에 관한 내용이 기록된 것이다.

 

 

                                  정의 공주와 안맹담의 묘-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63-1 

 

'죽산안씨대동보'의 내용에 의하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던 중 변음과 토착에 문제를 느끼고 이것을 아들인 대군들에게 연구 과제로 내린다.

그런데 대군들 중 문제를 풀어내는 사람이 없자 세종은 시집간 딸 정의 공주에게 문제를 내려보냈다.

정의 공주는 금세 문제를 풀어 바쳤고 이에 세종이 크게 기뻐하며 노비 수백 구를 상으로 내렸다는 내용이다.

세종이 풀어내지 못했던 문제를 아들과 딸에게 지혜를 구해야 했던 ‘변음과 토착’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이란?

‘변음과 토착’이 무엇인가에 대해 국어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학자는 한자 자체의 뜻에 기인하여 ‘변음’을 ‘소리의 변화 원리’로 보고 ‘토착’을 ‘소리를 토하는 원리’라고 해석한다.

또 다른 학자는 ‘변음’을 정음과 반대되는 말인 사투리로,

‘토착’은 ‘단군 때의 가림토’라고 본다.

‘변음과 토착’이 어떤 문제였는지 명확하게 밝히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비롯해 그와 관련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죽산안씨대동보'에서는 정의 공주가 대군들도 풀지 못한 문제를 풀었다고 하는데,

정의 공주는 어떤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을까?

'조선왕조실록'의 졸기(拙記, 고인에 대해 약술한 기록)를 보면,과연 정의 공주가 재능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의 공주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역산’을 해득했다고 한다.

‘역산’은 ‘천문학과 수학’을 뜻하는데, 역산을 해득했다는 것은 천문학과 수학에 능했다는 말이다.

세종 역시 천문학과 수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 예로 세종은 중국에서 빌려온 것이 아닌 조선에 맞는 일월식을 계산해 새로운 역법과 ‘일성정시의’라는 시계를

만들었으며 천체의 운행과 현상을 관측할 수 있는 ‘간의’, ‘혼천의’ 등을 만들어 당대의 천문학 진흥에 힘썼다.

또한 세종은 수학에 대한 열정도 남달라서 대군들에게 수학을 공부하게 했고,

신하들을 중국으로 유학보내 선진 수학을 배워오도록 했으며,

본인도 부제학 정인지에게 고난도 수학서인'산학계몽'을 배웠다.

졸기에도 나오듯,

세종은 자신을 쏙 빼닮은 정의 공주를 아끼고 사랑했다.

실제로 세종은 정의 공주가 시집 간 후에도 궐 근처에 살도록 했고, 부마(사위)인 안맹담에게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안맹담이 술을 좋아하는 것을 염려해 세종이 친히 안맹담의 친구들을 불러

“누가 안맹담과 술을 마시는가?”라고 주의를 주기도 했다.

만약 '죽산안씨대동보'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정의 공주는 총명하고 지혜로웠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이지적인 인물로서 자신에게 애틋했던 아버지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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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 제4대 세종 이야기   2009.12.21.월요일,맑음

세종;생졸; 1397~1450.54세

재위기간; 1418~1450.32년

능; 영릉

   영릉은 조선 왕릉 중에서도 천하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영릉 덕분에 조선 왕조의 국운이 100년은 더 연장되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다.    

   제4대 세종과 소헌왕후(1395~1446.52세) 심 씨의 합장릉이다.

 가계도;

   부; 제3대 태종

   모; 원경왕후 민씨

   왕후; 소현왕후 심씨  

     제5대 문종  

     수양대군;제7대 세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전소공주   

      정의공주; 신미 대사와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가한 공주

연빈 강씨; 화의군

신빈 김씨; 계양군-부인(인수대비 둘째 언니),의창군,밀성군,익현군,영해군,담양군

혜빈 양씨; 한남군,수춘군,영풍군

숙빈 이씨; 정한옹주상침 송씨; 정현옹주

 

태종의 셋째 아들이며,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며,비는 심온의 딸 소헌왕후이다.

1408년 태종 8년에 충녕군에 봉해지고,1412년 충녕대군에 진봉되었다.

당시 왕세자는 형인 양녕대군이 있었으나,

태종은 충녕이 왕위에 적합하다고 판단해 1418년 6월 세자로 책봉했다.

같은해 8월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재위기간 동안 유교 정치의 기틀을 확립하고,공법(貢法)을 시행하는 등 각종 제도를 정비해 조선왕조의

기반을 굳건히 했다.

또한 한글의 창제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문화의 융성에 이바지하고 과학기술을 크게 발전시키는 한편,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국토를 넓혔다.

 

세종은 태종이 이룩한 왕권 강화를 바탕으로 유교 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의정부의 권한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태종 때 실시된 6조직계제를 이어받아 국정을 직접 관장

했다.그 후 왕권이 안정되자 6조직계제를 폐지하고 의정부서사제를 부활했다(1436).

이는 집현전에서 성장한 많은 학자들이 의정부의 지나친 권력 행사를 견제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와 아울러 세종은 승정원의 기능을 강화해 실제적으로는 이를 통해 모든 정무를 통괄했다..

1420년 설치된 집현전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육성하는 동시에,

왕과 세자에 대한 학문적인 자문·교육과 각종 학술연구·서적편찬을 담당하는 기구였다.

성삼문·박팽년·하위지·신숙주·정인지 등 집현전을 통해 배출된 학자들은 유교 이념에 입각한 정치와 문화를 확립하는 데

주역이 되었다.

 한편 세종은 태조 이래의 억불 숭유 정책을 계승해 이를 정치 이념이나 정치 제도뿐만 아니라 사회 윤리의 측면에까지

확대했으며,'효행록''삼강행실도''주자가례'를 간행,보급해 유교적인 사회질서의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유교적인 의례를 확립하기 위해 예조,의례 상정소,집현전에서 국가의 의례인 오례,사서의 관혼상제에 관한 사례 등에

대한 중국의 옛 제도를 연구하게 해 이를 정리했다.

이와 함께 1419년 사사노비의 정리를 시작으로,1424년 오교와 양종을 선교 양종으로 정비해 각각 18개의 사찰만을

인정했다.

또한 이에 소속된 7,760결(結)의 토지 외에는 모두 몰수하는 등 불교를 억압했으나 왕실에서 개인적으로

불교를 믿거나 불교 행사를 갖는 일은 가끔 있었으며,세종도 유신들의 극단적인 불교 전폐론에는 뜻을 같이 하지 않았다.

특히,말년에 두 아들과 왕비를 잇달아 잃고 자신의 건강이 크게 악화되면서,

유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불당을 짓고 불경을 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태도가 숭유 정책의 방향을 바꾼다는 뜻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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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신화(金鰲新話)       작성일자; 2008.4.28.월요일,맑음

 

'금오신화'는 우리 나라 최초의 소설로써 조선 초기에 김시습이 지은 한문 단편 소설집이다.

완본은 전하지 않으며 현재 전하는 것으로는 5편 뿐이다.

일본에서 전해 오던 목판본 '금오신화'를

최남선이 발견하여 잡지 "계명 19호"를 통해 1927년에 국내에 소개하였다.

이 목판본은 1884년(고종21년) 동경에서 간행된 것이며, 상·하 2책으로 되어 있다.

이 목판본 '금오신화'는 1653년(효종4년)에 일본에서 초간되었던 것을 재간한 것이며,

현재 국립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금오신화'는 작자가 신비주의적·미신적 세계관을 부정하고,합리주의적·과학적 세계관을 수립하면서

그의 현실주의적 사상체계와 철학적 투쟁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또한 작자 김시습은

학문적 능력은 탁월하면서도 정치.경제적 기반은 취약한 15세기 후반의 신흥 사류로서

현실과의 심각한 갈등 속에서 극히 불우하고 고독한 생애를 보냈는데,

'금오신화는 그의 생애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된 자서전적 성격을 띠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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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야승           작성일자; 2008.04.29.화요일.맑음

 

'대동야승'은 조선시대 초 부터 인조 때까지의 야사·일화·소화·만록·수필 등을 모아 놓은 책으로

72권 72책,필사본으로 이루어져있다.

 

편집한 목록 중 '기축록 속'은 황혁의 '기축록'을 추가 보충한 것으로서

그 내용이 효종과 숙종 때의 사실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편찬 시기는 대체로 숙종 말에서 영,정조 사이 일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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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해필담       작성일자; 2008.04.28.월요일,맑음

 

'자해필담'은

'대동 야승'에 수록되어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김시양의 잡록집으로,

당시의 정치나 정치인,현인,악인 등에 얽힌 기담 및 이사에 속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자해필담에는 임진왜란 때의 이야기를 많이 기술하고 있지만,

이밖에 정사에서 볼 수 없는 기이한 이야기들의 단편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의 중점은 어느 신변잡사나 만담쇄언과는 달리 수록한 사건 자체에 중점을 두고 있다.

다른 잡록집인 '부계문기'에서 인물과 인물평에 주안을 두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내용은 '한서','무제기','지리지'의 내용 가운데 우리나라에 대한 기록이 잘못된 점을 지적한 것이다.

조선 태조 때에 조반이 명나라의 고제를 탈탈(원나라 말기의 승상)의 진중에서 만난 일이 있다고 한

이야기가 근거 없음을 반박한 것,

중국 고대의 진시황을 여불위(呂不韋)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 거짓이라고 한 것,

고려의 우왕,창왕은 신돈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모함이라고 은연중 시사한 점 등

정사에서 바로 쓰지 못한 기록이나 정사의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으려는 역사 의식이 작용한 것이다.

 

'자해필담'은 다른 잡록처럼 조각조각으로 이루어진 단편적인 생각에 불과하나,

조각의 이야기를 통하여 비평과 나라를 근심하고 세상을 개탄하는 정열과,

권선징악의 염원이 일관되게 담겨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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